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 “오랜 무명 생활 버티게 해준 건 가족”
  • 하은정 우먼센스 대중문화 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4.01 14:05
  • 호수 174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더 글로리》로 화제의 주인공 된 배우 정성일

신드롬급 인기를 끌었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는 유년 시절 폭력으로 영혼까지 부서진 한 여자가 온 생을 걸고 치밀하게 준비한 처절한 복수와 그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지난해 12월30일 파트1 공개 이후 3개월 만에 파트2가 공개돼 완벽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배우들의 열연과 흡입력 있는 전개로 수많은 유행어를 탄생시켰으며 국내외에 엄청난 파급력을 보이며 최고 흥행 화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부진했던 김은숙 작가도 송혜교도 이 작품 덕에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단연 화제의 주인공은 정성일이다. 극 중 그는 부와 권력을 모두 가진 남부러울 것 없는 가장에서 기어이 아내 박연진(임지연 역)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 추악한 과거를 확인하고 한없이 추락하는 하도영 역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나이스한 개XX’ ‘으른 섹시’ ‘재벌 사약남’ ‘잘생긴 척하는 유재석’ 등등 한 작품으로 이토록 많은 별명 부자가 된 배우가 또 있을까. 김은숙 작가는 정성일에게 “‘한국의 양조위’가 되세요”라는 덕담까지 했다는 후문이다.

복수극을 순식간에 바둑 멜로물로 바꾸는 그의 ‘멜로 눈빛’은 치명적이다. 분명 스킨십 하나 없는 장면임에도 끈적한 ‘으른 섹시미’가 철철 넘친다. 작가의 말대로 목소리가 너무 좋으니 그 어떤 말도 명대사처럼 들린다.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서는 이미 유명 인사로, 어디선가 분명 본 듯한 얼굴이다. 2002년 영화 《H》로 데뷔해 영화 《쌍화점》 《사랑의 확신》 《배우는 배우다》와 드라마 《돌아온 일지매》 《비밀의 숲2》 《산후조리원》 《우리들의 블루스》 등을 거치며 우리 곁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부유하게 자랐을 것 같은 매끈한 이미지와는 반대로 빗물로 배를 채우던 어려운 어린 시절을 거쳐 대세 배우로 등극한 사실이 알려져 더욱 화제가 되고 있다. 최근 박찬욱 감독이 제작하는 영화 《전, 란》의 출연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정성일을 만났다. 《더 글로리》는 그에게 어떤 작품이고, 어떤 의미일까.

ⓒ넷플릭스 제공

인기를 실감하나.

“아들이 동네에 있는 유치원에 다니는데, 거기 수영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사인 좀 받아오라고 하셨다더라. 뿌듯했다. 아들이 선생님 성함을 몰라 사인을 못 해드렸다. 사실 저는 배우지만 가족들이 노출되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SNS도 자제한다. 최대한 저의 영향을 받지 않는 환경에서 키우고 싶다.”

‘나이스한 개XX’라는 수식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극 중 (최)혜정의 대사에서 나오는 부분이다. 혜정이 하도영을 한마디로 표현하면서 “나이스한 개XX잖아’라고 한다. 그 의미는 양면성인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나이스하고 어떻게 보면 양아치라는 의미인데, 내가 본 하도영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대하진 않는다. 다만 자라오면서 몸에 밴 취향과 행동들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이스하거나 개XX라고 생각할 수도 있게 하는 것 같다. 극의 마지막에 살인을 저지르는 건 진짜 양아치였다.”

캐릭터를 구축하기가 어렵지 않았나.

“처음엔 어려웠다. 어느 정도 재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에다 교육도 잘 받았을 인물인데 나이스한 개XX를 표현해 내야 했다. 외국 작품에서 봐왔던 귀족들의 일상을 많이 참고했다. 매너나 습관 등 몸에 밴 그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극 중 혜정에게 에르메스 가방을 선물하는데, 혜정의 친구들에게 혜정이 좋아하는 것을 물어본 후에 사주는 식이다. 그런 식의 배려와 매너, 디테일이 있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하도영이 박연진과 왜 결혼했는지 이해가 안 되기도 한다. 그리고 불륜남의 자식을 끝까지 지키는 것도 그렇다. 연기를 하면서 이해가 됐나.

“연진이를 선택한 건 극 중 대사에도 나왔지만 연진이는 명품 브랜드 ‘디올’이 잘 어울리는 여자다. 그리고 적게(짧게) 입었다고 해서 천박해 보이지 않는다. 어느 정도 하도영의 재력에도 어울렸고, 그리고 하도영이 살아온 루틴에서 살짝 벗어나 자극을 줄 수 있는 여자, 심심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 밸런스 때문에 연진과 결혼을 선택했다. 그리고 불륜남의 자식을 끝까지 지키는 부분은, 제가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여서 그런지 몰라도 낳은 정보다 키우는 정이 더 크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설득됐다.”

