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공화국’ 대한민국의 낯선 자화상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2.02.15 10:00
  • 호수 168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 등 3대 브랜드 국내 매출 2조4000억원
코로나發 경기침체 아랑곳없이 백화점 문전성시 이유는?

에르메스 버킨백(2000만원~1억원), 샤넬 클래식플랩백(1124만원), 디올 레이디디올백(760만원), 루이비통 카퓌신백(753만원), 보테가베네타 아르코백(578만원), 구찌 뱀부백(530만원), 프라다 사피아노백(394만원)…. 

요즘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주요 명품 핸드백들이다. 상당한 가격이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많다. 가방뿐만 아니라 지갑, 의류, 화장품, 향수, 시계 등 유명 명품 브랜드의 다른 제품들도 불티나게 팔린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경기 전반이 침체된 와중에도 명품은 비싸든 말든,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상관없이 초호황기를 누리고 있다. 

2021년 12월16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백화점을 찾은 시민들이 명품 매장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있는 모습ⓒ뉴시스

보복·과시 소비가 폭발시킨 명품 매출 

시사저널이 각 백화점과 명품 회사 실적 등을 분석한 결과 국내 명품 소비는 코로나19 사태 초반에 잠시 주춤했다가 2021년을 기점으로 나 홀로 폭풍질주 중이다. 억눌린 소비심리가 임계점을 넘어 터져 나오는 ‘보복소비’와 ‘플렉스’(자기만족이나 과시를 위한 소비)를 동력으로 삼았다. 정태성 행동경제학연구소 대표는 “기본적으로 명품은 높은 비용임에도 베블런 효과(특정 계층의 과시 욕구로 인해 소비재 가격이 오름에도 수요는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 영향으로 매출 규모를 유지해 왔다”면서 “코로나19를 계기로 새롭게 생겨나 광범위하게 퍼져 나간 보복소비 트렌드가 과시욕, SNS 문화 등과 결합하면서 명품 매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올해 코로나19 상황이 더욱 심각해진 것에 아랑곳없이 백화점은 신년 첫 정기 세일에서 두 자릿수 매출 신장률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매출 신장률은 신세계백화점 54.4%, 롯데백화점 53.6%, 현대백화점 53%였다. 업계 관계자들은 “명품이 다 했다”고 입을 모은다. 구체적으로는 소수의 VIP 위주였던 명품 소비층이 일반 고객으로 확대된 요인이 컸다. ‘명품 소비자는 대개 여성’이라는 스테레오 타입도 깨지는 모습이다. 30대 남성들이 명품의 신흥 고객층으로 떠오르자 ‘럭비남’(럭셔리 제품을 소비하는 30대 비혼 남성)이란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코로나19로 해외여행과 면세점 쇼핑을 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너도나도 백화점으로 유입되면서 명품 매출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며 “고객 동향과 영업환경 변화를 면밀히 주시하면서 대응 전략을 짜고 있다”고 밝혔다. 

정태성 대표는 “명품 소비자가 늘어나자 단순한 과시 욕구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된 소비를 지향하는 스놉 효과도 생겨났다. 누구나 다 사는 이른바 ‘국민 명품’은 명품 취급도 하지 않고 다른 진귀한 상품을 계속 찾아다니는 행태”라면서 “‘명품 중 명품’으로 취급되는 브랜드들과 유통업체들은 또 이런 스놉 효과를 철저히 활용해 고객을 끌어모은다”고 말했다. 

실제로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는 각종 명품 브랜드를 모아 서열화한 계급도가 공유되고 있다. 계급도에서 항상 최상단에 위치하는 에르메스의 경우 대표 상품인 버킨백, 켈리백 등을 구매하려면 먼저 다이어리·담요·그릇 등 다른 제품 4000만~1억원어치를 구매해야 한다. 이 실적이 없는 사람은 인기 핸드백을 구경조차 할 수 없다. 제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공급량을 조절하고, 그마저도 충성도 높은 고객에게만 판매하려는 스놉 효과 활용 전략으로 풀이된다. 

