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에 반전 거듭하는 우크라-러시아 곡물 합의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7.31 12:00
  • 호수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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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폭격에도 곡물 수출길 여는 우크라이나의 속내

‘상상을 넘어선 반전의 연속’. 스릴러 문학작품이나 영화의 카피가 아니라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출을 둘러싼 국제 합의의 향방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사건만큼 우크라이나 전쟁의 세계성과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의 비합리성과 변덕, 그리고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의 절박함을 잘 표현한 것도 없을 듯하다. 

사건은 7월22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중재를 맡은 유엔·튀르키예(터키)와 함께 오데사와 인근 유즈네·초르노모르스크 등 우크라이나의 흑해 항구 세 곳을 통한 곡물과 비료 교역 재개에 합의하면서 시작됐다. AP통신에 따르면 이번 합의에는 러시아군은 곡물 수출항을 공격하지 않으며, 우크라이나는 곡물 수송선이 항구 주변에 설치된 기뢰를 피해 항해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BBC는 전쟁 발발 이후 흑해를 지나는 해상 운송이 막히면서 쌓여 있는 우크라이나산 밀과 옥수수 등 곡물이 2000만~2500만 톤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번 합의로 흑해 항로가 뚫리면 매달 500만 톤 정도의 곡물을 내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개전 이후 러시아 해군은 크림반도에서 오데사에 이르는 약 200km의 흑해 해상에 함대를 배치해 우크라이나를 오가는 선박을 통제해 왔다. 우크라이나는 이 해역에 기뢰를 설치해 러시아 군함의 접근을 막아왔는데 4자 합의로 곡물과 비료 교역로가 열린 것이다. 

합의 다음 날인 7월23일 반전이 일어났다. 러시아군이 흑해 군함에서 발사한 칼리브르 순항미사일로 오데사를 공격했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미사일 두 발이 오데사의 기반시설을 타격했으며 다른 두 발은 방공망에 의해 요격됐다고 발표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이 즉각 폭격을 규탄했다. 합의는 물 건너간 듯했다.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출을 둘러싸고 국제 합의가 연일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EPA 연합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출을 둘러싸고 국제 합의가 연일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EPA 연합

곡물 수출길 막힌 우크라의 절박함

하지만 놀라운 반전이 다시 벌어졌다. 올렉산드르 쿠브라코우 우크라이나 기반시설 담당 장관이 “항구를 통한 농산물 수출을 위한 기술적 준비를 계속하는 중”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러시아 대통령실인 크렘린궁은 “(이번 폭격은) 순전히 군사 인프라만 관련된 것으로 곡물 합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밝혔다. 

무차별 폭격과 포격을 퍼붓는 전쟁 와중에 곡물 수출을 위한 항구·항로 재개에 합의한 것도 그렇지만, 하루 만에 관련 항구를 폭격한 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곡물 수출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를 허용한다고 발표한 것은 더더욱 황당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첫째 요인은 우크라이나의 절박함이다. 2월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 곡물 생산의 7%를 차지하는 ‘유럽의 빵바구니’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막혔다. 국경을 맞댄 폴란드·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를 통한 육로 수송은 인프라가 여의치 않았다. 철도는 노후화했고 도로 인프라는 충분하지 않으며, 수송 차량과 인력도 부족하다. 루마니아와 국경을 이루는 도나우강을 이용하는 하천 수송로도 있지만, 인프라와 러시아 함대의 위협이 고민거리다. 

국기가 하늘의 푸른색과 곡식이 익어가는 들판의 노란색으로 이뤄졌을 정도로 우크라이나는 곡물 등 풍부한 농산물로 명성이 높다. 전쟁 초기 우크라이나의 농업용 트랙터가 러시아군 전차나 장갑차를 끌고 가는 사진과 밈(meme)이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1930년대 공업화를 시도하면서 우크라이나 곡물을 서방에 수출해 자금을 마련하려고 했을 정도다. 

둘째 이유는 합리적인 가격의 식량 도입이 절실한 개발도상국이다.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은 가격이 합리적이다. 전 세계 난민촌과 개발도상국에 식량을 공급해온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의 조달 곡물 중 우크라이나산이 거의 절반에 이르는 이유다. 이에 따라 흑해 수출길 봉쇄는 개발도상국에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산 곡물 의존도가 높은 아프리카·아시아·중동 개발도상국의 기아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흑해 연안 봉쇄로 인한 곡물 수출 차단은 우크라이나에는 주요 외화 수입의 중단을, 러시아에는 전 세계 개도국의 기아를 초래한다는 비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푸틴러시아대통령(왼쪽사진)과젤렌스키우크라이나대통령ⓒTASS 연합·EPA 연합
푸틴러시아대통령(왼쪽사진)과젤렌스키우크라이나대통령ⓒTASS 연합·EPA 연합

제3세계 비난 피하고 싶은 러시아

셋째는 흑해 국가인 튀르키예의 공명심이다. 튀르키예는 6월2일 곡물 수출 재개를 중재하겠다는 의향을 밝혔다. 튀르키예는 18세기부터 흑해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경쟁해 왔다. 러시아가 1853~56년 오스만튀르크,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왕국과 전쟁을 벌여 50만 명의 군대를 잃은 크림전쟁도 사실 흑해 지배권을 놓고 벌인 패권전쟁의 성격이 짙다. 그런 튀르키예는 흑해의 곡물 수출 중재를 맡음으로써 위상과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다. 국내에서 국수주의적인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의 국내외 명망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 7월13일 러시아·우크라이나·튀르키예·유엔이 4자 회담을 열고 조정센터 설립에 합의하면서 해결의 물꼬를 텄다.  

넷째는 러시아의 제3세계 외교정책이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부 장관이 7월27일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한 발언을 들어보면 러시아가 그리는 큰 그림을 짐작할 수 있다. 라브로프는 이 자리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로 세계 식량 가격이 상승했다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라브로프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무모하게 녹색정책을 추구하고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기간 동안 식량을 비축하는 바람에 가격이 올라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상황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이는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우크라이나 침공을 가리키는 러시아 용어)이 아닌 서방의 부적절한 반응 때문”이라는 독특한 논리를 폈다. 

사실 아프리카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인도주의적 지원에 나서거나 대러시아 경제제재에 동참한 나라가 하나도 없다. 옛 소련 시절부터 군사·경제 원조로 공을 들인 데다 최근 들어 미국이 관심을 줄이면서 힘의 공백 지대로 남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중동과 동남아시아·라틴아메리카·중앙아시아도 상황이 비슷하다. 

이 지역은 개발원조 의존도나 식량의 수입의존도가 비교적 높아 곡물 가격 상승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로선 우호국 또는 최소한 중립국 주민들이 자신이 일으킨 전쟁으로 기아에 시달린다는 비난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합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의 평판 관리, 그리고 경제제재 해제를 바라는 러시아의 의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공짜 점심은 없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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