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북한판 ‘전략적 인내’ 천명한 이유
  • 정대진 아주대 통일연구소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5.20 07:30
  • 호수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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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원칙적 입장에 ‘고난의 행군’으로 돌파 의지 다지는 北
만나자는 美에 변화부터 요구하는 北…한·미 정상회담 중요성 더 커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대의 말과 정책이 자극적 풍미 가득한 인스턴트 조미료 음식 같았다면, 조 바이든 대통령 시대의 말과 정책은 천연 재료로 맛을 낸 슴슴한 건강식 같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주 상식적이고 예측 가능한 말과 정책을 통해 트럼프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모든 사안에 접근하고 있다. 그는 21분간의 취임사에서부터 11차례 통합을 강조하며 자기 영혼 전체를 다 바쳐서라도 찢어진 미국을 다시 하나로 만들겠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의지를 천명했다. 

대외정책에서도 트럼프 시대의 일방주의와 예측 불가능성을 걷어냈다. 기후변화협약에도 복귀했고 이란과의 핵 합의 복원도 추진했다. 상식적인 국제질서와 평화로운 환경이 도래하는 듯해서 많은 사람이 기대감을 가지고 바이든 대통령 취임 100일 이후를 맞이하고 있다. 그런데 기대감이 많지 않은 이들 또한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북한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바로 여기에 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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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 대통령 취임 100일 즈음에 미국 행정부는 새로운 대북정책 검토 완료 사실을 발표했다. 미국은 앞으로 북한에 대해 ‘잘 조율되고 실용적인 접근’을 하겠다고 밝혔다.ⓒEPA 연합

미국, ‘잘 조율되고 실용적인 접근’ 원칙 내세워 

바이든 대통령 취임 100일 즈음에 미국 행정부는 새로운 대북정책 검토 완료 사실을 발표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과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은 입을 맞춘 듯이 앞으로 북한에 대해 ‘잘 조율되고 실용적인 접근(calibrated, practical approach)’을 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내용과 시책을 밝힌 것이 아니라 원칙과 기조만 선보였다. 

제3자 입장에서 보면 ‘최대한의 압박(maximum pressure)’이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보다는 북한 입장에서 손해 볼 것 없는 접근법이 나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북한에 미국을 한번 만나 대화도 나눠보고 실용적으로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보면 좋겠다고 조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 이후 미국에 대해 ‘새로운 계산법’을 줄곧 요구했던 북한으로선 “그래서 뭐 하자는 거이가?” 하는 소리가 나올 만한 상황이다. 알맹이 없이 자신들의 기대 수준이나 바람과는 거리가 먼 원론적인 입장만 미국이 밝힌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도 그냥 “잘 접수했다”는 반응만 보이고 있다.  

미국은 만나서 설명할 테니 일단 보자고 북한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미국은 지난 2월부터 북한에 접촉 제안을 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백악관은 3월15일, 그동안 북한에 접촉 제안을 했으나 답을 얻지 못했다고 밝혔다. 3월18일 북한의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도 “미국은 2월 중순부터 뉴욕을 포함한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와의 접촉을 시도해 왔다”고 밝혀 이를 확인했다. 최 부상은 이어서 “미국은 자기들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계속 추구하는 속에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할 것인지를 잘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하며 미국의 접촉 제안을 “시간벌이용, 여론몰이용”이라고 비난했다. 

요컨대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해야만 만남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미국의 태도가 애매모호하게 시간벌이나 여론몰이처럼 보이는 이상 자신들도 강대강, 선대선 원칙에 따라 비례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그래서 이번 미국의 새 대북정책 기조 발표와 접촉 제안에 대해서도 무난하게 “잘 접수했다”고 애매모호하게 답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구체적인 제안이나 조건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에 대한 내용이 없는 애매모호한 태도에는 북한도 역시 애매모호하게 대응한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북한은 자신들의 갈 길을 계속 가고 있다. 지난 5월12일 북한 노동신문에는 때아니게 ‘공산주의는 우리 인민의 최고 이상’이라며 이를 성취하고자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더욱 단결하고 매진해야 한다는 기사가 전면에 실렸다. 흔히 쓰는 사회주의라는 표현 외에 좀 더 근본적인 공산주의 이상을 강조하고, 과거 증산운동이자 사상개조운동이었던 천리마 시대의 구호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를 호출하며 자력갱생과 정면돌파 의지를 다시 강조한 것이다. 

지난해 말부터 노동신문에는 천리마 시대의 구호와 일화들이 연속적으로 소개되었다. 올해는 한발 더 나아가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고난의 행군을 언급하며 당 간부들에게 신발끈을 단단히 동여매고 새로운 길에 나설 것을 재촉하고 있다. 또한 김 위원장은 지난 4월 당 세포비서대회(세포는 5~30명 규모의 당 최말단 조직이며, 세포비서는 해당 조직의 책임자를 뜻한다)에서 “그 어떤 우연적인 기회가 생길 것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며 “그 어디에 기대를 걸거나 바라볼 것도 없다”고 단언했다. 당분간 북·미 관계 개선이나 제재 완화와 같은 외부요인에 기대를 절대 걸지 않고 북한판 전략적 인내를 구사하며 제 갈 길을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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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싱가포르 정부 제공

美 애매모호한 태도에 北도 애매모호로 대응 

현재 북한은 빗장을 걸어잠근 모습이다. 이 빗장을 풀 해법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가 다가올 5월21일 한·미 정상회담 앞에 떨어졌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백악관은 북한에 대해 코로나19 백신 제공 등 다양한 인도 지원을 구상 중이라고 한다. 북한의 빗장을 풀기 위해 문을 다 때려부수는 물리적 선택을 하지 않는 이상 보다 적극적인 구상과 검토도 병행해야 한다.

예컨대 북·미 싱가포르 선언을 출발선에 놓고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한 종전선언, 연락사무소 개설, 단계적 제재 완화(스냅백 조항 포함) 같은 구체적 움직임도 적극 고려해야 할 것이다.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로 해석될 수 있는 이런 제안에 상응해 북한에 핵 활동 동결과 포괄적 합의, 단계적 이행을 통한 비핵화 추진을 요구하며 한·미가 동시에 북한 문을 두드려야 할 것이다. 열 때까지 두드려야 하고 시끄러워서라도 문을 열고 나오도록 계속 두드려야 한다. 

미국의 과거 전략적 인내가 북핵 개발을 막는 데 답이 되지 않았던 것처럼 북한판 전략적 인내도 북·미 관계 정상화와 북한 발전을 위한 답이 결코 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북한에 계속 문을 열라고 촉구해야 한다. 평화는 전략적으로 인내한다고 오는 것도 아니고, 우연적인 기회로 오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보다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린다는 말을 믿고 행동해야 할 때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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