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거듭하는 ‘대전 깡통전세 사기극’…숨겨진 배후 드러났다
  • 세종=공성윤 기자 (niceball@sisajournal.com)
  • 승인 2022.08.16 07:30
  • 호수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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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사기 회사 통장 내역·피의자 음성파일 단독입수…범죄단체조직죄 적용 가능성 거론돼

전국에서 수백억원대 피해를 낳은 ‘대전 깡통전세 사기’에 대한 경찰 수사망이 좁혀지는 가운데, 사기를 주도한 회사의 자금 수십억원이 개인에게 흘러들어간 사실이 드러났다. 또 피의자를 내세워 사기극을 주도한 주범이 따로 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에 따라 사기뿐만 아니라 횡령과 금융실명법 위반 등 혐의도 추가될 가능성이 짙어졌다. 더군다나 이번 사건이 장기간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시사저널은 사기에 이용된 오피스텔 매매를 주도한 H법인의 계좌 거래내역을 입수했다. 여기에는 법인이 설립된 2020년 4월부터 범행이 발각된 직후인 지난 6월말까지 약 2년간의 입출금 기록이 모두 담겨 있다. 해당 기간 동안 H법인 통장으로 들어온 금액은 총 867억여원이다. 돈을 보낸 사람 또는 회사는 300여 개에 달한다. 이 중에는 H법인 대표 고아무개씨와 남편 조아무개씨(H법인 이사)를 비롯해 오피스텔 매매를 도운 공인중개사, 또 피해자 다수가 포함돼 있었다.

ⓒ일러스트 신춘성
ⓒ일러스트 신춘성

회삿돈 867억 중 66억 외부인에게 이체돼

H법인은 전세 낀 깡통 오피스텔을 ‘월세 세입자가 산다’고 투자자들에게 속여 투자금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즉 H법인 통장에 쌓인 돈에는 운영자금 외에 사기 범죄수익도 포함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고씨와 조씨 부부는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그런데 H법인으로 들어온 돈이 유독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흘러간 내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아무개씨란 사람이다. 김씨에게 넘어간 돈은 총 66억여원. 한 번에 적게는 1만원에서 많게는 4억2500만원까지 약 380차례에 걸쳐 이체됐다. 특정경제범죄법상 횡령 소지가 제기되는 대목이다.

김씨는 누굴까. 그는 대전의 한 방송국 관계자다. H법인의 임직원은 아니다. 김씨는 범행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일절 부인했다. 그는 시사저널에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내 명의의) 통장은 도용당한 것”이라며 “그 통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예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번 사기에 이용된 일부 깡통전세 매물이 위치한 서울 마포구 오피스텔 밀집 단지ⓒ시사저널 박정훈

첫 번째 반전…불법 통장 소유주 따로 있어

김씨는 이혼한 전 부인을 통장의 실소유주로 지목했다. 그는 “전처에게 양육에 필요한 통장을 제공한 것”이라고 했다. 전처는 대전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하다 H법인에 몸담은 임아무개씨다. 임씨의 정체는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까지 드러난 적이 없다. H법인 내에서 ‘윤사라’라는 가명을 써왔기 때문이다. 임씨는 이 가공의 인물로 위장해 H법인 회계 업무를 총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본지는 임씨의 음성이 담긴 통화 녹음파일을 10여 개 입수했다. 여기에 따르면, 임씨는 “김씨 계좌는 내가 쓴 것”이라고 말했다. 통장의 실소유주가 자신임을 스스로 밝힌 셈이다.

임씨가 사용했다는 김씨의 통장 내역에 따르면, H법인으로부터 가져온 돈을 포함해 총 96억여원이 있었다. 이는 모두 쓰여 현재 잔고가 ‘0’이다. 지출 목적을 기록한 내용을 살펴보니 ‘직원 식비’ ‘법무사 비용’ ‘회사 관련 지출’ 등 H법인 관련 경비가 있었다. 또 입금 항목 중에는 ‘H법인 관련 차용금’ ‘오피스텔 보증금 반환’ 등 H법인이 받아야 할 돈이 포함돼 있었다. 법인통장과 개인통장을 구분 없이 쓴 것이다. 이와 관련해 임씨는 “김씨 통장은 또 하나의 H법인 통장”이라고 말했다.

또 임씨는 “김씨 통장에서 돈이 나갔어요. 왜냐면 H법인에서 나가면 안 되는 돈들이 있었어요. 가령 월세를 내주는 거라든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월세 수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속아 깡통전세 오피스텔을 산 피해자들과 연관이 있다. 피해자들은 “오피스텔을 매수한 뒤 실제로 월세가 몇 차례 들어와 진짜 월세 세입자가 산다고 믿었다”고 털어놓았다. 즉 김씨를 가짜 월세 세입자로 둔갑시킨 뒤, 김씨 명의로 피해자들에게 가짜 월세를 보내며 눈속임을 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부 피해자는 김씨를 가짜 월세 세입자 중 한 명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게다가 김씨 통장의 지출 항목 중에는 고씨나 조씨도 적혀 있었다. 지출 명목은 ‘쇼핑’ ‘생활’ ‘가족 용돈’ 등 개인적인 이유였다. ‘조씨 차량 구입’ 목적으로 수입차 전문 딜러사에 6700만원이 지급된 경우도 있었다. 김씨는 이들 부부와 임씨를 금융실명법 위반, 조세포탈 등 혐의로 고소한 상태다. 김씨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내 통장에 지인으로부터 빌린 돈과 대출금까지 들어와 있었다”며 “그 채무는 고스란히 내가 져야 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고씨와 조씨 부부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두 사람은 8월8일 충청권 모처에서 시사저널과 만나 “H법인 대표와 임원으로서 급여를 받았을 뿐 부당하게 취한 이득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임씨를 핵심 피의자로 몰았다. 고씨·조씨가 개인적 목적으로 썼다고 기록된 금액에 대해 이들은 “임씨가 ‘법인세 절감 때문에 지출 증빙이 필요하다’며 자기 마음대로 쓴 것”이라고 했다. 자신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임씨가 특혜를 제공했다는 취지다.

