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미나리》에 담긴 어떤 진심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3.10 14:00
  • 호수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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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시상식 주요 부문 후보로 거론…전 세계가 주목하는 영화 《미나리》의 특별함

1980년대, 미국 땅에 정착하려는 어느 한인 가족의 이야기가 전 세계를 사로잡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 리 아이삭 정 감독이 자신의 유년 시절 기억을 바탕으로 만든 가족영화 《미나리》다. 브래드 피트의 제작사로도 유명한 플랜B가 제작하고, 한국계 미국인 배우 스티븐 연이 주연과 프로듀서를 겸한 작품이다. 한국 배우 한예리와 윤여정도 참여했다. 대사의 80% 이상은 한국어지만, 《미나리》의 국적은 미국이다.

이 영화는 지난해 2월 제36회 선댄스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이며 관객상과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해외에서 이미 70개가 넘는 상을 싹쓸이했다. 이 중 윤여정이 여우조연상으로 받은 트로피만 스무 개가 훌쩍 넘는다. 오는 4월 열릴 아카데미시상식의 주요 부문 후보로도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세계를 먼저 사로잡은 《미나리》의 특별함은 무엇일까.

ⓒ판씨네마㈜ 제공
ⓒ판씨네마㈜ 제공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언어

“《미나리》는 그들만의 언어로 대화하는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그 언어는 단지 미국이나 어떤 외국의 언어가 아닌 ‘진심의 언어(Language of Heart)’죠. 저 역시 그 언어를 배우려 노력하고 (자녀 세대에게) 물려주려고 합니다.” 현지시간으로 지난 2월28일, 제7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미나리》가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직후 리 아이삭 정 감독이 남긴 수상소감이다. 앞서 골든글로브는 후보작들을 발표한 뒤 한 차례 홍역을 치른 바 있다. 대사의 대부분이 한국어라는 이유로 《미나리》를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렸기 때문이다. 작품상·각본상 등 주요 후보에서는 모두 제외되면서 미국 안팎을 막론하고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의 중심에 섰다. 감독의 수상소감은 이러한 최근 상황들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도 보인다.

그보다 중요한 건 ‘진심의 언어’라는 감독의 말 그 자체다. 이보다 더 《미나리》를 잘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 아칸소 지역의 광활한 농장. 이곳에서 제대로 된 집도 아닌 트레일러에서 살며 새로운 삶을 일구려는 젊은 부부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 가족의 사연을, 감독의 내면에서 은은하게 차오르는 바로 그 언어로 썼다. 척박한 환경 안에서도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잊지 않으려는 가족의 이야기는, 감독 개인의 역사와 국적을 떠나 보편적인 울림이 되어 보는 이의 마음에 가닿는다.

《미나리》는 부부의 자녀 중 막내 데이빗(앨런 킴)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감독의 어린 시절이 반영된 캐릭터다. 부모가 병아리 감별사 일을 하며 채소농장을 꾸려가는 동안 어린 동생 데이빗을 챙기는 일은 딸 앤(노엘 케이트 조)의 몫이다. 데이빗의 시선을 따라 아칸소로 이주한 가족의 상황을 보여주던 영화의 축이 한 차례 이동하는 건, 남매를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 외할머니 순자(윤여정)가 오면서부터다. 냄새만으로도 딸의 눈물샘을 터뜨리는 식재료들을 잔뜩 싸들고 온 이 할머니의 보따리 속에는 미나리 씨앗도 있다. 하지만 어린 데이빗은 쿠키도 구울 줄 모르고, 낯선 ‘한국 냄새’를 풍기는 순자더러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 같지 않다”며 삐죽대기 일쑤다. 데이빗의 말마따나 요리에는 관심도 없고 프로 레슬링을 즐겨 보며, 손자를 짓궂게 놀려대는 순자의 캐릭터는 이 영화의 사랑스러운 유머를 담당한다.

