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너, 우리를 닮은 세월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3.14 12:05
  • 호수 174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리메이크작
영화 《소울메이트》가 가진 의미

시간이 가르쳐주는 것들이 있다. 가령 옳고 그름의 가치는 모든 경우에 정확하게 판단될 수 없다. 확실한 하나의 개념어로 수렴 가능한 감정과 상황보다, 그럴 수 없는 경우를 인생에서 훨씬 자주 맞닥뜨린다. 관계 안의 감정들은 정확한 카테고리 안으로 말끔하게 포획되기보다, 또렷하게 설명될 수 없는 잔여물들이 지층처럼 남는 모습에 가깝다. 《소울메이트》가 두 여성을 중심으로 바라보려는 그들의 세월도 마찬가지다. 초등학생 시절에 만나 금세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 아이들은 10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서로에게 터놓고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만든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렇게 미세하게 쌓였던 균열들은 관계의 틈을 벌리고야 만다. 결국 내게 가장 가까웠던 너는 내게서 가장 멀어지려는 사람이 된다.

이 영화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2017)의 리메이크다. 대만 금마장에서 주연배우 주동우, 마사순에게 공동 여우주연상을 안긴 작품으로 유명하다. 한국 배경에 맞게 변형된 부분들도 있지만 핵심은 그대로다. 10대부터 30대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감정과 인생의 중요한 대목들을 공유하는 두 여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다. 장르적 성격이 두드러진 작품들이 우세하던 극장가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섬세한 결의 작품이다.

ⓒ(주)NEW 제공

오래도록 바라보고 시간을 쌓는

1998년 여름, 제주에 사는 하은(류지안)에게 친구 미소(김수형)가 생긴다. 집안 환경부터 성격까지 모든 면에서 정반대인 어린 소녀들. 그들이 맞잡는 손은 앞으로 두 사람이 함께 보낼 긴 시간의 시작점이 될 참이다. 시간이 흘러 미소(김다미)와 하은(전소니)은 고등학생이 된다. “10년만 폭풍처럼 살다가 딱 스물일곱에 죽고 싶다”는 미소와, 그 말을 듣자마자 “너 나보다 먼저 죽으면 내가 죽여버릴 거야”라며 눈물부터 글썽이는 하은은 여전히 서로의 가장 가까운 곁을 내어주는 ‘소울메이트’다. 뜻하지 않았던 관계의 변화는 서서히 일어난다. 하은의 남자친구 진우(변우석)까지 충만하게 채워지던 세 사람의 일상에, 어느덧 말하지 못할 비밀의 순간들이 늘어난다. 때마침 자유롭게 떠돌고 싶다는 꿈을 가졌던 미소는 하은의 곁을 떠난다. 그리고 미소와 하은의 긴 엇갈림이 시작된다.

《소울메이트》를 연출한 민용근 감독은 이 영화를 ‘원작의 궤도를 따라가다가 한 번씩 이탈하고 다시 궤도로 돌아왔다가 이탈하는’ 작품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원작과 비교해 모든 것이 예외적이진 않다. 다만 큰 차이도 있다. 원작에서는 칠월(마사순)이 남긴 글을 안생(주동우)이 이어 쓴다는 설정이 중요하다면, 《소울메이트》에서는 그림이 중심에 놓인다. 성향이 180도 다른 듯 보이는 미소와 하은은 그림에 접근하는 방식도 다르다. 미소는 추상화, 하은은 사진처럼 보이는 극사실주의 소묘를 그린다. 영화의 첫 장면은 어느 갤러리, 커다란 그림 앞에 서있는 미소의 모습이다. 그림 속 자기 자신의 얼굴을 무표정으로 들여다보는 미소. 영화는 그렇게 미소와 그림 사이에 숨겨진 사연들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자처한다.

언뜻 그림은 원작과 가장 큰 차이를 만드는 기능적 장치로만 보일 여지가 있다. ‘마음도 그리는’ 미소와 사진 같은 그림을 그리는 하은의 기질이 그만큼 다르다는 것이 시각적으로 명료하게 제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기만 한 모티프는 아니다. 그림은 대상을 오래도록 관찰하고 시간을 쌓아야 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마음과 시간 그리고 얼굴. 이것이야말로 《소울메이트》 속 인물들의 관계를 엮고 통과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미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하은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에 도달하기 위한 레이스라는 점에서 애초에 둘의 지향점은 다르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은에게 그림은 때론 서로를 할퀴었던 두 사람의 세월을 치유하는 작업이며, 미소에게 그림은 하은의 인생을 마저 잇는 과정이 된다. 서로 다른 모양의 삶을 살며 엇갈렸던 둘은 하나의 그림 앞에서 온전히 하나로 합쳐진다. 이들에게 그림은, 시간과 얼굴의 복원을 뜻한다.

영화 《소울메이트》의 한 장면 ⓒ(주)NEW 제공
영화 《소울메이트》의 한 장면 ⓒ(주)NEW 제공
영화 《소울메이트》의 한 장면 ⓒ(주)NEW 제공
영화 《소울메이트》의 한 장면 ⓒ(주)NEW 제공

우정과 사랑, 그 이상의 이야기

영화 속에서 성실하게 추적되는 미소와 하은의 관계는 계속 오르락내리락하는 포물선을 그린다. 두 사람은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가 서로를 하나도 알지 못하는 낯선 존재들처럼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물론 그들이 제일 모르고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다. 이들은 애초에 아예 다른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일생을 시기에 따라 나눠놓은 두 모습 같기도 하다. 그들은 어쩌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내 동경하고 있었을 서로의 모습으로 점차 닮아간다. 그건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삶을 향해 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태명은 미소였지만 태어난 이후 하은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딸이 등장한다는 것 역시 ‘하나의 삶’이라는 짐작을 뒷받침한다. 후에 30대 미소가 돌보는 딸 ‘안하은’은 생물학적 부모와 상관없이 두 사람의 아이로 인식된다.

