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걸으면 보이는 것들 [최보기의 책보기]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thebex@hanmail.net)
  • 승인 2021.02.1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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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발견 (지혜와 위로를 주는)》ㅣ송태갑 지음ㅣ미세움 펴냄ㅣ310쪽ㅣ1만7000원

《풍경의 발견》의 주제는 ‘남도 원림에서 풍류를 만나다’이다. ‘원림은 누정(정자) 주인이 나무와 꽃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심고 가꾼 인위적인 정원을 뜻한다. 원림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으려던 선인들에게 은신처가 돼주고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남도의 원림에는 자연과 사람, 정치, 사회, 문화, 예술 등 애틋한 삶과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풍경 속에 스며든 남도 원림의 매력을 찾아 숨을 고르고 잠시 쉬어가 보자’는 것이 이 책을 낸 취지다. 여기서 남도란 구체적으로 전라남도를 말한다. 원림은 순천만 국가정원, 곡성 기차마을 장미정원처럼 현대에 조성된 것들이 아니라 조선시대 3대 별서정원으로 치는 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동 정원, 강진 백운동 정원처럼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조경학을 전공한 정원연구 전문가 송태갑 박사가 엄선한 정원들이다.

남해안의 섬이 고향인 필자의 유년기 기억 중 화단(花壇)의 풍경이 선명하다. 나라 전체가 비교적 가난했던 1970년 전후여서 섬마을 역시 반듯한 기와집보다 말 그대로 ‘초가삼간’이 더 많았던 시절이다. 그런 집들의 손바닥만한 마당일지언정 장독대와 화단은 어느 집이나 필수로 있었다. 주로 대문가 담장에 붙여 조성한 화단은 색깔이 있는 빈 병이나 벽돌, 돌멩이를 거꾸로 비스듬히 열 지어 꽂아 마당과 경계를 지었는데 해바라기, 작약, 모란, 채송화, 봉숭아, 나팔꽃, 동백, 해당화 등 갖은 꽃들이 계절에 맞춰 피었다. 화단 가꾸기는 가사와 농사, 갯일로 바쁜 섬 아낙네들의 중요한 문화예술 활동 중 하나였고, 처녀들은 그 화단의 봉숭아 잎을 따 손톱을 빨갛게 물 들인 후 첫눈이 오기를 기다렸다. 산과 들, 강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진, 헤아릴 수 없이 종류가 많은 남도의 정원들은 그러한 어머니들의 정과 심미적 심성이 짙게 녹아있는 것이다.

저자의 풍부한 문화, 역사 지식과 잘 찍은 사진이 정갈하게 편집된 책 《풍경의 발견》은 정독하지 않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사진만 감상하더라도 피로에 지친 심신을 달래는 ‘힐링’으로 충분하다. 저자의 느릿느릿한 정원 산책은 ‘청산에 뼈를 묻고 홀로 절개를 지킨’ 담양 독수정에서 출발해 ‘느리게 걸으니 비로소 보이는’ 광주 풍암정을 거쳐 ‘진솔한 삶과 아름다운 풍광이 녹아든’ 진도 운림산방에서 멈추기까지 모두 27개 정원에 이르는데 풍경(사진)과 정원을 만든 사람, 만든 이유, 거기에 얽힌 역사와 사연 등을 독자가 지루하지 않도록 간결하게 정리했다.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니 무릉도원이 마음으로 찾아오는’ 보길도 부용동 정원은 고산 윤선도가 만들었다. 병자호란 때 불충을 이유로 경상도 영덕에 유배됐던 윤선도는 유배가 풀리자 제주도에서 은거할 결심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태풍을 만나 예정에 없던 보길도 황원포에 닿았다. 그런데 연꽃을 닮은 그곳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을 짓고 그곳에 안착해 정원을 가꾸었다. 그런 만큼 부용동 정원은 공간, 스케일, 의미 등에서 다른 별서정원들과 차원이 다르다. 이곳에는 인공 연못이 두 개 있는데 ‘자연에서 씻어낸다’는 뜻을 가진 세연지(洗然池)다. 두 연못 사이에 조그만 섬을 조성해 그 위에 세운 정자가 세연정이다. 풍류를 즐기는 고산이 세연지는 수상무대, 세연정은 관람석으로 이용했는데 이런 환경과 문화 속에서 ‘어부사시사’가 나왔던 것이다.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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