 

두 번째 반전…‘그놈 목소리’는 다른 사람

조씨는 “나중에 사기 사건이 터지고 나서 보니 임씨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우리에게 뒤집어씌운 것 같다”며 “처음부터 임씨가 우리 명의를 빌려 사기를 기획하고 실행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 통장의 지출 항목이 대부분 만원 단위에서 끊어지는 점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임씨가 통장 내역을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김씨와 고씨·조씨 부부 모두 임씨를 주범으로 지목했지만, 당초 피해자들 사이에선 고씨가 주범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범죄에 이용된 오피스텔의 등기부등본에 나오는 전 소유주가 고씨 또는 그가 대표인 H법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당 오피스텔을 사들인 사람도 자신을 ‘고씨’라고 밝혔다. 이는 본지가 입수해 8월1일 온라인판 기사(“전국 삼킨 수백억 ‘깡통전세’ 사기…피해자는 침묵, 피의자는 잠적”)에 올린 음성파일에 그대로 나와 있다. 이 파일에는 한 여성이 피해자 측 공인중개사와 통화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여기에서 해당 여성은 “제가 고○○인데요”라고 운을 뗀 뒤 ‘사택(社宅) 운영에 필요한 오피스텔을 구하고 있다’는 취지로 말한다.

그런데 이 여성은 사실 고씨가 아닌 임씨였다. 기자가 고씨를 만나보고 임씨의 음성을 들어본 다음 확인한 결과다. 결정적으로 임씨는 통화 도중 “세입자들한테 (내가) 고○○라고 얘기를 했다”고 실토한 바 있다. 임씨가 고씨를 사칭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피해자 일각에선 “오피스텔 매매를 할 때 고씨를 직접 봤다”며 임씨와 공범이란 주장이 나왔다. 이에 조씨는 “사기 매물인지 모르고 임씨가 시켜서 매매 현장에 나갔을 뿐”이라며 선을 그었다. 또 “고씨 앞으로 돼있던 물건도 임씨 지시로 등기 이전한 것”이라고 했다. 모두 임씨가 조종했다는 것이다.

임씨는 경찰 조사가 시작되자 자신의 가명인 윤사라 뒤에 숨으려 했다. 대전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6월20일 전담 수사팀을 꾸리고 피해자 조사를 시작했다. 이날 임씨는 전화상으로 “경찰은 윤사라를 찾을 것”이라며 “내가 경찰에 가는 건 상관이 없는데 내가 윤사라라는 소문은 절대 나면 안 돼”라고 말했다.

ⓒ고씨 측 제공

세 번째 반전…‘국세청 조사관’은 국세청에 없었다

임씨가 문자 피싱까지 저질렀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고씨는 작년 5월과 7월 누군가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발신인은 자신을 ‘대전지방국세청 이영섭 조사관’이라고 밝히며 “내일 국세청 법인세과로 출석 바랍니다” “자택 앞 38세금징수합동단속팀 대기 중” 등의 글을 적어 보냈다. 확인 결과 ‘이영섭 조사관’은 대전국세청은 물론 국세청 본청·지방청 어디에도 근무하지 않았다.

이 국세청 사칭 문자를 보낸 발신인의 전화번호는 또 다른 곳에서 등장한다. 바로 사기에 이용된 가짜 월세 계약서다. 이 계약서에 나온 가짜 임차인 연락처가 해당 전화번호와 동일했다. 게다가 이 번호는 이번 사건의 피해자로부터 오피스텔을 매수해 간 뒤 잔금을 주지 않은 사람의 연락처와도 같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씨는 “임씨가 쓴 여러 대포폰 번호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한편 임씨는 “경찰에서 밝혀지더라도 (혐의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할 거다” “감옥 가는 거 무섭지 않다” 등의 발언도 했다. 현재 임씨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본지가 임씨의 연락처로 알려진 5개 전화번호로 각각 수차례 전화를 걸어봤지만 꺼져 있거나 없는 번호로 나왔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 소송을 대리 중인 이한나 변호사는 “임씨를 필두로 범행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범죄단체조직죄 적용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범죄단체조직죄는 징역 4년 이상에 해당하는 범죄를 목적으로 한 집단을 조직했을 때 성립된다. 구체적으로 여러 구성원이 통솔 체계를 갖추고 지속적으로 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입증돼야 한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대표적인 예다. 그 외에 성착취물 제작·유포 혐의로 2020년 기소된 ‘n번방’ 사건에도 범죄단체조직죄가 적용됐다. 이 경우 조직원 전원에게 주범과 같은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

이번 사건을 수사 중인 대전경찰청 반부패수사대 김현정 대장은 “임씨는 아직 대면조사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소환 일정도 잡힌 게 없다고 한다. 김 대장은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피해자가 130여 명으로 늘었고, 피해액은 2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7월말에는 피해자가 70명, 피해액이 100억원이었는데 각각 2배 정도 증가한 것이다. 그 밖에 취재 과정에서 확인한 자료에 따르면, 고씨를 거쳐 매각된 부동산은 413채에 달했다. 매각 대금은 총 701억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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