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정책 ‘20년 헛바퀴’에 기업들이 머리 맞댔다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3.02.18 14:05
  • 호수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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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스타트업 모여 문제의식과 솔루션 공유
“턱밑까지 차오른 인구 위기 해법은 결국 ‘비즈니스’”

올해도 저출산 고령화, 지방 소멸 등 인구 관련 이슈가 뜨겁다. 인구구조 변화라는 ‘정해진 미래’가 국가 경제와 사회 전반에 심각한 변화를 초래할 거란 경고음이 울린 지 오래임에도 우리나라는 초저출산 기록을 계속 갈아치우고 있다. 20여 년 전부터 남발된 인구 정책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출산하면 돈을 주겠다’는 등 비슷비슷하고 일시적인 미봉책 속에서 악순환만 반복됐다. 올 2월 들어 활동을 본격화한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와 국회 인구위기특별위원회 등에 대한 세간의 기대감도 크지 않은 게 사실이다.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블루포인트파트너스가 2월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개최한 인구 혁신 포럼에 대기업과 스타트업 관계자 150여 명이 참석했다.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민간으로 옮겨가는 인구 위기 대응 

이런 가운데 민간, 특히 경제계를 중심으로 ‘더 이상 공공(公共) 영역에만 인구 위기 대응을 일임해선 안 된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생존과 솔루션 도출에 특화된 민간기업들이 나서야 반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구 위기는 당장 기업들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거대하고 심각해졌다. 2월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블루포인트 인구 혁신 포럼’엔 경제계의 위기의식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행사를 개최한 블루포인트파트너스는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해 투자하는 액셀러레이터 기업이다. 스타트업과 대기업, 유관기관 관계자 등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민간의 혁신가들이 인구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는 취지로 기획됐다. 인구학 권위자인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가 왜 인구 문제를 민간에서 풀어내야 하는지 설명하고, 이미 솔루션 개발에 착수한 스타트업들이 사례 발표에 나섰다. △어린이 공간 서비스로 저출산과 돌봄 공백 완화에 도전하는 아워스팟 △생산 기능직 채용 플랫폼을 운영해 지방의 구인·구직난 해소에 기여하고 있는 디플HR △공동 소유 세컨드 하우스 서비스를 선보여 인구 소멸 지역에 생기를 불어넣는 클리 △메이크 오버(변화) 콘텐츠와 커머스를 바탕으로 시니어들을 고령화 사회 주체로 변신시키려 하는 더뉴그레이 △건강 관리와 트렌드 적응의 사각지대에 놓인 5060세대를 기술로 돕고자 하는 데카르트 등이 저마다의 관점과 경험을 꺼내놨다. 이에 청년층부터 중장년층까지 골고루 섞여 앉은 참석자들은 열띤 반응을 나타냈다.

스타트업 업계 주도로 열린 행사지만, 참석자 150여 명 중 절반가량(71명)은 대기업 임직원이었다. 배재성 LG유플러스 성장플랫폼 투자팀 책임은 “LG유플러스가 가입자 기반 비즈니스를 하는 통신사이다 보니 인구 문제에 관한 문제 인식을 늘 가지고 있다”며 “어떻게 하면 (인구 문제로 인한 리스크를 넘어) 넥스트 레벨로 갈 수 있을지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포럼에 참석했다”고 전했다. 현대자동차에서 스타트업 투자 업무를 담당하는 이규호 책임매니저는 “이번 포럼에 참여한 스타트업들 중에서 관심을 갖고 봐온 곳이 있어 분석하고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달려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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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한 패스트푸드점을 찾은 노인과 그 근처에 앉은 아이 ⓒ연합뉴스

“‘문제’라는 시각 벗어나 시장 바라봐야” 

LG유플러스와 현대자동차 외에 삼성전자, SK, GS, 교보생명, IBK기업은행, 아모레퍼시픽, 교원, 구글코리아, 아마존코리아 등 다양한 국내외 기업 임직원들이 참석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무역협회,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 등 기업들을 회원사로 둔 단체 관계자들도 속속 모였다. 공공의 영역에서 거대 담론과 일방향적인 정책으로만 다뤄져온 인구 문제가 민간 영역의 최일선에 놓이는 순간이었다. 