시시각각 오르는 가격 노린 명품 재테크도 

에르메스가 지난 1월4일 1년 만에 제품 판매가를 3~10% 인상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021년 한 해 동안 4차례나 가격을 올렸던 샤넬은 두 달 만인 올해 1월11일 또다시 일부 제품 가격을 기습적으로 인상했다. 지난해 초 864만원에 살 수 있던 미디엄 사이즈 클래식플랩백의 가격은 현재 1124만원이다. 샤넬은 일부 인기 핸드백 제품에 대해 1인당 1개씩만 살 수 있는 구매 제한 조치를 단행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핸드백 값을 대폭 올린 루이비통은 경쟁 브랜드들에 뒤질세라 추가 가격 인상 채비를 하고 있다. 높은 가격 인상폭과 물량 부족 탓에 백화점 명품 매장 앞은 ‘샤테크’(샤넬 재테크) 등 명품 재테크를 노리는 소비자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명품을 살 수 있는 백화점 점포에도 계급이 존재한다. 명품 브랜드와 물량을 많이 보유한 백화점일수록 고객 발길이 잦고, 이는 곧 매출로 연결된다. 연매출 1조원을 돌파한 백화점 점포 수는 2020년 5개에서 지난해 11개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신세계백화점 4개 점(서울 강남점, 부산 센텀시티점, 대구점, 서울 명동 본점)을 비롯해 롯데백화점(서울 잠실점, 서울 소공 본점, 부산 서면 본점)과 현대백화점(경기 판교점, 서울 무역센터점, 서울 압구정 본점) 각각 3개 점, 갤러리아백화점(서울 압구정 명품관) 1개 점 등이 ‘1조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11개 점포 중 7곳에는 한국 소비자들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끄는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가 모두 입점해 있다. 에루샤 보유 점포는 신세계백화점이 4곳으로 각각 1곳씩에 그친 경쟁사들을 압도했다. 

전국 매출 1위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지난해 리뉴얼을 하며 1층에 화장품 브랜드만 50여 개 모은 국내 최대 럭셔리 화장품 전문관을 구성했다. 명품 브랜드는 2층과 3층을 차지한다. 럭셔리 편집 매장인 분더샵도 운영하고 있다. 해당 점포는 명품 쇼핑의 메카로 통하며 국내에서 유일하게 연매출 2조원을 돌파했다.

신세계백화점의 명품 매출은 신세계 전체 실적을 좌지우지한다. 신세계는 2021년 영업이익이 5173억원으로 전년(885억원) 대비 484.6% 증가했다고 2월9일 공시했다. 2019년 영업이익(4678억원)을 뛰어넘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코로나19 여파 우려를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다. 백화점 사업부문 영업이익만 3622억원이었는데, 명품 매출이 44.9% 늘어난 게 결정적이었다.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은 2009년 부사장 취임 당시부터 줄곧 명품 경쟁력 강화에 매진해 왔다. 

ⓒ연합뉴스

韓 명품시장 규모, 세계 7위 

명품 회사들 역시 한국에서 떼돈을 벌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는 2020년 한국의 명품 매출이 125억420만 달러로 코로나19 사태 전인 2019년(125억1730만 달러)과 유사한 수준이었다고 밝혔다. 전 세계 명품 매출이 19% 급감한 것과 비교해 타격이 미미했다. 세계 1위인 미국의 경우 652억3400만 달러로 22.3% 뚝 떨어졌다. 

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의 한국 법인은 2020년 각각 4190억원, 1조467억원, 9296억원을 벌어들인 것으로 확인됐다. 합치면 2조4000억원에 달한다. 2018년 외부감사법 개정에 따라 자산 또는 매출 500억원 이상 유한회사에도 회계감사와 공시의무를 적용하면서 처음 3대 명품 실적이 나란히 공개됐다. 에르메스코리아와 루이비통코리아의 매출 신장률은 각각 15.8%, 33.4%였다. 영업이익은 각각 15.9%, 177.2% 늘었다. 샤넬코리아 매출이 12.6% 감소한 건 다른 브랜드와 달리 면세점 실적까지 반영됐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면세사업부 매출이 80% 넘게 줄어든 반면 백화점, 부티크 등 일반 매출은 30% 가까이 늘었다고 샤넬코리아 측은 전했다. 샤넬코리아의 전체 영업이익은 34.4% 증가했다. 

