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악재 없어 ‘8만 전자’ 기대하면 주가 상승세 꺾이는 삼성전자, 이유는?
  • 황건강 중앙SUNDAY 기자 (hwang.kunkang@joongang.co.kr)
  • 승인 2023.07.29 12:05
  • 호수 1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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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손잡은 일본 반도체 추격에 경쟁 격화 우려 커져

“아베노믹스(아베 총리의 경제정책)를 사라(Buy my Abenomics).” 2013년 뉴욕 증권거래소를 방문한 고(故)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일본에 투자할 것을 요청했다. 야구광인 그는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 선수인 마리아노 리베라에 빗대 일본 경제의 강인함을 역설했다. 이어 자유·인권·법치 등의 가치관을 공유한 미·일 양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결성하는 건 역사의 필연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이던 2017년 TPP를 탈퇴한 바 있다.

인공지능(AI) 분야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반도체 수요 역시 급증할 것이라는 전망에 상승세를 이어가던 삼성전자 주가는 7월26일 다시 6만원대로 내려갔다. ⓒ연합뉴스
인공지능(AI) 분야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반도체 수요 역시 급증할 것이라는 전망에 상승세를 이어가던 삼성전자 주가는 7월26일 다시 6만원대로 내려갔다. ⓒ연합뉴스

日, 美·中 반도체 전쟁 속 최대 수혜국

이렇게 과거의 유물로 남을 것 같던 연설은 지난해 9월 ‘새로운 자본주의’를 들고나온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에 의해 오마주됐다. 마리아노 리베라 대신 오타니 쇼헤이를, 미국이 빠진 TPP 대신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를 거론한 데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을 뿐, 일본은 미국과 함께 번영을 추구하겠다는 내용이다. 연설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지 않았다. 지난해 공식 출범한 IPEF에선 지난 5월 무역과 공급망 등에서 첫 협정에 합의하며 성과를 냈다. 이 합의의 핵심은 반도체를 비롯한 전략 품목 공급망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내용이다. 오랜 기간 미국의 우방을 자처해온 일본은 날개를 달았다. 미·중 반도체 전쟁 속에서 최대 수혜국은 일본이란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한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를 바라보는 우려가 커졌다. 인공지능(AI) 분야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반도체 수요 역시 급증할 것이란 전망에 상승하던 삼성전자 주가는 7월26일 다시 6만원대로 회귀했다. 2030년 1170억 달러(약 154조원)에 이를 것으로 여겨지는 AI 반도체발 훈풍에 엔비디아, IBM, 마이크론 등 미국 반도체 업체들이 최근 한 달간 일제히 상승한 것과는 딴판인 셈이다. 삼성전자 주가는 최근 한 달간 3.86% 떨어져, 미국 애리조나 공장 양산을 1년 미루기로 한 TSMC(1.05%)보다 하락 폭이 컸다.

별다른 악재도 없는데 삼성전자가 유독 약세를 보이는 이유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2위, 메모리 반도체 1위라는 지위 때문이다. 수성할 위치다 보니 일본 업체들의 부활의 타깃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더구나 2021년 일본 정부가 ‘반도체 전략’을 내놨을 때와는 달리 일본 반도체 산업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실제로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인 TSMC는 구마모토현에 1조2000억 엔을 투자해 첫 번째 공장을 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두 번째 공장도 검토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AI와 자율주행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2nm(나노미터, 10억분의 1m)급 최첨단 반도체도 일본 업체의 시장 진입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도요타자동차 등 일본 대표 기업 8곳이 힘을 합쳐 지난해 설립한 라피더스는 2025년 4월부터 2nm 반도체 시제품 라인을 가동한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일본 정부와 재계가 자금을 지원하고, 미국 반도체 공룡 IBM이 개발한 2nm급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이전받는 식이다. 지금은 대만 TSMC가 선두에 선 가운데 삼성전자가 추격하는 형국인데, IBM의 기술을 확보한 일본 라피더스까지 추격해 오는 상황이란 얘기다. 람 이매뉴얼 주일 미국대사는 파이낸셜타임스(FT)를 통해 “안전한 공급망과 국가 안보를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에 투자하는 것은 경제적 압박에 맞서는 핵심 초석”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확고한 선두인 메모리 반도체 분야도 심상치 않다. 일단 고대역폭 메모리(HBM·High Bandwidth Memory) 분야에서 SK하이닉스에 선두를 내줬다는 지적이 나온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지난달 보고서를 통해 올해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가 53%의 점유율로 선두를 기록하고, 삼성전자(38%)와 마이크론(9%)이 뒤를 이을 것으로 전망했다.

규모의 경제가 확고하게 작동하는 반도체 업계에선 선두 업체에 주문이 몰려 품질과 가격에서 우위에 서기 유리하다. 차세대 품목에서 선두 업체라는 인식을 확보하면 업계 판도를 뒤집기 어렵다는 얘기다. 더구나 HBM은 D램 여러 개를 수직으로 연결해 데이터 처리 속도를 높인 메모리 반도체로, 극심한 공급 과잉으로 허리띠를 졸라맨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구세주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 품목이다. 트렌드포스가 올해부터 2025년까지 연평균 40~45%씩 성장할 것으로 전망할 정도다.

이 때문에 경계현 삼성전자 사장은 사내 소통 채널을 통해 “삼성 HBM 제품의 시장 점유율이 여전히 50% 이상”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SK하이닉스는 7월15일 HMB 기술 세미나를 개최하고 경쟁사 대비 우위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7월26일 컨퍼런스콜에선 내년 상반기에는 한층 앞선 제품(HBM3E)을 양산할 것이란 언급을 내놓으며 시장을 선도한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박명수 SK하이닉스 부사장은 컨퍼런스콜에서 “제품 완성도와 양산 품질, 필드 품질까지 종합해 HBM에서 SK하이닉스가 가장 앞서 있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며 “시장을 선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日, 美 마이크론 손잡고 추격에 고삐

이렇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사이, 일본은 미국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마이크론과 함께 추격을 위해 고삐를 죄고 있다. 세계 3위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미국 마이크론은 히로시마현에 공장을 짓고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이다. 아직까진 마이크론이 기술력에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에 뒤처진다는 게 반도체 업계 전반의 평가지만, 일본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경쟁력을 빠르게 키울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고위 공직자는 “미국이 과거 TPP를 탈퇴했을 때도 일본은 CPTPP를 구성하며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을 기다렸다”며 “한결같이 미국의 우방을 자처해온 일본이 전략적 반도체 공급 거점으로 부상하는 상황에서 또 다른 경쟁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을 외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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