극 안에서는 화보 속 모델처럼 빈틈없이 자신을 꾸미는 캐릭터다. 실제로는 어떤가.

“경상도 남자라 그런 걸 전혀 못한다. 올인원 로션 하나 바르고 자는 스타일이다. 한데 화면을 보니 관리를 하긴 해야겠더라. 옷도 스타일리스트가 해온 걸 입었을 뿐이다. 전문가분들이 도와준 덕분이다. 저야 옷의 라인이 살도록 운동을 열심히 해서 체중 감량을 하는 것 정도의 노력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몸에 대한 컨트롤 정도였다.”

김은숙 작가가 왜 정성일이라는 배우를 픽했다고 생각하나.

“작가님이 제가 출연한 《비밀의 숲2》을 본 후 픽을 해놓고 대본을 쓰셨다고 들었다. 들어가기 1년 전에 연락을 받고 알고 있었다. 한데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니 중간에 다른 배우로 교체된 건 아닌가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웃음).”

배우들 간 호흡도 궁금하다.

“(박)성훈이와 (김)히어라는 이미 대학로에서 연기활동을 할 때부터 알고 있었던 배우였다. 잘하는 배우라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최)혜정이는 처음 봤는데, 너무 당차게 연기를 잘해서 놀랐다. 제가 생각했던 에너지 그 이상을 주는 배우였다. 임지연씨는 보시다시피 연기를 너무 잘한다. 현장에서 감정이 이입돼 짜증이 났을 정도다(웃음). 도현이는 참 맑은 친구다. 그 맑음이 연기할 때도 표현되더라. 송혜교씨는 멋있다는 표현이 적당하다. 그간 매체에서 보던 이미지가 있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노력하는 배우였다. 그 이상의 것들을 보여줘 현장에서 그리고 화면을 보면서 놀랐다. 그리고 사석에서는 그 누구보다 털털한 친구다. 그래서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자신의 연기 중 인상 깊었던 장면은 어떤 것인가.

“사실 저는 제가 나오는 장면을 잘 못 본다. 민망하다. 경상도 남자라 그런지 사진 찍을 때 손 하트 같은 것도 못 한다. 해달라고 하면 이미 얼굴부터 빨개진다(웃음).”

작품이 끝나고 김은숙 작가의 피드백이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시즌1이 방영된 후에 다 같이 자리를 한 번 가진 적이 있었다. 제가 들어가니 ‘양조위 왔네요’ 하시더라. 그러더니 ‘근데 그거 얼마 못 가고 유재석 됐잖아요’ 하시며 좋아해 주셨다. 감사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하도영스러운 인물이 많이 캐스팅 오겠지만, 그럼에도 하도영 같은 인물은 없을 것이다, 잘 선택하라’고 조언도 해주셨다.“

《더 글로리》 이전과 이후의 달라진 점이 있나.

“외부적으로는 달라진 게 많다. 지금 이렇게 기자분들과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달라진 부분이다. 사람들이 많이 알아봐 주신다. 대신 배우로서의 변화는 거의 없다. 그럴(사람들의 관심에 일희일비할) 나이가 아니라서 늘 해왔던 것대로 천천히 신중하게 가보려 한다.”

이전에는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2019년 이후 본격적으로 TV 배우가 됐는데, 어떤가. 지금도 간혹 무대에 오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 방송 연기를 했을 때는 그 매력을 잘 모르겠더라. 무대는 한번 시작하면 NG 없이 쭉 이어지는데, 방송은 호흡이 끊겨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한데 하면 할수록 매력을 느끼고 있다. 지금도 무대에 오르는 이유? 너무 좋으니까. 저한테 큰 공부가 된다. 연기라는 게 끝이 없다. 무대는 연기자, 연출자, 관객들의 호흡으로 이뤄진다. 늘 신선하다. 제가 잊고 있었던 것을 상기시켜 준다.

20대 초반에 데뷔해 어느덧 마흔 중반이 됐다. 그리고 최근에 이렇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면 어땠나.

“그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건 가족이었다. 첫 번째도 가족, 두 번째도 가족이었다. 나에겐 돈과 명예보다도 가족이 늘 우선이었다. 지금도 내가 행복한 이유가 가족들이 뿌듯해하고 행복해해서다. 그래서 나도 행복하다. 가족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이유도 없다. 이렇게 인생을 열심히 살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떤 배우로 남고 싶나.

“연기 잘하는 배우. 배우에게는 최고의 극찬이지 않나. 물론 외형도 중요하고 비주얼 칭찬도 기분이 좋지만 역시 연기 칭찬이 최고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