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본능이 경계선 없이 뒤엉킨 해방구
  • 반이정 미술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9.20 11:05
  • 호수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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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식탁》, 와인 전문가 강연을 부대행사로 마련한 이유
예술품 감상과 음주, 나른한 대화가 혼재한 전시 오프닝 문화

미술 전시회 하면, 작품을 조용히 감상하는 정적이 흐르는 공간부터 연상될 것이다. 일반에 공개되는 전시 기간 내내 도서관처럼 고요한 시공간이 전시장 풍경의 평균치인 건 맞다. 그렇지만 전시 관계자들과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전시 오프닝의 분위기는 다르다. 이날 하루만은 음식과 술이 제공되고 대화와 웃음으로 채워진다.

근세 서유럽 상류층이 발전시킨 사교 문화는 응접실을 뜻하는 ‘살롱’이라 불린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개최된 프랑스 미술 전시회에 살롱이라는 똑같은 호칭이 쓰인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 당시의 미술 전시회도 전시장에 모여든 사람들과 함께 술과 대화를 나누는 연회의 성격을 띠었을 거란 얘기다.

《우아한 식탁》 오프닝 장면. 기획자와 작가, 전시 방문자들이 와인과 음식과 대화를 나누며 연회에 비중을 두는 전시 오프닝의 일반적인 모습이다.ⓒ반이정 제공

예술과 본능 사이

내가 전업 미술인에 속하지 않던 시절, 미술계의 첫 인상은 아는 사람의 초대로 찾아간 전시 오프닝 자리에서 각인됐다. 대개 전시와 관련된 이들이 모이지만, 일면식도 없는 외부인도 초대받아 인사를 나누고 격의 없는 환담과 유흥이 오가는 자리였다. 자연스럽게 모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 밀도도 높아지게 마련이다.

전시에 관한 대화나 단순한 유흥을 넘어, 예기치 않은 갖가지 기회나 인맥도 오프닝 자리에서 생긴다. 내가 누군가와 약속을 정할 때 어떤 전시회의 개막일을 고려하는 것도 전시 오프닝이 지닌 흡인력과 유대감 때문이다. 전시 기간을 통틀어 단 하루지만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미술계 고유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날이 전시 오프닝이다. 흡사 빙산의 실체가 수면 밑에 가라앉아 가시권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관객의 눈에 띄기 어려운 전시 오프닝은 미술 전시의 실체처럼 비중 있게 자리한다.

한산한 전시장에서 관객이 홀로 작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이 전시 관람의 표준화된 광경이라면, 불특정한 관객 여럿이 작품에 역동적으로 개입하는 과정을 작품으로 간주하는 미적 실험이 1990년대 중후반 시작됐고, 그런 경향은 주류 미술의 하나가 됐다. 이 같은 미적 태도를 관계 미학이라 하고, 그런 태도가 반영된 작업을 관계 미술이라 부르다. 대표적인 관계 미술가인 태국계 리크리트 티라바니자는 전시장을 임시 주방처럼 꾸며 방문객에게 태국 요리를 무료로 대접하는 걸 자신의 작품으로 내놓는다. 소장할 수 있는 물리적 결과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모여 교류하는 순간을 작품화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은 거의 모든 미술 전시회 오프닝 날 벌어진다는 점에선 어쩌면 익숙한 풍경이기도 하다.

《우아한 식탁》(8월25일~10월8일, G컨템포러리)은 식탁 위에 놓일 법한 대상을 차기율의 설치 작업, 유용상과 황순일의 회화 작업, 윤지용의 공예 작업으로 구성한 작가 다매체 전시다. 그렇지만 와인 전문가를 초빙한 강연을 부대행사로 마련했다. 전시장에 걸린 눈에 띄는 이미지가 포도(주)인 점에서 전시회의 살롱 문화를 도드라지게 한 기획처럼 보인다. 와인은 모든 전시회의 오프닝마다 내놓는 공식 주류로 자리 잡았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회화 작가 두 명은 세간에서 ‘잘 그린 그림’의 표준처럼 통하는 극사실주의 계열이다. 윤기 도는 화면에 압도적으로 재현된 포도알과 와인잔은 육감적인 욕망을 본능적으로 환기시킨다.

