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일 인터뷰] “美에 따질 건 따지되 이참에 ‘국가 정보’ 기틀 바로 세워야”
  • 김종일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23.04.14 10:05
  • 호수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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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원로 외교·안보 전문가 라종일 전 주일대사·국정원 차장
“용산으로 가서 생긴 일은 아냐…대통령실 순발력은 아쉬워”
“한국은 ‘정보’ 우습게 여겨…국정원 정보기능 존중해야”

미국 정보기관의 대통령실 도청 정황이 드러났다. 엄혹한 현실에 국내 정치권은 또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안보에는 만에 하나가 있어서는 안 된다. 두 발을 현실에 딛고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바로 안보다. 대안 모색을 위해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고, 차가운 머리로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시사저널은 라종일 전 주일대사를 찾았다. 

라 전 대사는 대학 교수 출신으로 국가정보원·국가안전보장회의(NSC) 고위직과 주일본·주영국 대사 등을 두루 역임해 외교와 안보 분야에서 이론과 경험을 모두 갖춘 원로 전문가다. 김대중 정부에서 국정원 해외·북한 담당 1차장과 원장의 외교 담당 특보를,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과 NSC 상임위원장을 역임했다. 이념과 진영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한 판단을 무기로 전략적·균형적 외교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방일을 하루 앞두고 원로 외교·안보 전문가 7명을 초청해 대일 외교 방향 등에 대한 의견을 청취했는데, 라 전 대사도 포함된 바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시사저널 임준선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한국 정부를 도청했다는 내용이 담긴 기밀문건 유출 파장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현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가요.

“너무 놀랄 일은 아닙니다. 국제사회에서 국가와 국가 사이에는 치열한 정보전이 늘 펼쳐집니다. 동맹국이라고, 우방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미국이 우리만 들여다보는 것도 아닙니다. 너무 당황해하거나 서운해할 일은 아닙니다. 각국이 비밀리에 정보를 모으고 공작을 펼치는 일은 근대 국가의 속성 중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한 냉정한 현실이 드러났을 뿐이죠.”

국내에서 파장은 상당히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국제정치의 현실에 대해 도덕적 잣대와 이상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이라는 나라를 안전하게 운영하려면 생각을 다르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국가에 비밀정보란 꼭 필요한 자원입니다. 적국이라서 하고, 우방이라고 안 하고의 이분법적 문제가 아닙니다.”

미국에 도청 정황에 대한 항의가 필요하지는 않을까요.

“물론입니다. 미국에 할 말을 안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정부는 미국에 유출된 기밀의 내용·규모·경로 등에 대한 경위 설명을 당당하게 요구해야 합니다. 따질 건 따지고, 도청이 확인된다면 정부는 분명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도 받아내야 합니다. (우리 국민) 누가 보더라도 부족함 없이 당당하게 우리가 요구할 것들은 요구해야 합니다. 당연하게 해야 할 일들입니다. 당연하게 할 일을 하면서도 냉정하게 짚어야 할 점은 ‘현실’입니다.”

현실의 어떤 점을 냉정하게 짚어야 할까요.

“이번 사안에 국한해서가 아니라 국가 정보를 둘러싼 여러 측면을 두루 살펴볼 때입니다. 도덕적 잣대로 정보 유출 사안을 바라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아울러 ‘국가 기밀정보가 유출됐다’는 사실 자체도 정보전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단순한 사고일 가능성도 있지만, 다른 차원일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좋아하거나 싫어할 만한 정보가 유출됐다는 것이 그 나라와 협상국에는 어떤 영향을 줄지 등을 입체적으로 봐야 합니다. 정보 유출로 상대방에게 어떤 인식을 주는가 하는 것도 고민해야 합니다. 국가 정보는 단순하게 생각할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정보를 우습게 알고, 가볍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그런가요. 

“한국은 국가 비밀정보를 국내 정치의 일부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게 잘 드러나는 게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국정원장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국정원장의 임기는 임기제로 해서 보장되고, 국내 정치에서 독립돼야 합니다. 국정원이 정치에서 완전히 독립될 수는 없지만, 정보를 다루는 역할과 권한은 보장돼야 합니다. 국가의 존립과 흥망성쇠에서 중요한 것은 권력을 쥔 사람들이 들으면 싫어할 만한 정보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점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오랫동안 지적돼온 문제입니다.

