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경제는 별개” 2030이 이끄는 脫‘노 재팬’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3.05.12 14:05
  • 호수 175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사히 생맥주캔 사러 오픈런…日 소비재·여행·문화상품 모두 불티

“그거 구하려면 ‘오픈런’(물건이 들어오자마자 줄을 서는)밖에 방법이 없어요.”

5월9일 서울 광화문의 한 편의점에 일본 맥주인 ‘아사히 수퍼드라이 생맥주캔’을 사러 갔다가 점주로부터 들은 말이다. 이 제품은 5월1일 시중에 풀리자마자 품절 대란을 일으켰다. 캔을 개봉하면 거품이 올라와 음식점에서 마시는 생맥주와 같은 맛을 내는 게 인기 비결이다. 입소문과 호기심이 결합하면서 오픈런까지 유발하는 메가 히트 상품으로 발돋움했다. 편의점주는 “처음엔 젊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 가길래 왜 이러나 싶었다”면서 “입고되면 꼭 연락 달라고 전화번호를 적고 가는 이도 있다. 당분간 들어오는 족족 다 팔려 나갈 것 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5월10일 인천국제공항이 일본으로 떠나는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노 재팬’이 한창이던 2019년 8월 인천국제공항 일본행 비행기 탑승수속 체크인 카운터가 한산한 모습이다. ⓒ시사저널 임준선
5월10일 인천국제공항이 일본으로 떠나는 여행객들로 붐비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일본에 마음 연 2030, 이념보다 실용 중시 

앞서 아사히맥주는 2019년 불어닥친 ‘노(No) 재팬’ 영향으로 한국 시장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다. 노 재팬은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에 반발해 2019년 7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소재 등에 대한 한국 수출규제에 나서자 일어난 일본 제품 구매·여행 기피 운동이다. 롯데칠성음료와의 합작 법인인 롯데아사히주류 매출은 2018년 1248억원에서 2019년에 623억원으로, 2021년엔 172억원으로 곤두박질쳤다. 삿포로, 기린 등 다른 일본 맥주회사의 사정도 비슷했다. 

일본 맥주 불매운동이 약해진 건 지난해 3월부터다. 당시 일본 맥주 수입액이 150만3000달러로 수출규제 조치 후 처음으로 100만 달러 선을 회복했다. 지난해 2분기 260만 달러, 3분기 500만 달러로 늘어난 일본 맥주 수입액은 4분기 420만 달러를 거쳐 올 1분기 600만 달러 선을 넘었다. 올 1분기 일본 맥주 수입액은 662만6000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8.4% 늘어났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단행되기 직전인 2019년 2분기(1901만 달러) 이후 최대다. 다시 월 기준으로 보면 올해 3월 수입액이 293만8000달러로 수출규제 전인 2019년 3월(501만7000달러)의 58.6%를 기록했다. 이에 대해 직장인 김현승씨(가명·36)는 “사실 노 재팬이 대세였을 때가 언제였나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역사를 망각한다’는 죄책감이 들진 않는다”며 “역사 문제도 중요하지만, 경제와는 거리를 두고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030세대 중 절반 이상이 한일 관계의 초점을 과거(역사)가 아닌 미래(경제)에 두고 있다는 조사 내용을 발표했다. 전경련이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모노리서치에 의뢰해 2030세대 626명을 대상으로 한일 관계 개선 필요성에 관해 설문했더니 71%(20대 73.1%, 30대 68.7%)가 ‘필요하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아울러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가치가 뭐라고 보는지 묻자 ‘미래’(54.4%)라는 응답이 ‘과거’(45.6%)란 응답을 앞섰다. 한일 관계 개선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는 ‘양국 협력을 통한 상호 경제적 이익 확대’(45.4%)라고 답한 응답자가 가장 많았다. 많은 전문가는 이념보다 실용을 중시하는 2030세대의 성향이 최근의 한일 관계 회복 국면과 맞물리면서, 앞으로 탈(脫)‘노 재팬’ 현상이 더욱 심화할 거라 전망한다. 

이동과 교류 다시 활발해졌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흐릿해진 노 재팬 흐름은 맥주뿐만 아니라 다른 상품 판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제조·직매형 의류(SPA) 회사인 유니클로는 지난해 한국에서 전년 대비 20.9% 상승한 7042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2021년 529억원에 불과했던 영업이익은 지난해 1148억원으로 116.8% 급증했다. 전체 일본 의류 수입은 올 1분기 334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4.4% 증가했다. 국내 수입차 시장에서 일본 브랜드 점유율은 지난해 1~4월 5.5%에서 올해 같은 기간 8.5%로 상승했다. 올 1~4월 렉서스와 도요타의 신차 등록 대수는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14%, 35.6% 뛰었다. 

