《소울》 “거창한 꿈 없는 삶이어도 괜찮아”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1.30 12:00
  • 호수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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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픽사의 23번째 작품 《소울》이 던지는 질문

많은 이가 꿈을 찾고 싶어 한다. 때로 그것은 인생 전체를 걸어야 하는 과정이며, 살아가는 의미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운 좋게 이미 꿈을 찾아,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흔들림 없이 달려가려는 자세는 대부분의 경우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꿈이 없다면, 이렇다 할 목표를 찾을 수 없다면 무의미한 삶일까? 디즈니·픽사의 23번째 작품 《소울》이 던지는 질문이다.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온 픽사 스튜디오가 또 한 편의 걸작을 내놨다.

영화 《소울》의 한 장면ⓒ월트 디즈니 컴퍼니코리아 제공

태어나기 전, 영혼들이 사는 세상

디즈니·픽사 애니메이터들의 상상력은 아마도 무한대의 영역에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 작품이 이토록 놀라움의 연속일 순 없다. 상상력의 ‘한계 없음’은 전작들에서도 이미 잘 드러난다. 기쁨과 슬픔 등 감정에 인격을 부여한 《인사이드 아웃》(2015),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가슴 뭉클한 상상을 펼친 《코코》(2017) 등이 바로 그 증거다. 《소울》은 특히 이 두 작품의 장점을 조합, 새롭게 파생해 낸 흥미로운 결과물로 보인다. 추상적인 개념들을 생생한 캐릭터와 풍경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인사이드 아웃》과, 사후 세계와 전생 같은 죽음을 둘러싼 또 다른 차원을 배경으로 삼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코코》와 닮았다.

뉴욕의 한 학교에서 음악 선생님으로 일하는 조(제이미 폭스)에게 인생 최고의 날이 찾아온다. 재즈 뮤지션을 꿈꾸는 그가 평생 꿈의 무대로 생각해 왔던 클럽에서 공연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조는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해 영혼이 된다. 그가 당도한 곳은 지구에서의 삶을 마치고 온 이들이 향하는 ‘머나먼 저세상’과 아직 삶을 시작하지 않은 꼬마 영혼들이 머무르는 ‘태어나기 전 세상’ 유 세미나가 공존하는 세계다. 얼떨결에 유 세미나로 떨어진 조는 꼬마 영혼들이 고유의 성격을 갖추고 태어날 준비를 돕는 멘토가 된다. 그와 짝이 된 멘티는 22(티나 페이). 그간 숱한 멘토링에도 불구하고 태어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시니컬한 영혼이다. 어떻게든 돌아가야 하는 조와 절대 지구에 가고 싶지 않은 22. 둘은 지구 통행증을 놓고 모종의 거래를 하고, 계획대로 모험을 시작한다.

피트 닥터 감독은 지금은 스물세 살이 된 그의 아들을 보며 《소울》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아들이 처음부터 그만의 고유한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듯 보였다는 것이다. “과연 그게 어디에서 왔을까 궁금증을 가지고 아이를 지켜보다가, 사람은 저마다 고유하고 구체적인 자아의식을 가지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오기 전 각 영혼이 자신만의 성격을 구축하는 별도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소울》의 상상력은 그렇게 탄생했다. 스토리텔링만 기발한 것이 아니다. 애니메이션의 표현력에 한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추상적이고 부드러운 이미지인 영혼들의 세계, 실제 풍경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 분주하고 사실적인 뉴욕의 거리를 오가며 펼쳐지는 조와 22의 모험은 그 자체로 충만한 시각적 재미를 선사한다.

영화 《소울》의 한 장면ⓒ월트 디즈니 컴퍼니코리아 제공

‘지금 여기’의 소중함

제목인 《소울》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영혼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조가 심취한 재즈에 담긴 본질이기도 하다. 조는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주인공 중 최초의 40대 흑인 남성이다. 영화 전반에서는 미국 흑인 음악에 뿌리를 둔 재즈가 중심에 놓이고, 흑인 커뮤니티의 묘사 또한 현실감 있게 표현된다. 단순히 주인공의 인종만 흑인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문화를 이해하고 정서를 보여주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소울》은 그간 디즈니·픽사가 꾸준하게 시도해 온 문화적 다양성의 측면에서도 합격점을 받는 작품이다.

