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규제 혁신’ 구호에도 재계 ‘냉가슴’ 여전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2.10.03 14:05
  • 호수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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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거래법․중대재해법 등 개정안 두고 온도차 뚜렷…경영 현장에서 느끼는 부담도 가중

‘친(親)기업’을 내세운 윤석열 정부의 주요 경제정책 중 하나가 ‘규제 혁신’이다. 비현실적인 규제를 개혁해 기업 투자를 늘린다는 계획이었다. 지난 7월 출범한 규제 개혁 TF가 시작이었다. 8월26일 대구에서 열린 제1차 규제혁신전략회에서 윤석열 정부의 구상이 구체화됐다. 윤 대통령 주제로 열린 이날 회의에서 정부는 32건의 경제 형벌 규정 개선 과제를 발표했다. 경제 관련 법을 위반한 기업인에 대한 징역과 벌금형을 폐지하거나 과징금으로 낮추는 게 골자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8월26일 대구 달서구 아진엑스텍에서 열린 제1차 규제혁신전략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주호영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연합뉴스

尹 정부 규제 혁신은 재계 위한 종합선물세트?

이뿐만이 아니다. ‘재계 저승사자’로 불렸던 공정거래위원회 기업집단국 축소도 현재진행형이다. 기업집단국 내 지주회사과를 폐지하는 내용의 개정안이 최근 입법 예고된 상태다. 지주회사과는 ‘재벌 저격수’로 불렸던 김상조 전 공정위원장이 문재인 정부 때 신설한 조직이다. 주로 재벌의 일감 몰아주기나 편법증여 의혹을 조사해 왔다. ‘눈엣가시’와도 같았던 지주회사과 폐지를 현 정부가 추진하면서 재계는 한숨 돌리게 됐다. ‘친기업론자’로 꼽히는 한기정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최근 공정위원장에 임명된 것도 그 연장선상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재계를 옥죄는 규제가 적지 않다. 공정위가 현재 추진 중인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하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지난 8월 공정위가 입법 예고한 개정안은 대기업집단 총수(동일인)의 친족 범위와 공시 의무를 대폭 축소했다. 동일인의 범위를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에서 ‘4촌 이내 혈족, 3촌 이내 인척’으로 줄인 것이다. 대신 총수 회사의 주식을 1% 이상 보유한 혈족 5·6촌과 인척 4촌은 물론이고, 친생자가 있는 사실혼 배후자까지도 동일인에 포함시켰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자산 5조원 이상 대기업집단의 상호출자 금지와 신규 순환출자 금지, 일감 몰아주기 제한 등을 명시하고 있다. 재벌 총수 일가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과 편법 승계 등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부 기업은 여전히 형제간, 심지어 사돈 기업 간 일감 몰아주기 등을 통해 규제를 피해 왔다. 정부가 동일인 범위를 축소하면 재벌 기업의 숨통이 조금은 트이게 된다. 때문에 시민단체들은 개정안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정부가 사익 편취와 기업집단 규제를 피하려는 재계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 것 아니냐”는 비난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개정안에 불만이 있기는 재계도 마찬가지다. 개정안이 친생자가 있는 사실혼 배후자까지도 친족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당장 롯데와 SK, SM그룹 등이 규제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일부 그룹의 경우 지배구조를 통째로 뜯어고쳐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측은 “법원이 아닌 제3의 기관이 총수의 사실혼 성립 여부를 판단할 경우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최근 총수의 친족 범위를 좀 더 축소하는 내용의 건의안을 공정위에 제출한 상태다.

정부는 규제 개혁을 외치고 있지만, ‘낙수효과’를 기대했던 재계는 정책 효과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한국경제신문과 여론조사업체 입소스는 최근 국내 주요 기업 CEO 12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응답자 중 24.2%는 ‘혁신을 저해한 요인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정부의 규제 및 지원 부족’이라고 답했다. ‘혁신을 위한 인재 부재’(22.0%), ‘혁신을 위한 창의적인 기업 문화 및 도전 정신 부재’(15.4%), ‘혁신 제품·서비스에 대한 시장 수요 불확실’(12.1%) 등보다 정부 규제가 여전히 재계의 부담이 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부가 개혁을 외치면서도 현장 애로나 법리적 문제점의 개선에만 그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이전 정부가 밀어붙였던 여러 법과 제도의 틀을 혁파하기보다 그 틀 내에서 개선에 안주했다는 한계가 있다”면서 “미봉적인 개선보다는 근본적 제도 개혁을 시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월27일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대재해법)을 두고도 재계와 노동계의 온도차가 작지 않다. 근로자 사망 사고가 발생할 경우 경영자까지 처벌할 수 있게 한 것이 이 법의 특징이다. 하지만 건설이나 산업 현장에서는 여전히 사망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1월27일부터 6월말까지 상반기에만 320명의 근로자가 목숨을 잃었다. 3명의 사망자를 낸 경기도 양주의 삼표 채석장 붕괴 사고를 시작으로, 포스텍 캠퍼스 공사장 붕괴 사고, 여천NCC 폭발 사고, 쌍용씨앤이 동해공장 추락 사고, 현대제철 당진공장 사망 사고 등이 잇달아 발생했다.

하반기 상황도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최근 현대프리미엄아울렛 대전점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7명이 숨지고 1명이 크게 다쳤다. 정부가 현재 추진 중인 중대재해법 개정안에 대한 논란 역시 자연스럽게 부각됐다. 재계는 “법조항이 모호하고 기업의 피해가 큰 만큼 관련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노동계는 정부의 부실 수사 문제를 제기하면서 “처벌 강도와 대상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고용부는 왜 재계 손 들어줬나

규제 완화를 내세운 정부는 역시 재계의 손을 들어줬다. 고용노동부는 현재 중대재해법의 처벌 대상인 경영 책임자를 시행령에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기획재정부는 한발 더 나갔다. 기업의 최고안전책임자(CSO)를 최종 책임자로 볼 수 있게 한 시행령 개정을 고용노동부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영 책임자의 범위를 시행령에 별도로 명시하는 게 그동안 재계가 일관되게 요구해온 사안이었다. 재해가 발생할 경우 오너 일가의 책임을 덜기 위한 노림수로 보인다. 고용부는 그동안 재계의 요구를 무시해 왔다. “시행령에 경영 책임자를 명시하는 것은 법률에 위임 규정이 없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근 법제처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사실상 재계의 요구를 받아들인 셈이 됐다. 당장 야당과 시민단체의 반발이 잇따랐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법 개정이 쉽지 않자 시행령을 통해 법의 취지를 무력화하려는 것”이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개혁 깃발을 올린 윤석열 정부와 규제 개혁을 기대했던 재계의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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