영화는 두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 이별하고 다시 만나는 과정을 여러 번의 대구로 보여준다. 한 번은 하은이 떠나는 미소를 바라본다면, 또 다른 시기에는 역으로 미소가 떠나는 하은을 바라보는 식이다. 반복과 변주 안에서 인물들의 위치가 뒤바뀔 때마다, 영화는 모든 인연과 운명을 통과해야만 어느 순간 문득 깨달을 수 있는 삶의 의미들을 가만히 속삭인다. 두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함께 키운 고양이 ‘엄마’도 영화가 이야기하는 세월과 인연을 핵심적으로 담아낸다. 우정인가, 사랑인가. 아니면 그 모두를 포괄하며 넘어서는 무엇인가. 《소울메이트》는 미소와 하은 사이의 감정을 굳이 규정하거나 유형화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에게 내밀하게 투사되는 마음이 사랑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말하긴 어렵다. 세상의 기준으로 분류할 수 없는 존재로 서로를 선택하는 것. 이는 훨씬 광의적인 의미의 사랑이다.

그런 이유로 《소울메이트》는 애초부터 멜로 드라마의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원작 영화에서도 중국이라는 배경, 지역과 시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보편적인 감정과 멜로에의 호소가 두드러진다. 강한 멜로성은 여전한 강점으로 남겨두되, 원작의 삼각관계 설정을 다듬어 미소와 하은의 관계에 확실하게 집중한 각색은 더 나은 방향으로 느껴진다. 이 영화를 단순히 ‘여성 서사’라는 특정한 틀 안에 가두는 것 역시 합당한 접근은 아닌 듯하다. 젠더를 떠나 《소울메이트》는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는 오랜 관계 안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고 싶었는지를 진정으로 깨닫게 되는 이들의 이야기에 가깝다.

영화 《소울메이트》의 한 장면 ⓒ(주)NEW 제공
영화 《소울메이트》의 한 장면 ⓒ(주)NEW 제공

원작이 안생을 연기한 배우 주동우의 에너지에 시선이 쏠리는 작품이라면, 이번 영화는 미소와 하은의 깊이와 존재감이 고르게 느껴진다. 크게 보면 미소에서 시작해 하은으로 끝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두 인물 간 균형을 기계적으로 맞췄다기보다, 하은의 성장을 좀 더 중요하게 여긴 각색으로 느껴진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영화 데뷔작 《마녀》(2018) 이후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2020, JTBC)와 《그해 우리는》(2021, SBS) 등을 통해 신인답지 않은 연기력을 보여주었던 김다미, 영화 《죄 많은 소녀》(2018)와 《악질경찰》(2019),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청춘월담》(tvN)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성장한 전소니가 안정적으로 극을 이끈다. 두 배우를 몰랐던 이들에게는 발견이, 이미 응원했던 이들에게는 기쁜 재확인이 될 만한 연기다.

여성들의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관계, 유년 시절부터 시작해 오랜 기간 구축되는 삶의 모양들을 섬세하게 바라보는 귀한 시도라는 점에서 가지는 의미도 적지 않은 영화다. 한국 영화에서 좀처럼 주목되지 않았고, 흔하게 허락되지 않았던 영역임에 분명하다. 《소울메이트》에 화답할 관객들의 반응이 사뭇 궁금해지는 이유다.

《소울메이트》 팝업 스토어의 모습 ⓒ《소울메이트》 노션 홈페이지

마케팅에 감성 한 스푼, 《소울메이트》 팝업 스토어 & 노션 홈페이지

공간은 작품의 정서를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든다. 《소울메이트》가 개봉 전 마케팅의 일환으로 팝업 스토어를 운영하게 된 배경이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지냈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과 감성을 남다르게 자극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영화관 밖까지 여운을 이어갈 수 있는 좋은 방식이다. 팝업 스토어의 1층은 사진과 영화 속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극사실주의 그림 스틸로 채워진 갤러리 형태다. mp3, 폴더형 휴대폰, 극 중에서 하은과 미소가 그리는 그림 등의 소품도 전시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소와 하은의 아지트가 재연된 포토존도 있다.

2층은 조금 더 감성적인 공간이다. 방문객이 낙서를 남길 수 있는 벽면, 영화 속 대사 중 하나가 적힌 엽서를 꼽아 글을 남길 수 있는 책상이 있다. 엽서를 남기고 가면, SNS 이벤트를 통해 또 다른 방문객과의 펜팔로 이어지는 의외의 재미도 발생한다. 테라스에는 야외 포토존이 마련돼 있다. 극 중에서 미소가 타는 스쿠터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팝업 스토어는 3월22일까지 성수동 ‘les601’에서 운영된다. 인터넷 사전 예매 후에 방문 가능하다.

노션 홈페이지 오픈도 눈길을 끈다. 개봉에 맞춰 홈페이지를 여는 마케팅 트렌드는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사라진 지 오래지만, 오랜만에 등장한 《소울메이트》 홈페이지는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는 영화 분위기에 맞춤이다. 관객들이 직접 배우들에게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방명록, 영화 스틸과 이벤트 굿즈 등을 다운받을 수 있는 ‘온라인 문방구’ 등 아기자기한 구성도 눈길을 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