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또 새로운 지평 열다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3.05 13:00
  • 호수 1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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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전초전’으로 불리는 美 배우조합상 3관왕…K콘텐츠 신드롬도 계속 이어가

《오징어 게임》이 또 새 역사를 썼다. 이번엔 미국 배우조합상(SAG Awards·Screen Actors Guild Awards) 수상이다. 이 상은 세계 최대 규모의 배우 노조인 미국 배우조합이 시상하며 제작자조합상(PGA), 감독조합상(DGA), 작가조합상(WGA)과 함께 미국 4대 조합상으로 불린다. 1995년 제정됐는데, 미국의 드라마·영화 배우들이 직접 투표해 수상자를 결정한다. 

아카데미 회원들도 대부분 배우이기 때문에 두 상의 투표권자들이 겹친다. 그래서 배우조합상을 아카데미영화제의 전초전이라고도 부른다. 또 영상산업계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배우들의 여론이 곧 업계의 분위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배우조합상 시상 결과가 미국 드라마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불리는 에미상의 방향성을 짐작하게 하기도 한다. 

꼭 아카데미상, 에미상과의 연관성이 아니더라도 현역 배우들의 투표로 결정되는 시상식이라는 점,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여기서 수상한다는 건 미국 업계에서 주류로 인정받았거나 최소한 상당히 주목받는다는 뜻이다. 한국 드라마는 그동안 미국 배우조합상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연기는 언어와 연관이 깊은 분야여서, 미국 배우조합상과 한국 드라마가 거리가 먼 건 사실 당연한 일이다. 

ⓒ연합뉴스
2월27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타모니카에서 열린 제28회 미국 배우조합상(SAG)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이정재(왼쪽)와 정호연이 남우 주연상,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을 밝 히고 있다.ⓒ연합뉴스

비영어권 드라마 최초 노미네이트·수상 

그런데 그러한 선입견을 깨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어로 제작된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미국 배우조합상에 대거 후보로 지명된 것이다. 작품상에 해당하는 드라마 부문 앙상블상을 비롯해 남녀 주연상과 스턴트 앙상블상, 이렇게 모두 4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그동안 비영어권 영화가 미국 배우조합상에서 후보에 오르거나 수상한 적은 있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미나리》 《기생충》 등이다. 《기생충》은 비영어권 영화 중에서 최초로 미국 배우조합상 영화 부문 앙상블상을 받았고, 《미나리》의 윤여정이 영화 부문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최근 2년간 영화 부문에서 한국인의 역사적 약진이 있었던 것인데, 올해는 그 분위기를 《오징어 게임》이 TV 부문에서 이어갔다. 비영어권 드라마가 미국 배우조합상에서 수상한 것은 《오징어 게임》이 최초다. 

작품이 대히트를 하긴 했지만 그 속의 배우 한 명 한 명이 서구권에서 존재감이 크지도 않았고, 한국어 연기라는 한계도 있었다. 그래서 만약 수상한다면 주연상보다는 작품상에 해당하는 앙상블상의 가능성이 더 커 보였는데, 미국 배우들의 선택은 놀랍게도 주연상이었다. 

이정재가 콕스(《석세션》), 빌리 크루덥(《더 모닝 쇼》), 키에라 컬킨(《석세션》), 제러미 스트롱(《석세션》) 등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이다. 그는 앞선 고섬어워즈와 골든글로브에서도 남우주연상 후보로 지명됐지만 수상하진 못했는데 마침내 미국 배우들의 투표로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여우주연상은 더 놀랍다. 정호연이 제니퍼 애니스톤(《더 모닝 쇼》), 엘리자베스 모스(《더 핸드메이즈 테일》), 세라 스누크(《석세션》), 리스 위더스푼(《더 모닝 쇼》) 등을 제치고 수상했는데, 이것 역시 놀라운 이유는 정호연의 극 중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국어와 작은 비중이라는 한계에도 미국 배우들이 이정재, 정호연에게 주연상을 선사한 것은, 《오징어 게임》과 최근 한국 작품들의 선전으로 인해 한국 배우들이 미국에서 그만큼 핫한 존재로 인식된다는 뜻이다. 또 미국에 몰아친 다양성 열풍이 얼마나 강력한지도 말해 준다. 타자에게 투표하고 싶은 미국 배우들의 열망이 극에 달했을 때, 마침 울고 싶을 때 뺨 때려준 것처럼 한국 콘텐츠가 나타난 것이다. 《오징어 게임》은 심지어 《팰컨 앤드 윈터 솔져》 같은 유수의 액션 드라마를 제치고 최고 액션상에 해당하는 드라마 부문 스턴트 앙상블상까지 받았다. 이것도 《오징어 게임》의 열기와 미국의 다양성 열풍을 동시에 말해 준다. 