노 재팬 운동 슬로건인 ‘사지 않습니다. 가지 않습니다’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일본 여행은 완전히 살아났다. 올해 1월1일부터 3월16일까지 인천국제공항과 김포국제공항에서 일본으로 출발한 여객 수는 135만1671명이다. 지난해 두 공항에서 일본으로 간 총 여객 수(111만5892명)보다 약 24만 명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일본 관광청 통계에 따르면 올 1분기 일본을 찾은 외국인 방문객 중 한국인이 가장 많았다. 반대로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규모에선 일본인이 1위를 차지했다. 올 1분기 일본인 관광객 수는 23만2661명으로 지난해(9204명)의 약 25배 수준이다. 여행업체인 한국자전거나라 이용규 대표는 “일본의 한국 관광 관련 플랫폼인 코네스트를 통해 일본인 관광객을 모객 중인데, 요즘 들어 부쩍 많이 유입되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노 재팬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라며 “여행업계 전반적으론 한국에서 일본으로의 여행이든, 일본에서 한국으로의 여행이든 이동과 교류가 활성화되는 것을 아주 반갑게 여기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에 대해 달라진 인식이 가장 입체적으로 드러나는 분야는 문화다. 3월8일 한국에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은 4월28일 누적 관객 수 500만 명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올해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가운데 처음 500만 관객을 넘겼다. 이 작품은 여고생 스즈메가 의자로 변해 버린 청년 소타와 함께 지진을 부르는 문을 닫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그렸다. 일본 국민에게 고통의 기억으로 남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소재로 치유와 재생의 메시지를 전해 호평받았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국내 개봉 일본 영화 중 최고 흥행작에도 등극했는데, 왕좌를 내준 작품은 불과 두 달 일찍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였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한창 인기일 때 온라인상에서는 ‘노 재팬? 슬램덩크는 못 참지’라는 표현이 밈(meme)처럼 돌기도 했다. 일본 영화의 인기를 과거처럼 ‘문화 침공’이나 ‘굴욕’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은 거의 없다. 높아진 한국 문화의 위상을 바탕으로 일본 콘텐츠가 그저 ‘재미’라는 원초적인 측면에서 소비되고 인기를 끄는 모습이다. 

ⓒ연합뉴스
‘아사히 수퍼드라이 생맥주캔’이 품귀 현상을 보이는 가운데 5월9일 서울의 한 편의점에 재고가 없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연합뉴스

“산업 전반에 영향 미칠지는 지켜봐야” 

이 밖에 유튜브에선 ‘오사카에사는사람들TV’의 마츠다 부장, ‘나몰라패밀리 핫쇼’의 다나카상 등 일본 색채를 물씬 풍기는 캐릭터가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개그맨 김경욱의 부캐(부캐릭터)인 다나카상은 ‘일본 유흥업소 호스트’라는 다소 자극적인 설정에도 대중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더 나아가 김경욱은 다나카상 캐릭터를 앞세워 각종 브랜드의 광고 모델로 나섰다. 포켓몬스터, 산리오캐릭터즈 등 일본 캐릭터도 숱한 한국 유통업체로부터 합작 상품 출시를 요청받는 ‘귀하신 몸’이됐다.   

다만 산업계는 전면적인 친(親)일본 마케팅에 나서는 것은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다. 국민 사이에 반일 정서가 여전히 존재하고, 한일 관계의 향방도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정환 GB투자자문 대표는 “일본 관련 소비가 노 재팬 이전 수준을 회복해 가고 있지만, 전반적인 내수 침체와 한 치 앞을 모르는 한일 관계 등 변수가 아직 시장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여행과 일부 소비재를 중심으로 한 일본 특수가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칠지 여부는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역사보다 안전 이슈에 더 쏠리는 관심 

한때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아사히 수퍼드라이 생맥주캔’이 일본 후쿠시마에서 생산됐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후쿠시마는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당시 원전 폭발이 일어난 지역이다. 소문을 접한 네티즌들이 우려를 쏟아내고, 일부는 불매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에 롯데아사히주류 측은 부랴부랴 “해당 소문은 사실이 아니며, 국내에 들어오는 캔맥주와 생맥주는 전량 후쿠오카 공장에서 생산한다”고 해명했다.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방사능 오염 문제에 대한 국내 소비자들의 불안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다. 

일본 어패류 수입도 이런 방사능 이슈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올 1분기 우리나라의 일본 어패류 수입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9% 증가했다. 동일본 대지진 때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성 물질이 유출되자 한국 정부는 후쿠시마를 비롯한 주변 8개 현 모든 어종의 수산물 수입을 금지했다. 이 조치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 어패류 수입은 줄어들어 2011년 1분기 7380만4000달러에서 이듬해 1분기 2899만7000달러로, 2014년 1분기에는 1761만8000달러로 쪼그라들었다. 이후 2000만∼3000만 달러대에서 증감을 거듭하다 2020년 1분기(2319만3000달러)부터 올 1분기까지 3년 연속 증가했다. 

최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서도 일본 어패류 수입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예고한 대로 올해 봄이나 여름에 오염수를 방류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여지가 있다.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처리가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안전하고 국제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며 “정보 공유를 포함해 처분 관련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진행돼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계속 강조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