예술의 반대말이 본능인 건 아니어도, ‘예술, 문화, 이성’이 얼추 동질적으로 묶이고, ‘본능, 야만, 충동’도 하나로 묶이며, 두 묶음은 각각 고상한 정신의 영역과 저급한 육체의 영역으로 분류돼 대척점에 놓인 개념처럼 통용된다. 그 점에서 예술품의 감상과 음주와 나른한 대화가 혼재된 전시회 오프닝에선 예술과 본능이 경계선 없이 뒤엉킨 해방구 같은 느낌까지 받게 된다. 생물학자이자 과학철학자 프란츠 부케티츠는 “인간이 기초 생물학의 지평에선 본성에서 자유로울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인류가 형성한 문화 역시 인간 본성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고 해석했다. 그는 문명화된 현대인도 인류의 계통 발생사에 뿌리 박힌 충동을 예술과 문화로 생산한다고 봤고, 화장품이나 패션 산업을 성적 매력을 증폭시키는 도구로 풀이했다. 즉 현대 문명이 낳은 무수한 문화예술의 결과물이 본능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발달했다고 본 것이다.

부케티츠가 일례로 든 산업이 아니어도 식욕이나 성욕을 대리하는 문화예술품이나 소비상품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몇 해 전부터 내가 주변에 사심 없이 털어놓는 고백이 있다. 작품의 우열을 가리고 평가하는 일을 오래 해온 탓에 눈높이가 올라가선지 이전처럼 충만한 감동을 주는 작품을 만나는 일이 내겐 거의 없다고. 반면 식욕이나 이성애처럼 본능의 지평에선 젊을 때의 민감도에 비할 순 없어도 배신당하는 일은 없다고.

전시 제목에 쓰인 ‘식탁’이나 전시된 그림 속 무르익은 과실 또는 깨지기 쉬운 와인잔 같은 도상은 미술사에서 바니타스 정물화로 분류된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고 부를 과시하는 방편으로 귀중품과 풍성한 과일, 와인잔이 어우러진 화려한 정물화가 세간에서 유행했다. ‘헛됨’이나 ‘공허함’을 뜻하는 라틴어 ‘바니타스(Vanitas)’로 정의되는 이 시기 정물화는 권력과 재산, 젊음, 명성 같은 세속의 욕망과 육감의 본능이 세월 앞에선 무상하다는 메시지를 담는다. 바니타스 정물화의 인생무상 메시지가 유한한 삶을 자각해 현세적 욕망에 매여 살지 말고 하나님에 귀의하라는 게 통용되는 뜻풀이다. 신앙인이 아니라면 종교에의 귀의는 받아들이지 못해도, 삶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현재 삶을 자성하는 충고로 수용해도 될 게다.

유용상의 《The Chosen person(선택받은 사람)》ⓒ반이정 제공
황순일의 《Take One》ⓒ반이정 제공

유한한 삶 인식하고 현재를 반성

한데 호화롭고 육감적인 정물화의 표면으로부터 그와는 상충하는 인생무상과 겸허한 삶의 교훈을 환기하기보다, ‘현재를 즐기라’는 뜻의 또 다른 라틴어 경구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더 근접한 메시지 아닐까 하는 유혹이 내 안에서 경쟁적으로 밀려온다. 그래서 나는 실무적인 해석으로 이런 절충안에 도달했다. ‘전적으로 경건한 삶도 일방적으로 방탕한 삶도 한시적인 생에선 무의미하므로, 정도를 지키며 욕망에도 진솔하기.’ 정도와 욕망을 조율하는 게 진짜 난해한 과제이기에 생의 교훈으로 내려온 게 아니겠나.

세속의 욕망을 긍정하고 현세를 즐기라는 독려처럼 읽히는 아래 잠언의 출처가, 생의 허무를 일깨우고 지혜로운 처세술을 기록한 구약성서 전도서(코헬렛)에 적힌 구절이라 하니, 내가 당도한 해석이 허무맹랑한 오독은 아닐 것이다.

“잔치는 기뻐하려고 벌이는 것이다. 포도주는 인생을 즐겁게 하고, 돈은 만사를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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