“역대 대부분의 정권은 국가 비밀정보를 국내 정치에 활용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중요한 정보는 챙기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계적으로 훌륭한 정보부로 평가받았던 곳들이 바로 구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 동독의 슈타지(국가보위부) 등입니다. 막강한 정보력을 뽐내던 이들이 정작 챙기지 못했던 정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자기들 나라가 망한다는 정보들이었습니다. 최고권력자가 싫어할 만한 정보니까 수집과 보고를 피하고 소홀히 한 것입니다. 그렇게 ‘설마’ 하다가 두 나라 모두 망했습니다. 정보를 국내 정치에 활용하면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적인 사례가 있을까요.

“우리의 중앙정보부(현 국정원)는 설립 초기부터 정권 안보까지 챙기는 기관으로서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역대 국정원장 대부분은 대통령의 측근들로 임명됐습니다. 저에게도 한 번 국정원장으로 누굴 보낼지 물어서 ‘누구든 알아서 하시되 측근만은 보내지 말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영국 총리였던 제임스 캘러건이 해외정보국 MI6 수장을 만나 정보국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물었는데, 그 정보 수장이 자신을 ‘총리가 싫어하는 이야기를 해드리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나라 국정원장이 그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정보에 대한 아무런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을 함부로 국정원에 임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국정원의 정보기능에 관해 많은 반성이 있길 바랍니다. 우리의 당면 현실에서는 방첩과 보안 기능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현실에서는 정보와 방첩 기능이 같은 활동의 양면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번 사태가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옮겨서 생긴 일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대통령실이 용산으로 가서 생긴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미국은 적국이든 동맹국이든 정보 수집은 관련된 모든 나라에 다 하고 있습니다. 또 미국만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세계에서 강대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 정보 수집은 합법적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비합법적인 일도 일정한 한계선을 지킵니다.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공개하기도 합니다.”

대통령실이나 정부·여당의 반응에 아쉬운 점은 없으셨나요.

“대응 과정에서 순발력이 좀 없었다고 봅니다. 오늘 아침(4월11일)에야 대통령실은 ‘공개된 정보의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입장을 냈습니다. 어떤 방향의 메시지든 국민이 궁금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게 순발력 있게 대응했어야 했습니다. 이런 사태가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는, 우방국 사이에서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있어야죠. 당황하는 모습은 금물입니다. 과거 독일도 비슷한 사례가 나서 메르켈 당시 총리가 항의했지만, 분명 미국이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곧 한미 정상회담이 있습니다. 일각에선 이번 일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단 미국에서 더 얻어낼 게 없는지 실리를 챙기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내놓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한미 정상회담에서 주로 다룰 본안건이 있는데, 이런 일로 본안건이 훼손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일입니다.” 

미국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에 필요한 자세와 전략은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안보입니다. 북한은 우리의 예상을 앞지르는 엄청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비타협적 태도로 군사주의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외부와의 교류도 차단하고 있죠.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1차적으로는 안보 이슈와 관련한 미국과의 합의가 필요합니다. 동시에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경제·통상 문제도 풀어야 할 것입니다.”

주일대사를 역임하셨습니다. 일본은 과연 윤석열 정부가 기대하는 성의 있는 후속 조치를 내놓을까요.

“유감스러운 점은 지난 10년여 동안 일본에 대한 우리의 외교 자산을 많이 상실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일본이 기본적으로 한국에 대해 일종의 반성적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에는 사과를 해도 소용없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합의도 깬다. 이런 관계에서는 무얼 더 할 수가 없다’는 식의 나쁜 분위기가 생겼습니다. 제가 최근에도 일본에 잠깐 다녀왔는데, 늘 우리한테 우호적이었던 지한파들도 이 이슈에 대한 언급을 삼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신뢰가 중요한데, 지금 한일 간에는 신뢰가 사라졌습니다. 사정이 어렵습니다. 이런 점을 기억하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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