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성범죄 영상물 삭제, 0.18%에 그쳐
  • 조해수·유지만 기자 (chs900@sisajournal.com)
  • 승인 2021.03.01 10:00
  • 호수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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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성범죄 특집 ②] 국제공조 시급...피해 영상물 삭제기관 다원화해야
ⓒ시사저널 임준선
ⓒ시사저널 임준선

성착취물 등 피해 영상물에 대한 삭제는 디지털 성범죄의 풀리지 않는 숙제다. 삭제 권한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에 있다. 방심위는 먼저 인터넷 사업자에게 자율조치를 요청하고, 이후 심의를 거쳐 삭제·접속 차단 조치를 내린다.

문제는 국내 서버에서만 '삭제'가 가능하고, 해외 서버의 경우 '접속 차단'밖에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방심위에 따르면, 2018~2020년 전체 심의 건수 7만9081건 중에 삭제가 이뤄진 것은 149건에 그쳤다. 0.18%만 삭제된 것이다.

이에 대해 방심위 측은 “해외 유통 비중이 높은 디지털 성범죄 정보에 대한 규제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 사이트 운영자 또는 유관기관과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2019년부터 국제인터넷핫라인협회(INHOPE), 실종학대아동방지센터(NCMEC) 등과 협약을 맺어 해외 사업자를 대상으로 불법·유해정보에 대한 자율규제를 적극 요청하고 있다”면서 “최근 3년간(2018~2020년) 사업자 자율조치를 통해 2만4313건의 삭제를 이끌어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피해 영상물을 삭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 교수는 “강간 범죄에서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적지만,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많다. 삭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일상에 복귀할 수 없고,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피해자가 결국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면서 “가해자들은 ‘박제’한다고 표현한다. 나중에는 (피해 영상물이) 성매매 홍보 영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아무 조치가 없는 상황”이라고 성토했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 역시 “접속 차단은 국가가 할 수 있는 조치라고 하기엔 너무 미약하다. 다른 IP 주소로 접속하면 그만이다”면서 “불법 유통 사이트에 대한 폐쇄와 처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성착취물이 올라간) 불법 서버가 가장 많은 나라가 미국이다. 카드 결제를 통해 쉽게 호스팅 업체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수사 공조를 할 때 연방법이 근간이 된다. 그러나 성착취물에 대한 주(州)법은 있지만 연방법은 아직 없다"면서 "연방법을 만들기 위해 ‘미국사이버인권보호기구(CCRI)’라는 시민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우리 단체가 CCRI를 직접 만나고 오기도 했다. 미국 연방법으로 디지털 성범죄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피해자들에게도 중요하다. 디지털 성범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 공조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출처= 방송통신위원회
출처=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검·경, 피해 영상물 삭제 가능해야

적극적인 피해 구제를 위해 '삭제 권한'을 방심위에만 맡기지 말고 다원화 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먼저 법률에 삭제명령을 규정해 법원이 부수처분으로 삭제명령을 의무화하는 방법이 있다. 이를 통해 가해자의 재유포 행위에 대한 민·형사상 처벌을 용이하게 할 수 있다.

검찰이 삭제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검찰 관계자는 “현행법상 검찰이 피해 영상물을 삭제할 권한이 없다”면서 “검찰은 형(刑) 집행기관이다. 피해 영상물 삭제 절차의 중심에는 방심위가 아닌 검찰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한 근거 법률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형법 제48조(몰수의 대상과 추징)를 적극적으로 해석해 피해 영상물 삭제에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형법 제48조제3항은 "문서, 도화, 전자기록 등 특수매체기록 또는 유가증권의 일부가 몰수에 해당하는 때에는 그 부분을 폐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클라우드를 포함한 전체 피해 영상물과 동일 원본을 이용한 재업로드 영상물까지 몰수·폐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속한 삭제를 위해 방심위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경찰이 수사단계에서 선(先)조치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서승희 대표는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을 보면, 경찰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응급조치·임시조치·긴급임시조치를 할 수 있다"면서 "성범죄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방식을 도입해 피해 영상물이 확산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무부 성범죄수사국 신설, 결국 흐지부지"

성범죄 관련 법이 여전히 남성 중심주의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제14조다. “카메라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에서 ‘성적 수치심’이 문제가 됐다.

김현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로 지적돼 온 성폭력처벌법상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의 삭제는 여전히 개정되지 않고 있다”면서 “성폭력과 관련된 처벌조항이 과거에 형법의 ‘정조의 죄’ 장에 위치해 있었던 것처럼 성폭력 범죄가 여전히 순결과 정조의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이는 피해자가 성폭력 문제를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잘못된 통념을 재생산할 위험성이 있다”고 비판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n번방 사건의 여파로 디지털 성범죄 근절 방안이 활발하게 모색되고 있다. 문제는 n번방 효과가 얼마나 지속되겠냐는 것이다. n번방 사건이 잊혀지면, 결국 디지털 성범죄 문제도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법무부는 지난해 디지털 성범죄를 담당하는 전담 '국(局)' 설립을 추진했지만 지금은 올스톱된 상태다. 법무부 관계자는 “당시 국민적 관심이 쏠리면서 ‘성범죄수사국’ 신설 계획이 추진됐다. 처음에는 ‘여성국’으로 하려고 했는데, 여가부 소속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와 법무부를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수사’를 넣었다”면서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흐지부지됐다. 더구나 법무부 장관이 교체(추미애->박범계)되는 바람에 지금은 ‘없던 일’이 된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사진이나 영상의 불법촬영·유포, 이를 빌미로 한 협박, 사이버 공간에서의 성적 괴롭힘 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나무여성인권상담소 지지동반팀(02-2275-2201, digital_sc@hanmail.net), 여성긴급전화 1366,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02-735-8994, www.women1366.kr/stopds),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02-817-7959, hotline@cyber-lion.com)에서 지원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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