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주거 안정 지키기, 민생의 기본이다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5.02 10:15
  • 호수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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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까운 생명들이 세상을 떠났다. 전세사기에 휘말린 이들이 그 피해의 무게에 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소식을 뉴스로 접하면서 문득 잊고 싶었던 20여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곧 준공 승인이 날 것이라는 중개사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공동주택 중 한 채를 전세 계약했는데, 준공은 끝내 수포로 돌아가고 집주인이 바뀌면서 갑작스러운 압류 통보가 전해졌다.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으려고 백방으로 뛰었지만 결국 보증금의 5분의 1 정도만 손에 쥔 채 집을 나와야 했다. 돈도 돈이지만, 그때 미처 대비할 겨를도 없이 이뤄진 압류 절차로 인해 가구와 소지품들이 지하창고로 옮겨지면서 사진 앨범 등 소중한 추억의 물품들을 잃게 된 것이 가장 큰 아픔이었다.

그런 기억을 갖고 있다 보니 최근에 이른바 ‘빌라왕’ ‘건축왕’과 같은 전세사기범들에 의해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처지가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그들도 그와 같거나 그보다 훨씬 큰 고통에 몰려 있을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그중 일부가 선택한 극단적 죽음이 그 고통의 크기를 말해주고도 남는다. 인천 미추홀구에서 숨진 30대 피해자가 유서에 남긴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다, 제대로 된 정부 대책도 없다, 빨리 대책이 나왔으면 좋겠다”라는 말에서도 절박함은 애절하게 묻어난다.

26일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와 시민사회대책위가 국회 앞에서 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6일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와 시민사회대책위가 국회 앞에서 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전세사기의 피해자는 대부분 2030세대다. 집을 구하려 해도 월세는 부담이 너무 크고 매매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사람이 그 세대의 다수를 이룬다. 독립을 해서 거주할 집을 찾아야 하는 나이인데 자금력이 여의치 않으니 주거 사다리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지상의 방 한 칸’ 꿈을 실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경찰청이 특별단속을 통해 적발한 3월24일까지의 피해 사례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주택 유형은 다세대주택(68.35)과 오피스텔(17.1%)이었다. 

주거 취약계층을 타깃으로 한 전세사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전문가들도 최근 들어 전셋값이 계속 하락하면서 ‘갭투자’에 따른 전세보증금 떼이기 사례는 더 늘어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피해 주택도 빌라, 오피스텔을 넘어 아파트로까지 범위가 넓혀지고 지역 또한 전국적으로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

전세사기 사태에 대해 “(전 정부의) 무리한 입법과 보증금에 대한 무제한 대출이 사기꾼에 먹잇감을 줬다”고 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을 비롯해 여권 일각에서는 전임 정부의 과오부터 따져 물었지만, 이 문제가 ‘전 정부 잘못’만으로 넘길 수 없는 사안임은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남 탓만 하기에는 피해자들 앞에 놓인 현실이 너무도 암담하다. 지금은 현재의 피해를 좀 더 줄여주고,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미래의 피해를 제대로 막을 방안부터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다. 국민의힘과 정부는 피해 주택 경매 시 일정 기준의 임차인에게 우선 매수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했으나 이 또한 법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공염불에 그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대인배적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법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입법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얘기를 직접 듣고 그에 맞는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 문제의 요점 정리도 안 된 채 서두르기만 한다면 또 구멍 뚫린 법을 내놓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주거 안정을 지키는 일은 민생의 토대이자 기본이고, 정치의 실력도 바로 이 부분에서 판가름 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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