이 밖에 디올을 운영하는 크리스챤디올꾸뛰르코리아 매출은 1년 전보다 75.8% 급증한 3285억원으로 집계됐다. 영업이익도 137.1% 오르며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실적을 공개하지 않은 구찌코리아의 매출은 루이비통·샤넬과 비슷한 1조원 안팎일 것으로 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2021년 이후 백화점 명품 판매 동향에 비춰볼 때 주요 명품 브랜드 한국 법인의 실적은 더욱 높게 뛰어올랐을 가능성이 크다. 유로모니터는 에루샤를 필두로 한 한국 명품시장 규모가 지난해 기준 세계 7위 수준에 해당한다고 분석했다.   

아직 명품은 오프라인에서 사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판매가가 비싼 만큼 소비자들이 눈으로 일일이 흠집이 없는지 등을 체크하고 구매하는 경향이 짙다. 온라인 구매 시 자칫 가짜 상품을 구매할 위험도 있다. 그러나 온라인 명품 거래량도 갈수록 커지는 모습이다. 국내 온라인 명품시장 규모는 2015년 1조455억원에서 2019년 1조4370억원, 2020년 1조5957억원으로 늘어났다. 지난해엔 2조원을 가뿐히 넘겼을 것으로 보인다. 머스트잇, 트렌비 등 온라인 명품 쇼핑몰들은 정품 보장 서비스를 도입해 고객 우려를 줄이며 시장에서 자리 잡았다. 1위 업체인 머스트잇은 지난해 연간 거래액 3500억원을 달성하고 누적 거래액 1조원을 돌파했다. 

 

■ ‘에루샤’ 고향 프랑스도 놀라는 유별난 명품 사랑 

“한국에는 개츠비가 너무 많아.”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영화 《버닝》에 나오는 대사다. 가난하고 미래도 불투명한 청년 종수(유아인 분)에게 별다른 노력 없이 그저 화려한 삶을 즐기는 ‘금수저’들은 소설 《위대한 개츠비》 속 주인공 개츠비처럼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최근 미국 블룸버그통신은 한국의 명품 소비 광풍을 종수처럼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며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그런데 블룸버그가 조명한 대상은 명품 하면 떠오르는 금수저 내지 부유층이 아니었다. 집값 폭등 앞에 저축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 등 장삼이사가 한국 명품시장의 ‘이상(異常) 열풍’를 견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해 12월15일(현지시간) “한국에선 9500달러짜리 샤넬 핸드백을 사려는 사람들이 새벽부터 백화점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오픈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며 “한국 소비자들은 프랑스 (명품) 브랜드 제품을 손에 넣기 위해 필사적”이라고 보도했다. 통신은 “코로나19 사태가 가장 심각한 시기에도 생필품을 사재기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대신 한국인들은 오전 5시부터 대기해 샤넬 가방을 사는 새로운 습관을 길렀다”고 전했다. 

통신은 한국에서 샤넬의 인기가 높은 데 대해 희소가치가 높은 점, 리셀(Resell·새 제품을 사들인 뒤 수수료를 얹어 되파는 행위) 시장에서 활발하게 거래된다는 점 등을 꼽았다. 그러면서 한국인이 명품에 집착하는 이유 중 하나가 주택 가격 폭등일 수 있다는 시각을 내비쳤다. 2030세대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올라버린 집값 탓에 저축한 돈을 당장 즐길 수 있는 명품 소비에 쓴다는 것이다. 

한편 한국에서 3대 명품으로 꼽히는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는 모두 프랑스산이다. 한국을 찾은 프랑스인들은 정작 본고장인 자기 나라에선 에루샤의 인기를 찾아볼 수 없다고 전한다. 프랑스 출신 파비앙 코르비노는 지난해 5월 유튜브 채널 ‘별다리 유니버스’에서 “프랑스엔 명품 가방을 멘 사람이 없다. 프랑스인들은 (명품을 걸치는 것을) 좀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며 “(명품은) 해외 수출용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해 3월 실로에 앙자르디는 온라인 명품 쇼핑몰 트렌비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프랑스에선 명품을 거의 보지 못했다”면서 “루이비통 가방을 멘 사람이 간혹 있긴 하지만, 한국에 훨씬 많다”고 강조했다. 오헬리엉 루베르도 2016년 JTBC 《비정상회담》에 출연해 “프랑스에 살 때는 루이비통이 뭔지 몰랐다”며 “프랑스인들이 명품을 좋아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