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는 지금 손드하임 추모 물결 속으로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2.11 15:00
  • 호수 1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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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거장 타계 이후 업적 재조명 열기 고조…뮤지컬 쉽게 만들려는 세태에 ‘경종’

미국 뮤지컬의 전설로 불리는 스티븐 손드하임이 11월26일 향년 9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올해 9월부터 순차적으로 문을 열기 시작한 브로드웨이 극장가의 뮤지컬 창작자와 배우들을 중심으로 우상을 기리는 추모 열기가 뜨겁게 진행됐다. 수백 명의 뮤지컬 배우가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여 그가 작사·작곡한 노래 《선데이》를 합창하는 모습이 외신에 크게 보도됐을 정도다.

‘뮤지컬 음악의 셰익스피어’ ‘작사와 작곡을 함께 하는 대표적인 뮤지컬 창작자’ ‘20세기 뮤지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신가’ 등 그를 수식하는 문구는 많지만,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지명도가 높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뮤지컬 종사자라면 대부분 그의 업적을 알고 있다.

2007년 9월18일 미국 뮤지컬계의 거장 스티븐 손드하임의 걸작 《스위니 토드》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한국의 열광적인 뮤지컬 팬들을 만나고 있다.ⓒ연합뉴스

뮤지컬 음악의 ‘셰익스피어’로 불려

국내에 소개된 작품들로 인해 그를 기억하는 관객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조승우, 옥주현, 전미도 등이 주연을 맡았던 《스위니 토드》가 대표적이다. 디즈니 영화로도 만들어진 《숲속으로》는 큰 스케일 때문에 정식 공연에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많은 대학 뮤지컬의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다. ‘리틀 나잇 뮤직’에 수록된 대표곡 《어릿광대를 보내주오》는 김연아 선수가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 쇼트프로그램 경기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서구 뮤지컬 창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쳐왔고, 뮤지컬의 역사를 다룬 모든 책에서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는 인물인 스티븐 손드하임은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본명은 스티븐 조슈아 손드하임(Stephen Joshua Sondheim)이다. 전성기인 1970~90년대 초 작사·작곡가로 참여한 작품마다 대부분 토니상을 수상해 총 8개의 트로피를 가지고 있다. 《조지와 함께 일요일 공원에서》로 퓰리처상을, 영화 《딕 트레이시》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5년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그에게 자유훈장을 수여했다.

손드하임은 열 살 때 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 손에 키워졌지만, 자식 교육보다 사교계에 관심이 더 많았던 어머니는 그를 곧바로 기숙사가 있는 군사학교로 보냈다. 그는 집안끼리 알고 지내던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를 양아버지처럼 여기고 따랐다. 해머스타인은 《사운드 오브 뮤직》 《왕과 나》 《남태평양》 등 1940~60년대 브로드웨이 뮤지컬 황금기를 이끈 대표 작사·작곡·연출가였다. 어머니가 이혼 후 새 출발을 위해 펜실베이니아에 마련한 집의 이웃이 바로 뮤지컬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십대 소년이었던 손드하임에게는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그는 15세 때 자신의 고등학교 생활을 내용으로 쓴 습작 뮤지컬을 해머스타인에게 보여주고, 그로부터 신랄하면서도 애정 있는 지적을 무려 4시간 동안 받았다. 훗날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을 비롯해 평생 공부해야 할 뮤지컬 작법을 그때 다 배웠다’고 회고했다.

1957년 초연된 고전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손드하임은 작사가로 먼저 데뷔했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그가 유능한 작곡가 이전에 뛰어난 작사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뉴욕타임스 크로스워드 섹션 단어 출제 아르바이트를 했을 정도로 노랫말에서 라임을 맞추는 천재적인 능력을 지녔다. 라임은 발음이 비슷하게 끝나면서도 유사한 뜻을 가진 단어를 모아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평소 유의어 사전을 모시고 살았다. 따라서 손드하임의 가사를 원어인 영어로 들으면 라임이 맞았을 때 쾌감과 위트, 창조성이 온전히 느껴지지만 번역된 언어로 들었을 때는 그것들이 반감되는 안타까운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가 뮤지컬 가사를 문학의 영역까지 올려놓았기에 아쉬운 지점이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5년 11월 백악관에서 스티븐 손드하임에게 자유훈장을 수여했다.ⓒ연합뉴스

뮤지컬 가사를 문학의 영역까지 끌어올려

작곡가로서 손드하임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이른바 익숙한 멜로디로 대중을 세뇌시키는 ‘후크’처럼 구간 반복이 일반적인 대중음악과 달리 단 한 군데도 반복이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배우가 부르는 것을 들었을 때 모티브가 반복된다는 것을 느낄 수는 있다. 실제로 악보를 살펴보면 미세하게 변주돼 있다. ‘인생의 매 순간이 다른데 어떻게 같은 멜로디를 반복할 수 있나’라는 그의 지론처럼 그의 음악은 비슷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배우가 감정과 연기를 담고 다르게 부를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됐다.

그의 작곡법은 익숙한 협화음과 불협화음을 병행하며 정박과 변박이 대칭돼 있다. 어떤 부분은 마치 영화음악처럼 극적인 긴장과 이완을 음악적으로 표현한다. 록이나 팝음악 같은 대중음악으로 뮤지컬을 쉽게 만들려는 세태에 대한 반대 의사다. 뮤지컬 음악 자체가 진지하고 예술적인 위상을 갖기 위해 창작자들이 좀 더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뮤지컬 관람의 중추인 중년 관객들의 현실적인 인생 이면과 ‘삶의 비극’을 뮤지컬에도 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특유의 시니컬한 시선을 가지고 현대사회의 인간관계를 냉소적으로 표현한 그의 이러한 시각은 후대의 많은 창작자에게 깊은 울림을 줬다.

손드하임은 뮤지컬이 고전에 얽매이지 않고 현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모더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는 언론 인터뷰와 특별강의, 멘토링 등을 통해 자신의 작사·작곡 노하우를 공개해 왔다. 뮤지컬 창작이 갈 수 있는 길에 대해 자신이 겪은 길을 안내하고 함께 가자고 독려한 스승이었다.

손드하임 음악의 진가를 느끼기 위해서는 무대에서 드라마와 함께 보는 것이 좋을 것이지만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쉽게 볼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현재 브로드웨이에서는 《어쌔신》과 《컴퍼니》가 리바이벌 공연 중이다. 그래도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은 넷플릭스에 얼마 전 공개된 뮤지컬 영화 《틱틱붐》에서 그의 캐릭터를 볼 수 있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새로 리메이크한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도 개봉 대기 중이라는 소식이다. 그의 작사가 데뷔작이자 레너드 번스타인과 협업해 쓴 《마리아》 《아메리카》 등 불멸의 히트곡이 들어있는 고전을 스필버그 감독이 어떻게 재해석했는지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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