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친밀하고도 낯선 타인인 아빠에게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2.11 11:05
  • 호수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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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프터썬》이 던지는 기억에 대한 질문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때는 미처 몰랐거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납득 가능하거나 달리 보이는 것들. 낡은 사진첩 속 사진 한 장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만들 수도 있다. 마냥 신났던 것으로만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어느 날, 환하게 웃고 있는 나와 달리 곁에서 손을 잡고 선 내 부모의 표정은 왜 이렇게 슬펐던 걸까.

《애프터썬》은 유년 시절 주인공의 한 물결 조각으로부터 시작해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 보이는 영화다. 20년 전 아버지와 딸이 함께 보냈던 여름휴가. 거기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이 ‘과거의 명백한 진실’일 수는 없다. 기억은 주관적이며, 한때 유행했던 노래 가사처럼 다르게 적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영화는 관객이 목격하는 것 중 어디까지가 기억의 영역인지, 그 주체는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으로까지 확대된다. 《애프터썬》은 결코 유년 시절 아빠와의 한때를 추억하는 주인공의 부드러운 감상만은 아니다.

영화 《애프터썬》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주) 제공

기록과 기억 그리고 상상의 영역으로 재현한 유년 시절

영화는 빛바랜 캠코더 영상으로 문을 연다. 스마트폰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조악한 화질의 영상이 과거의 시간임을 짐작하게 한다. 열한 살 소피(프랭키 코리오)는 아빠 캘럼(폴 메스칼)과 함께 튀르키예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중이다. 유적지를 관광하고 호텔에서 수영하며 식사를 하는 정도가 전부지만, 부녀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가득해 보인다. 부모가 이혼한 상태라는 사연이 곧 드러나지만, 소피는 크게 개의치 않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오빠와 여동생으로 착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캘럼은 이제 갓 서른 살을 넘긴 사람이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고향인 스코틀랜드를 떠나 런던에 자리를 잡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제 사람들이 ‘어린애’로 부르는 것이 기분 나빠지기 시작한 소피에게 캘럼은 죽이 잘 맞는 친구 같은 아빠다. 그러나 순간순간, 소피는 아빠의 얼굴에 스치는 우울함의 그늘도 본다. 《애프터썬》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젊은 감독 샬롯 웰스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그는 어린 시절 아빠와 보냈던 여름휴가를 기억하며 쓴 각본이 평범한 소설 같은 구성에서 시작해 점점 더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형태로 바뀌어갔음을 고백한다.

평화로운 휴가지의 풍경을 보여주는 듯했던 영화가 조금씩 낯설게 보이는 것은, 부녀간의 따스한 정서적 온도와 부딪치는 장면들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이따금씩 영화는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있는 한 여성의 모습을 비춘다. 이야기 가운데 불쑥 침입하는 방식이다. 그가 성인이 된 소피라는 것을 짐작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걸린다. 조명이 만드는 섬광 탓에 잘 보이진 않지만, 정신없이 춤추는 사람들 사이엔 소피의 아버지도 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는 휴가를 함께 보냈던 그 시간으로부터 조금도 나이 들지 않은 모습이다. 그에게 다가가지도, 선뜻 손을 내밀지도 못하던 소피는 장면이 반복될수록 조금씩 다른 동작을 취한다. 후반부에는 잠에서 깬 현재의 소피가 캠코더 영상을 보는 모습도 나온다.

모두에게 직관적으로 쉽게 가닿는 방식의 영화는 아니다. 이건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이 장면들로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인가. 보는 순간에는 미처 다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애프터썬》의 모든 장면에는 일종의 라벨링, 즉 분류가 필요하다. 영화를 구성하는 것은 20년 전 소피와 캘럼이 함께 찍은 캠코더 영상(기록), 그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과정(기억), 어둠 속 소피와 캘럼(상상), 잠에서 깬 소피의 모습(현재)으로 나뉜다. 과거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선형적 흐름을 보여주거나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의 플래시백을 활용할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이 모두를 마치 띠처럼 이어서 펼쳐 보이는 선택을 한다.

