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의거, ‘4월 혁명’ 불꽃 틔운 한국 민주화의 서막
  • 이상욱 영남본부 기자 (sisa524@sisajournal.com)
  • 승인 2022.02.13 14:00
  • 호수 1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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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3·15 의거 발원지 기념관~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를 가다

“청춘을 잃어버린 (친형) 인생의 마지막 한을 풀어달라.” 1월21일 오전 9시30분쯤 진실화해위원회의 3·15 의거 진상 규명을 위한 창원사무소 개소 당일 만난 이아무개씨(74)는 이렇게 말했다. “(여섯 살 위인 친형은)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로 3·15 의거에 참여해 심한 부상을 당했다”면서 “그 후유증으로 한평생을 병마(조현병)와 싸우느라 청춘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30여 분 뒤 창원사무소에서 만난 박홍기 무학초등교문·총탄담장복원추진위원회 위원장(70)은 진실규명신청서를 접수하기 전 “3·15 역사 현장인 무학초등학교 교문 총탄 현장을 독재정권이 다시 설 수 없도록 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 오동동에 있는 3·15의거 발원지기념관 ©시사저널 이상욱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 오동동에 있는 3·15 의거 발원지 기념관ⓒ시사저널 이상욱

1960년대를 저항하는 시위의 메카, 마산

경남 마산(현재 창원)은 1960년대를 저항하는 시위의 메카였다. 이후 민주화 시대까지 4·19 혁명과 부마민주항쟁, 6월 항쟁의 뿌리는 3·15 의거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  3·15 의거는 이곳 오동동 옛 민주당 마산시당사에서 시작됐다. 지금 그 자리에 들어선 3·15 의거 발원지 기념관 동판에 62년 전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발원지는 3·15 의거 당시 2층 목조건물이 있었던 민주당 마산시당사 건물 앞이다. 1960년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 당시 선거번호표를 받지 못한 유권자들은 “내 표를 찾아달라”고 호소하며 당사 앞으로 몰려왔고, 민주당 마산시당은 10시30분경 전국 최초로 선거 포기를 결정, 벽보를 당사 밖에 부착하고 이를 방송으로 알렸다. 당사 앞에는 흥분한 군중이 속속 모여들었고, 민주당원들이 관권 부정선거에 저항해 궐기할 것을 호소하자 군중들이 호응해 가두시위를 시작하면서 3·15 마산항쟁이 시작된 곳이다.”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에 있는 무학초등학교는 3·15 의거의 상징과도 같다. 학교 앞은 지난 1960년 3월15일 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반발한 마산 시민들이 시청으로 향하기 위해 집결한 장소다. 당시 시위대가 수천 명씩 무리를 지어 마산시청으로 향하자 경찰은 무학초 방향으로 시위대를 밀어붙인 후 실탄을 발사했다. 당시 사격으로 무학초 담장 오른쪽 벽에 13발, 왼쪽 벽에 6발 등 총 19발의 총탄이 박히는 말 그대로 전장(戰場)의 한 중심이었다.

이날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학생 시위대는 강제 해산시키려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끝에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시민들은 이에 분노해 파출소 몇 곳과 경찰관서, 경찰서장 자택을 습격하기도 했다. 한 달 뒤 4월11일 이 사건으로 행방불명됐던 마산상고생 김주열군의 시체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처참한 모습으로 바다에 떠올랐고, 이는 다시 한번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15만 명의 마산 인구 중 4만 명의 시민·학생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250여 명의 사상자(사망 12명)가 발생했다. 주모자로 구속된 26명은 공산당으로 몰려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서막은 이렇게 비극을 딛고 막이 올랐다. 

이후 3·15 의거 진상 규명 노력이 시작됐다.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은 3·15 의거 진상 규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정부는 2010년 3·15 의거를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마산의 혼을 위로할 순 없었다. 3·15 의거 참여자는 심사를 거쳐 4·19 혁명 유공자로 인정받고 있지만, 참여자 스스로 입증해야 하고 증거도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는 지난해 7월13일 ‘3·15 의거 참여자의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 공포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면서 비로소 수습 단계에 들어갔다.