이용관 블루포인트 대표는 기조연설을 통해 “현 상태가 지속된다면 초고령 사회를 한참 지나다 전체 인구의 감소로 이어진다.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르고 기업들은 존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가시화하고 있다”면서 “인구가 정책의 문제이지 시장 문제는 아니라는 기존 시각은 틀렸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정부보다는 기업, 그중 스타트업 영역에서부터 인구 위기란 난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나가야 한다”며 “스타트업은 고객 중심으로 고객 가치를 전달하는 일과 자원이 부족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탈출구를 마련하는 일에 익숙한 데다 실행력 또한 누구보다 강하다”고 말했다. 스타트업 업계에선 ‘시장의 크기는 문제의 크기’라는 말이 통용된다고 이 대표는 덧붙였다. 문제가 풀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수익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는 “우리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인 인구 위기를 놓고 아직 어떤 답이 있다고 말할 순 없으나, 시장 잠재력이 뛰어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인구 위기를 사업 기회로 보고 해결하자’는 제언은 조영태 교수의 강연으로 구체화됐다. 조 교수는 “과거부터 정부는 인구를 문제로만 인식해 왔다. 최근의 인구 정책 역시 저출산 고령화와 지방 소멸, 인구 절벽 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면서 “자원을 투자해 미래의 배당금, 즉 ‘인구 배당(Demographic Dividend)’을 받는 차원으로 시각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 교수에 따르면 한국은 1970년부터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 직전까지 1차 인구 배당을 받았다. 베이비붐 1세대(1955~64년 출생자)가 대거 산업 현장에 투입되며 부양비를 떨어뜨려준 때다. 부양비란 생산가능연령인구(15~64세)가 그 외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경제적 부담을 말한다. 부양비 감소를 발판으로 국가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다. IMF 사태 이후 닥친 경제위기를 빠르게 극복한 배경에도 부양비가 있다고 조 교수는 분석했다. 그는 “1990년대 대학 진학률 상승에 힘입어 교육 수준과 생산성이 개선됐다. 자연스레 부양비가 줄었고, 우리나라는 또다시 성장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경제 환경을 맞았다”고 설명했다. 이때가 2차 인구 배당기다. 

3차 인구 배당 여부, 기업에 달렸다

절체절명의 인구 절벽(생산가능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급속하게 줄어드는 현상) 위기에 놓인 현재지만, 희망이 영 없는 건 아니다. 조 교수는 “얼마나 잘 투자하고 매치하느냐에 따라 3차 인구 배당을 받게 될지 말지가 결정된다”며 “인구와 생산성이 급감하지 않도록, 오히려 상승시켜 경제성장을 이끌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정부뿐 아니라 기업들도 담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구 자연감소가 시작된 2020년 이후 인구구조 변화 속도는 갈수록 더 빨라지고 있다고 조 교수는 진단했다. 베이비붐 2세대(1965~74년 출생자), 밀레니얼 세대(1985~96년 출생자), Z세대(1997~2010년대 초반 출생자)와 1~2인 가구 등 다양해진 포커스에 맞는 맞춤형 전략도 절실하다. 조 교수는 “격변기를 지나고 있음에도 정책과 제도는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빨리 바뀌지 못한다. 결국 (정부에 앞서) 재빠르게 3차 인구 변화의 효과를 만들어내는 대응을 할 주체는 스타트업 등 기업”이라면서 “문제가 아닌 기회로서 인구를 바라보면 결혼, 출산, 돌봄, 교통, 이민, 재교육 등 너무나 많은 영역에서 사업 아이템이 떠오른다. 비즈니스를 통해 인구구조 변화란 정해진 미래를 각자가 원하는 미래로 바꾸는 기업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제언했다. 사례 발표를 마친 박찬호 클리 대표도 “지금이 변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비즈니스에 반영하는 동시에 심각한 인구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이라 판단한다”며 “사실 창업할 땐 어떤 사명감으로 출발하지 않았는데, 사업을 추진하면 할수록 ‘우리가 거대한 사회 문제 해결의 단초를 제시하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생겨난다”고 했다. 

 

■ 직장어린이집·육아휴직…저출산 대응 늘려가는 대기업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경고음에 대기업과 금융권을 중심으로 인구 위기에 대응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출산 장려 지원을 아끼지 않는 모습이다. 

하나금융그룹은 전국 주요 근무지역을 중심으로 대형 직장어린이집 15개를 건립해 직접 운영하고 있다. 아울러 2018년부터 농어촌 보육 취약지역의 소규모 어린이집, 장애아동을 위한 어린이집, 지역 커뮤니티센터와 함께 마련된 어린이집, 중소기업 근로자 자녀가 함께 이용 가능한 상생형 공동직장어린이집 등을 꾸준히 건립해 왔다. 2월 현재 국공립 및 직장어린이집 70곳이 완공됐고, 2024년까지 30곳을 추가로 세울 예정이다. 

하나금융은 남녀 직원 구분 없이 육아휴직 2년 사용, 초등학교 입학 자녀 돌봄 단축 근무 등 돌봄 지원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이에 더해 고령화 대응의 일환으로 하나케어센터를 운영해 왔다. 고령과 노인성 질환 등 때문에 혼자 일상생활을 이어가기 어려운 노인들에게 편안한 요양 환경을 제공하고 가족의 부담을 경감해 주기 위해 2009년 금융권 최초로 설립한 노인 전문 요양시설이다. 

삼성전자는 직원들의 출산과 육아 부담을 낮추기 위해 육아·난임·자녀 돌봄 휴직,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 등을 운영하고 있다. 법정 기준보다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는 한편 관련 제도를 지속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SK이노베이션도 육아휴직 자동 전환,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 등을 운영해 왔다. 휴직으로 인한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해 6개월 이상 휴직한 직원은 근로 평가에서 제외하는 제도도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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