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그대들이 있어서 꺾이지 않았다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2.19 08:05
  • 호수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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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6월4일, 그 특별한 날 부산에 있었다. 한일월드컵대회의 첫 한국 경기가 열린 경기장은 온통 열기로 가득했다. 폴란드와 맞붙은 이 경기에서 우리 대표팀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월드컵 첫 승을 따냈다. 황선홍과 유상철의 골을 바로 앞에서 목격한 그 순간의 기쁨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생 최고의 몇 장면 가운데 하나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날 부산뿐만 아니라 온 나라는 말 그대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박수를 치고, 경적을 울리고, 노래를 부르고, 환호성을 지르며 모두가 한마음으로 감격했다. 그때의 기억을 무용담 삼아 들려주면 먼 나라 얘기처럼 낯설게 들었던 MZ세대들도 이번 카타르월드컵에서 똑같은 감흥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열광의 현장들이 이어져 거대한 추억은 세대를 건너 또다시 완성된다.

12월3일 오전(한국시간) 2022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대한민국과 포르투갈 경기에서 포르투갈을 2대1로 이기며 16강 진출에 성공한 한국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연합뉴스<br>
12월3일 오전(한국시간) 2022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대한민국과 포르투갈 경기에서 포르투갈을 2대1로 이기며 16강 진출에 성공한 한국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연합뉴스

# 이번 카타르월드컵은 여러 ‘최초’ 기록을 축구 역사에 남겼다, 중동지역에서 겨울철에 열린 것도 처음이고, 아시아 국가가 단독으로 개최한 것도 처음이다. 경기 내용에서도 ‘최초’는 잇따랐다, 사상 처음으로 모든 대륙의 국가가 16강에 진출해 경합을 벌였으며, 모로코는 아프리카 국가로는 최초로 4강에 올랐다. 그동안 일부 대륙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월드컵이 모처럼 공처럼 둥글게 지구촌을 감쌌다. 16강 진출국이 확정된 직후 국제축구연맹(FIFA)의 인판티노 회장이 “더는 강팀도 약팀도 없다. 수준이 동등해졌다”고 말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언더독 국가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일이 더 이상 기적으로 불리지 않을 때 월드컵은 비로소 ‘월드’컵으로서의 위상을 다질 수 있다.

# FIFA 랭킹 2위이며 이번 대회 우승 후보로 꼽혔다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벨기에 대표팀에만 ‘황금 세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대표팀에도 존재감이 돋보이는, 말 그대로의 ‘황금(黃金)’ 세대가 있었다. 공격 라인에서 활약한 황씨 3명(황인범, 황희찬, 황의조)과 한 성씨로 구성돼 외국 방송팀마저 중계에 애를 먹게 했다는 수비 라인의 김씨 5명(김문환, 김민재, 김영권, 김진수, 김승규)이 그들이다. 이 젊고 투지 넘치는 선수들이 계속 대표팀을 지켜준다면 다음 월드컵도 기대해볼 만하다.

# 카타르월드컵의 한국팀 경기를 지배한 키워드는 단연 ‘중꺾마’다. 이 단어가 MZ세대 사이에서 자주 쓰이는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불굴의 투지 혹은 강인한 정신력을 의미하는 이 말은 경기 때마다 선수들이나 응원단을 통해 일종의 후렴구처럼 반복되며 퍼져 나갔다. 주장인 손흥민 선수도 귀국 인터뷰에서 “(우리) 선수들도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진짜 투혼을 발휘했다. 너무나도 멋진 이 말은 선수들한테도 분명히 경기장에서 큰 영향을 줬다”라고 말했고, 한국 응원단이 전해줘 태극전사들이 그라운드에 두르고 나온 태극기에도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문구가 크게 적혀 있었다. 우리 대표팀의 두 경기가 한 외국 매체에 의해 ‘카다르월드컵 명승부 톱10’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데도 이 ‘중꺾마’의 위력이 작용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한국의 카타르월드컵은 이제 끝났다. 하지만 축구를 매개로 뜨겁게 끓어오른 ‘함께하는 마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대들이 있어서 이 겨울이 따뜻했고 찬란했으며 무한히 뿌듯했다. 그대들 덕분에 우리는 꺾이지 않았고, 결과에 앞서 과정이 만들어내는 소중한 가치에도 한 번 더 눈을 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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