허성무 경남 창원시장이 지난해 10월25일 김주열 열사 동상 제막식에서 동상 비문을 바라보고 있다. ©창원시
허성무 경남 창원시장이 2021년 10월25일 김주열 열사 동상 제막식에서 동상 비문을 바라보고 있다.ⓒ창원시

“기념관, 민주성지 창원의 위상 알리게 될 것”

이 과정에서 많은 증언과 기록이 모였다. 이것은 800여 쪽에 달하는 ‘3·15 의거사’로 묶여 지난 2004년 발간됐다. 많은 인권운동가와 정치학자, 역사학자가 3·15 의거를 재평가했다. 그 결론은 “3·15 의거는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의 도화선이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민에 의해 민주주의가 실현된 민주화운동의 모태”였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서 3·15 의거의 시작점인 오동동 옛 민주당 마산시당사와 김주열 열사가 떠오른 마산 바닷가는 완전히 변했다. 오동동 옛 민주당 마산시당사 자리에는 3·15 의거 발원지 기념관이 지난해 10월26일 문을 열었다. 허성무 창원시장은 “3·15 의거 발원지 기념관이 창원 시민들과 학생들에게 지역 민주화 운동사를 되새기고 체험하는 배움의 장이 되고, 민주성지 창원의 위상을 알리는 매개체가 될 것”이라고 했다. 창원시는 지난 2018년부터 건립을 추진해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기념관을 지었다. 이곳에는 3·15 의거 다큐멘터리를 상시 상영하는 영상실과 시청각 자료·유물이 전시된 전시실 등 많은 시설이 들어섰다. 

비단 3·15 의거 발원지 기념관이 아니더라도, 이미 창원에는 3·15 의거를 기억할 수 있는 다양한 시설이 있다. 정부와 창원시가 운영하는 것만 해도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를 비롯해 국립 3·15 민주묘지 등이 있다. 또 3·15 의거 현장을 시간대별로 밟을 수 있는 ‘3·15 의거 재현의 길’ 등 답사코스도 마련돼 있다. 3·15 의거 발원지 기념관에서 옛 마산시청(현재 마산합포구청)까지 3·15 의거 현장마다 기념탑이 있어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3·15 의거 발원지 기념관에서 10분 정도 마산합포구 해안가로 승용차를 몰아가면 ‘4월 혁명 발원지’인 김주열 열사 동상을 마주한다. 이곳은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인데, 2011년 9월22일 경상남도기념물 제277호로 지정됐다. 우리나라에서 민주화운동 장소가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이곳이 처음이다. 김주열 열사 동상은 기단부를 포함해 5m 높이로, 청동 재질로 제작됐다. 교복을 입고, 오른쪽 가슴에 두 손을 얹은 채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모습이다. 동상 뒤편엔 바다 형상을 표현한 길이 6m의 부조벽이 설치됐다. 부조벽에는 ‘민주주의의 불꽃을 피우다’ 등의 문구도 새겨져 있다. 기자와 이곳을 동행한 허 시장은 “김주열 열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창원시의 발전으로 보답하고, 김 열사가 펼치지 못한 꿈을 후배 청소년들이 펼쳐 나갈 수 있는 민주성지 창원을 만들겠다”고 했다. 

마산합포구 오동동 민주화거리에 진실화해위원회 창원사무소도 들어섰다. 진실화해위원회와 경남도·창원시가 공동으로 3·15 의거 진상을 규명하는 곳이다. 창원사무소는 3·15 의거 참여자들로부터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받아 조사한다. 진상조사를 원하는 사람은 오는 12월9일까지 창원사무소에 신청하면 된다. 특히 3·15 의거 관련 행위로 유죄 판결 등을 받은 사람이 재심을 청구해 명예 회복을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다. 3·15 의거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려는 창원시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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