즉흥성과 자유로운 변주를 특징으로 하는 재즈는 ‘세상을 사는 방법에는 정석도, 틀린 것도 없다’는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조와 22의 모험은 서로가 결국 그것을 깨닫는 과정이다. 유 세미나에서 성격을 획득한 꼬마 영혼들은 마지막 단계에서 열정이나 꿈에 해당하는 ‘불꽃’을 찾아야 한다. 지구에 태어날 수 있는 자격은 불꽃을 찾아야만 비로소 생긴다. “음악은 단순히 꿈이 아닌 삶의 이유”라고 말하는 열정 넘치는 조와, 살아보기 자체를 거부하는 시니컬한 22가 사사건건 부딪치는 이유다.

그러던 22가 달라지는 건 우연히 조의 몸에 들어가 인간의 삶을 잠시 경험해 본 뒤부터다. 거창한 꿈과 목표를 찾을 수 없어 태어나는 것에 회의적이던 22는, 피자를 처음 맛본 때와 트롬본 연주에 집중하는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순간, 단풍나무 씨앗이 손바닥으로 떨어지던 순간 등 일상의 풍경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런 22를 바라보던 조에게도 변화가 일어난다. 우여곡절 끝에 꿈의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친 조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지 않다. “평생 오늘만을 기다렸는데, 기분이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허무해 보이기까지 한다. 《소울》은 누군가가 일생 동안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 결승점에 도달하는 것이 해피엔딩이라고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 도달점 이후에 무엇이 있는가를 질문하는 작품이다.

현재 디즈니플러스의 월 요금은 6.99달러로 3월 말부터 7.99달러로 인상될 예정이다. ⓒ연합뉴스
현재 디즈니플러스의 월 요금은 6.99달러로 3월 말부터 7.99달러로 인상될 예정이다. ⓒ연합뉴스

22와 함께 모험을 하며 조가 새삼 깨닫는 것은 ‘지금, 여기’의 가치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맡는 바람의 냄새, 가족의 사랑이 깃든 물건,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의 아름다움, 발에 바닷물이 닿을 때의 감촉. 조는 삶을 진정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가치가 바로 그런 사소한 것들로부터 빚어진 것이었음을 발견한다. 《소울》은 모두가 인정할 만한 재능과 성취만이 우리의 존재 가치는 아니라고, 인생에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만 삶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매 순간 눈앞의 삶을 즐기라는, 평범하지만 값진 조언은 전염병에 잠식돼 일상을 잠시 빼앗긴 시대에 전하는 영화의 애정 어린 메시지다. 마침 《소울》은 코로나19로 인해 지난해 3월부터 한자리에 모이지 못한 디즈니·픽사의 애니메이터들이 완성한 첫 번째 ‘재택근무 애니메이션’이다.

영화 《토끼굴》의 한 장면ⓒ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영화 《토끼굴》의 한 장면ⓒ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본편 상영 전 놓칠 수 없는 《토끼굴》

본편이 시작되기 전 짧은 단편 상영을 붙이는 건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의 전통이다. 《구름 조금》(2009), 《낮과 밤》(2010), 《라바》(2014) 등 이미 팬들에게 명작으로 인정받은 단편도 여럿이다. 《소울》 상영 전 만날 수 있는 단편은 《토끼굴》. 대사 없이 캐릭터의 행동으로만 진행되는 이야기다. 소심한 아기 토끼가 땅속에 굴을 파서 자기만의 집을 지으려 한다. 이미 각기 다른 개성의 집을 만들어 사는 두더지와 쥐 등 이웃 동물들이 도와주려 하지만, 토끼는 부끄러운 듯 설계 도면을 가리고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 더 깊게 땅굴을 파내려간다. 자꾸만 겁을 집어먹고 도망가기 바쁘던 토끼가 이웃들의 진심을 확인하게 되는 건, 예기치 못한 사건을 겪은 뒤다. 땅속 동물들의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담은 이 단편은 거리 두기가 일상이 되어 버린 시대에 ‘함께하는 것’의 가치와 소중함을 뭉클하게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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