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아까운 생명들이 세상을 떠났다. 전세사기에 휘말린 이들이 그 피해의 무게에 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소식을 뉴스로 접하면서 문득 잊고 싶었던 20여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곧 준공 승인이 날 것이라는 중개사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공동주택 중 한 채를 전세 계약했는데, 준공은 끝내 수포로 돌아가고 집주인이 바뀌면서 갑작스러운 압류 통보가 전해졌다.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으려고 백방으로 뛰었지만 결국 보증금의 5분의 1 정도만 손에 쥔 채 집을 나와야 했다. 돈도 돈이지만, 그때 미처 대비할 겨를도 없이 이뤄진 압류 절차로 인해 가구와 소지품들이 지하창고로 옮겨지면서 사진 앨범 등 소중한 추억의 물품들을 잃게 된 것이 가장 큰 아픔이었다.
그런 기억을 갖고 있다 보니 최근에 이른바 ‘빌라왕’ ‘건축왕’과 같은 전세사기범들에 의해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처지가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그들도 그와 같거나 그보다 훨씬 큰 고통에 몰려 있을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그중 일부가 선택한 극단적 죽음이 그 고통의 크기를 말해주고도 남는다. 인천 미추홀구에서 숨진 30대 피해자가 유서에 남긴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다, 제대로 된 정부 대책도 없다, 빨리 대책이 나왔으면 좋겠다”라는 말에서도 절박함은 애절하게 묻어난다.
이 전세사기의 피해자는 대부분 2030세대다. 집을 구하려 해도 월세는 부담이 너무 크고 매매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사람이 그 세대의 다수를 이룬다. 독립을 해서 거주할 집을 찾아야 하는 나이인데 자금력이 여의치 않으니 주거 사다리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지상의 방 한 칸’ 꿈을 실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경찰청이 특별단속을 통해 적발한 3월24일까지의 피해 사례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주택 유형은 다세대주택(68.35)과 오피스텔(17.1%)이었다.
주거 취약계층을 타깃으로 한 전세사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전문가들도 최근 들어 전셋값이 계속 하락하면서 ‘갭투자’에 따른 전세보증금 떼이기 사례는 더 늘어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피해 주택도 빌라, 오피스텔을 넘어 아파트로까지 범위가 넓혀지고 지역 또한 전국적으로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
전세사기 사태에 대해 “(전 정부의) 무리한 입법과 보증금에 대한 무제한 대출이 사기꾼에 먹잇감을 줬다”고 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을 비롯해 여권 일각에서는 전임 정부의 과오부터 따져 물었지만, 이 문제가 ‘전 정부 잘못’만으로 넘길 수 없는 사안임은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남 탓만 하기에는 피해자들 앞에 놓인 현실이 너무도 암담하다. 지금은 현재의 피해를 좀 더 줄여주고,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미래의 피해를 제대로 막을 방안부터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다. 국민의힘과 정부는 피해 주택 경매 시 일정 기준의 임차인에게 우선 매수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했으나 이 또한 법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대인배적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법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입법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얘기를 직접 듣고 그에 맞는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 문제의 요점 정리도 안 된 채 서두르기만 한다면 또 구멍 뚫린 법을 내놓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주거 안정을 지키는 일은 민생의 토대이자 기본이고, 정치의 실력도 바로 이 부분에서 판가름 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