어쨌든 역사적인 사건이고 한국 콘텐츠의 위상을 다시 한번 국제적으로 제고한 사건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도 “비영어권 드라마 배우로는 최초라는 것이 더욱 자랑스럽다”고 축하 인사를 전했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넷플릭스 제공

외신들 “역사 만들었다” 

시상식 직후 나타난 화제도 미국의 다양성 열풍과 그와 맞물린 한국 신드롬을 보여줬다. 이번 시상식에서 정호연은 루이비통이 파리 공방에서 210여 시간을 들여 특별 제작한 옷을 입었는데, 그 옷보다 댕기머리가 더 화제가 됐다. 한국의 전통을 표현한 것이었다. 미국 매체 보그는 “드레스도 눈부시지만, 그보다 더욱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건 정호연의 윤기 흐르는 머리를 장식한 헤어 디테일”이라면서 “수세기 동안 내려온 한국의 전통적인 댕기머리 리본에서 영감을 받은 스타일이다. 정호연은 한국적 유산에 의미 있는 경외감을 표하는 동시에 고전적인 할리우드의 매력을 제대로 조합해 선보였다”고 썼다. 한국의 전통이라는 말에 특별히 반응할 정도로 요즘 미국 문화계가 다양성에 민감하고, 그런 분위기에 부응해 한국 콘텐츠가 제대로 핫해지고 있다. 

이번 수상에 대해 할리우드 리포터는 “이정재와 정호연이 남녀 주연상 수상으로 역사적 이정표를 세웠다”고 평가했다. 이것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점을 미국 현지에서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연예 전문매체 베니티페어는 “SAG 역사상 중요한 첫 번째 승리이며 하반기 예정된 에미상의 더욱 강력한 후보작을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올 9월에 열릴 에미상에서 《오징어 게임》에 대한 또 다른 역사적 선택이 있을 수 있다는 기대까지 현지에서 나온 것이다. 

버라이어티는 “SAG 유권자들은 역사를 만들 기회를 맞았고, 《오징어 게임》으로 신기원을 열어야 한다는 유혹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로 아카데미 회원들은 《기생충》에 투표했고 배우조합은 《오징어 게임》 배우들에게 투표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건은 미국 문화계의 변화를 상징하고 미국 대중문화인들이 스스로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한국 콘텐츠의 부상을 통해 미국 대중문화인들이 자부심을 갖는 구조다. 이렇기 때문에 한국 콘텐츠에 대한 미국 업계의 호감이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 콘텐츠를 발견함으로써 그들이 더 위대해지는 것이니까. 

이정재와 정호연은 브래드 피트, 비욘세, 저스틴 비버 등이 소속된 미국 3대 에이전시 CAA와 계약했다. 향후 국제적 활약을 기대하게 한다. 뉴욕타임스는 이정재를 2021년 대중문화계 샛별로 꼽았다. 정호연은 루이비통 글로벌 앰버서더와 더불어 아시아인 최초로 보그 표지 단독 모델이 됐다. 《오징어 게임》은 여전히 넷플릭스 역대 1위 기록을 지켜가고 있다. 현지 매체가 에미상에 대한 기대까지 언급하고 있으니 이 신드롬이 올가을까지도 이어질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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