캠코더 영상이 바꾸거나 편집될 수 없는 기록이라면, 아빠와 소피가 함께할 때를 담은 카메라의 시선은 소피 관점의 기억이다. 동시에 어떤 장면들은 소피의 상상이 채운 영역처럼 보이기도 한다. 혹은 소피도 볼 수 없던 것을 관객에게만 제시하는 영화적 상상처럼 보인다. 밤의 파도 속으로 뛰어들고, 서러운 울음을 토해 내는 등 소피가 보지 못했던 캘럼의 모습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열한 살의 소피는 아빠가 어떤 일들을 겪고 있는지 온전히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영화 《애프터썬》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주) 제공

그 모든 순간에는 사랑이

《애프터썬》은 여름휴가 이후 어떤 이유로 홀로 남겨져야 했던 딸이 남겨진 모든 기록과 기억 그리고 간절히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 발화한 상상까지 동원해 그때의 아빠를 이해하려는 과정이다. “아빠가 열한 살이라면 지금 뭐 할 것 같아?”라고 묻던 어린 시절의 소피에게 캘럼은 우스꽝스러운 춤을 보여주었지만, 이후 지금의 나이가 되기까지 더 많았을 궁금증 앞에서 아빠는 대답해줄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아빠를 둘러싼 수많은 질문을 껴안은 채로 그 시절 그의 나이가 된 딸은 평생 기억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없는 애잔한 패잔병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평생 열 수도 없고 열리지도 않을 단단한 과거의 문 앞에 선 어린아이의 모습인 채로 남아버린. 성인이 된 소피의 얼굴이 어딘가 텅 비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딸은 가장 친밀하고도 어두운 심해의 영역인 아버지에 대해 끝내 모든 것을 이해할 순 없다. 단호한 인상마저 남기는 마지막 장면이 영원히 바뀌지 않을 그 사실을 대변한다.

그러나 그때의 그와 비슷한 나이가 된 지금, 딸은 자신 앞에서 울며 무너지는 모습을 최선을 다해 감췄을 아빠에게 손을 내밀어 꽉 안을 수는 있다. 이는 자신의 시간을 회복하려는 딸의 몸부림이자, 과거에 할 수 없었던 진심의 위로다. 결국 《애프터썬》은 그 모든 고통에도, 모든 순간에 사랑이 있었다고 말하는 영화다. ‘우리 자신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줄 순 없을까 / 사랑에게 그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건 어떨까.’ 퀸과 데이빗 보위가 함께 부른 《언더 프레셔(Under Pressure)》의 가사가 강렬한 섬광의 이미지와 함께 흐르는 순간, 이 영화의 진정한 힘은 발휘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극장을 나선 이후 점점 더 짙어지는 감흥은 덮쳐오는 파도와 같다.

‘애프터썬(aftersun)’은 이미 탄 피부에 바르는 크림이다. 햇볕에 그을리는 걸 예방하려는 선블록과는 쓰임이 다르다. 일어나지 않은 것을 예방하는 게 아니라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 데 필요한 물건이라는 점에서 제목의 의미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인간이 평생토록 품을 수 있는 서로 다른 기억에는 저마다 마땅하게 알맞은 대응법이 필요할 것이다.

영화 《애프터썬》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주) 제공

기억해야 할 이름, 폴 메스칼

캘럼을 연기한 폴 메스칼은 1996년생 배우로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바쁜 라이징스타 중 한 명이다. 드라마 시리즈 《노멀 피플》로 데뷔한 그는 《애프터썬》에서의 섬세한 연기로 이미 영국 아카데미(BAFTA)와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 고담 어워즈 등 유수의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오는 3월 열리는 제95회 아카데미시상식 역시 남우주연상 후보로 그를 지목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글래디에이터 2》와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메릴리 위 롤 얼롱》 등 알려진 차기작만 총 여덟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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