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만의 인연 [최보기의 책보기]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thebex@hanmail.net)
  • 승인 2021.02.0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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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ㅣ고상만 지음ㅣ여문책 펴냄ㅣ362쪽ㅣ1만7500원

대략 40대 이상 중·장년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수필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이름을 댈 만한 특별한 작품이 없을 경우 대부분 ‘피천득의 인연’이라 답할 것이다. 이유는 학생 때 교과서에서 ‘수필의 대표작’으로 배웠고, 시험문제에 반드시 나오는 작품이라 최소한 저자와 제목, 여주인공 이름 아사꼬(朝子)만큼은 철저히 외워둬야 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조선의 청년 ‘나’가 일본 동경에 들렀을 때 하숙집 어린 딸과 인연이 돼 뭔가 이루어지려다 말았다는 줄거리로 지금 보자면 흔하게 널려 진부한 이야기다. 이 작품이 실은 사실적 수필이 아니라 허구적 소설이라는 이야기는 아주 나중에 풍문으로 들었다.

수필가이자 시인이었던 고 피천득 교수는 조선이 일본에 강제합병 됐던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중국 유학 후 서울대 영문학 교수를 지냈다. 이 시기 공립학교에 다님으로써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소수 상류계층이었고, 더군다나 일본, 중국, 영국, 불란서 등 해외로 유학을 가는 것은 상당한 권력층이거나 부유층 자제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해외 유학파들은 그때까지 엄연했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유교문화로 인해 ‘상놈의 자식들이나 하는 공상’을 기피해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를 갔든, 이유 불문하고 불문과를 갔든 주로 ‘양반스러운’ 문과(文科)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또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이나 윤동주 시인, 문익환 목사 같은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많은 해외 유학생들은 식민지 체제에 순응, 개인의 사익에 충실하되 공익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삶을 살기도 했다고도 전한다.

그에 비해 ‘고상만의 인연’은 좀 색깔이 다른 인연이다. 1970년 경기도 생인 고상만은 대학 입학 후 ‘학생운동, 제적, 투옥’을 거친 전형적 학생운동권 출신의 인권운동가다. 대통령 직속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이나 연극 《이등병의 엄마》를 기획, 제작하는 일이 주로 그가 해오고 있는 것들이다. 그가 하는 강의 제목 역시 ‘현대 사화와 인권’이다. 산문집 《인연》은 나이 반백을 갓 넘긴 그가 정의와 인권에 눈을 부릅뜬 이래 만났던 수천의 사람들 중 꼭 남기고 싶은 이들과 얽힌 아프거나, 감동스런 이야기들이다. ‘십중팔구 빨간 운동권 동지들과의 투쟁담’일 것이라 넘겨짚으면 오판이다.

1991년 운동권 학생들이 사학재단의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 학내 농성과 데모를 할 때 자식을 농성장에서 끌어내기 위해 찾아오는 아버지들은 대부분 ‘빨갱이 친구들 꾐에 내 자식이 넘어갔다’며 노발대발했지만 어떤 후배 여학생의 아버지는 ‘딸이 이 싸움에서 져 피해를 입지 않도록 꼭 이겨 달라’는 부탁을 해 고상만 학생을 놀라게 했다. 결국 감옥에 끌려갔을 때 그 여학생이 면회를 왔는데 이유는 단지 그녀가 ‘고상만 면회 담당’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매일 면회 때마다 편지를 남겼는데 ‘오늘의 날씨는 몇 도이며 개나리는 얼마나 폈고, 바람은 얼마나 불며 하늘과 바다는 무슨 색깔이’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바깥 세상의 풍경을 전해주려는 의도이자 배려였다. 독자가 보기에는 둘이 연인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달리 쓸 말이 마땅치 않아서였기 때문으로 읽히지만. 돌아가실 때 유산으로 50만원을 남겼던 그 여학생의 아버지는 고상만의 장인, 그러니까 그 여학생이 훗날 고상만의 아내가 되는 그런 훈훈한 인연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전두환의 평생동지’로서 운동권 아들과 왕래가 끊겼던 아버지가 ‘고상만의 평생동지’로 변해 출옥 때 두부 한 모와 담배 한 갑을 손에 들려주던 인연, 영화 《7번방의 선물》의 모티브가 됐던 ‘무기수 정원섭’ 목사와의 인연, 연극 《이등병의 엄마》를 만들어 공연을 하면서 맺게 된 다수의 의인들과 상처를 이겨내는 어머니들과의 인연이 담겼다. 딱 10년 전 서평을 썼던 이건범의 《내 청춘의 감옥》에 삶과 인연의 필연성과 숙연함이 더 깊이 침투한 것 같은 책이다. 사익에 충실하되 공익은 아랑곳하지 않았던, 이제 막 육십을 바라보는 나의 삶을 내리쳐서 잘게 부수어 다시 세울 도끼가 번뜩이는 책이다. ‘책은 우리 안에 꽁꽁 얼어버린 사고의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돼야 한다’ (프란츠 카프카)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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