ⓒ판씨네마㈜ 제공
ⓒ판씨네마㈜ 제공
ⓒ판씨네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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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는 잡초처럼 어디서나 잘 자라”

터전을 떠나 낯선 곳에 뿌리내려야 하는 사람들의 삶에 기쁨과 긍정만이 존재할 순 없다. 오히려 거기에는 매일 찾아오는 크고 작은 실패와, 점차 익숙해지기에 더욱 깊이 감각되는 두려움이 더 크게 자리한다. 어떻게든 가족에게,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성공의 경험을 선사하고 싶은 제이콥의 눈 속에는 그 마음이 각인되어 있다. 곁에서 그를 바라보는 모니카 역시 사랑만으로 가족을 끌어안고 역경을 헤쳐가는 건 쉽지 않음을 절감한다.

하지만 《미나리》는 이민자들이 겪는 현실적 고난 가운데에서도 삶의 순간들 속 작은 아름다움들을 놓치지 않고 꽉 움켜쥔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이미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그걸 넘어 ‘진짜 가족’이 되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민자 가족이 낯선 문화권에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에 주목하는 대신, 점차 가까워지는 데이빗과 순자의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와 사소하지만 마음을 울리는 순간들에 대한 묘사에 공을 들인다. 영화의 이러한 상냥하고도 적극적인 의지가 《미나리》를 인상적으로 기억하게 한다. 삶을 지탱하는 힘은 결국 그런 순간들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낯선 땅에 온 한 가족의 미시사를 경유해 바라보는 20세기는 그렇게 그리운 냄새, 가족 내 유대와 사랑의 기억들을 소환한다. “미나리는 잡초처럼 아무 데서나 잘 자라니까 누구든 다 먹을 수 있어. 김치에 넣어 먹고 찌개에도 넣어 먹고 아플 때 약도 되고. 미나리는 원더풀, 원더풀이란다!” 순자의 대사는 미나리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터전에 뿌리내리려는 고단함을 멈추지 않았던, 세상의 모든 이들을 향한 원더풀한 찬사가 된다.

오스카 청신호는 일찌감치 켜졌다. 골든글로브 수상을 신호탄으로 《미나리》의 아카데미시상식 수상 가능성에도 무게가 실렸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이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포함해 4관왕의 쾌거를 이루었기에, 언어의 장벽을 넘은 수상 분위기가 올해도 이어지지 않겠냐는 분석이다. 《미나리》는 이미 지난달 발표된 아카데미 예비 후보에서 음악상과 주제가상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한예리가 영화의 엔딩곡인 ‘레인 송(rain song)’을 직접 불러 화제가 된 바 있다. 각본상과 작품상, 여우조연상 후보 등이 유력하게 거론되는 가운데 최종 후보는 오는 3월15일 발표된다.

영화 《페어웰》의 한 장면ⓒ오드 AUD 제공
영화 《페어웰》의 한 장면ⓒ오드 AUD 제공

닮은 영화, 《미나리》와 《페어웰》

수상 여부를 떠나 《미나리》는 세계 영화시장에서 하나의 변화를 상징한다. 이민자 2세대가 만든 새로운 결의 영화라는 점에서다. 지난해 골든글로브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페어웰》(국내 2월 개봉)의 감독 룰루 왕 역시 중국계 미국 이민자 2세대다. 두 영화 모두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민자 가족을 중심에 놓되, 과거 영화들의 방식대로 문화적 차별 상황이나 경계인으로서의 혼란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이들 영화는 단순히 아시아계 주인공을 내세우거나 아시아 문화권을 주목하는 기존의 그 어떤 시도와도 다르며, 보편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공감의 힘이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문라이트》(2016),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 등 작지만 탄탄한 내공의 영화들을 선보여온 미국의 투자배급사 A24에서 비슷한 시기에 선보인 작품이라는 것도 눈길을 끄는 공통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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