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한가위만 같아라’는 이제 옛말…장 보기 겁나”
  • 이해람 인턴기자 (haerami0526@naver.com)
  • 승인 2023.09.15 13:05
  • 호수 1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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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앞둔 전통시장, 방문객 많지만 물가 부담에 매출은 ‘반 토막’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더니….” 

추석을 보름여 앞둔 9월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에서 한 소비자가 과일을 고르고 있다. ⓒ시사저널 이해람

추석을 보름가량 앞두고 서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농산물 가격이 치솟아 장을 보기가 겁날 정도다. 최근 시사저널이 돌아본 전통시장 5곳은 코로나19 종식 선언 이후 맞는 첫 명절이니만큼 분주한 분위기였다. 팬데믹으로 휑했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인파로 가득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소비자도 상인도 좀처럼 웃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9월11일 찾은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은 소비자와 상인이 뒤섞여 그야말로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지하철 제기동역 2번 출구에서 경동시장을 지나 청량리 청과물시장으로 이어지는 길까지가 모두 정신없는 ‘시장통’이었다. 경동시장에서 채소를 판매하는 한 상인은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찾아오는 손님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했다. 덥고 습한 날씨 속에서 방문객들이 청과물가게로 속속 모여들었다. 상인은 가게 안과 밖을 번갈아 보며 “맛 좋고 달달한 과일 사세요”라고 목청껏 외쳤다. 

고물가에 빛바랜 엔데믹 이후 첫 명절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9월1일 발표한 9월 전통시장 경기실사지수(BSI)는 8월(62.0)보다 45.4포인트 오른 107.4다. 8월18∼22일 전통시장 점포 상인 1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였다. 지수가 100 이상이면 경기가 호전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더 많고, 그 미만이면 악화할 거라 보는 사람이 더 많다는 뜻이다. 107.4라는 수치는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인 2017년 9월(107.7) 이후 6년 만에 최고치다. 즉, 한 달여 전 전통시장 상인들 사이에서 경기 호전에 대한 기대감이 매우 컸다는 말이다. 상인들이 경기 호전을 전망한 이유로는 ‘명절이 있어서’라는 응답이 61.5%(중복 응답)로 가장 많았다. 

하지만 올라도 너무 오른 농산물 물가가 복병이 될 줄 상인들은 몰랐다. 통계청이 9월5일 발표한 데이터에 따르면 8월 소비자물가는 폭염·폭우 등 영향으로 과일값이 큰 폭으로 오르면서 4개월 만에 최대 폭으로 상승했다. 과실 물가는 1년 전보다 13.1%나 뛰었다. 지난해 1월(13.6%) 이후 가장 큰 폭의 상승세다. 품목별로는 사과(30.5%), 복숭아(23.8%), 수박(18.6%)의 오름세가 두드러졌다. 채소류는 지난해 폭염에 따른 높은 물가 영향으로 1.1% 하락했다. 다만 전달과 비교하면 16.5% 올랐다. 

ⓒ시사저널 이해람
9월11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의 한 노점에서 상인이 시금치를 판매하고 있다. ⓒ시사저널 이해람
ⓒ시사저널 이해람
9월10일 오후 서울 은평구 대림시장에서 소비자들이 농산물 판매대를 둘러보고 있다. ⓒ시사저널 이해람
9월10일 오후 서울 은평구 대조시장에 수박과 복숭아가 진열돼 있다. ⓒ시사저널 이해람
9월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에서 소비자들이 소쿠리에 과일을 담고 있다.ⓒ시사저널 이해람

치솟은 과일값에 상인도 소비자도 ‘한숨’ 

이날 경동시장 방문객들 역시 과일을 고를 때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진열된 사과와 복숭아를 살피면서 조금이라도 상하거나 무른 부분이 있는지 꼼꼼히 살폈다. 한 방문객은 “이왕 비싼 과일 사는 거 최대한 좋은 걸로 골라 가고 싶다”고 했다. 청량리 청과물시장에서 만난 한 부부는 “매년 양가 부모님댁을 방문할 때 과일 선물세트를 사 간다”며 “물가가 워낙 올랐으니 조금이라도 싸게 사려고 시장에 와봤다”고 전했다. 시장 물가 상황도 녹록지 않음을 확인한 이들은 “마트나 백화점은 더 비쌀 테고, (과일 선물세트가 아닌) 다른 걸 살 수도 없으니 심란하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명절용도 이렇게 구매하기 망설여지는데, 가정에서 과일을 맘껏 사 먹는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 됐다. 서울 은평구 연서시장에서 마주친 김아무개씨(53)는 과일가게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기만 하다가 자리를 떴다. 이유를 묻자 그는 “모처럼 과일이 먹고 싶어서 지나가던 길에 판매대를 봤는데 편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가격이 전혀 아니더라”며 혀를 내둘렀다. 

가격 조사 기관인 한국물가정보가 추석 성수품 구입 비용(4인 가족 기준)을 조사한 결과 전통시장에서 장을 봐 차례상을 차리는 데 드는 비용은 30만9000원으로 지난해보다 3% 증가하는 것으로 나왔다(대형마트에서 구입할 때 필요한 비용은 2% 증가한 40만3280원). 일조량 부족과 과육이 썩는 탄저병으로 사과값(33.33% 상승)이 크게 올랐고, 밤(14.29% 상승)도 생육 환경 악화로 공급량이 감소해 비싸졌다. 벼 재배면적 감소와 태풍, 폭염 등에 따른 작황 부진으로 햅쌀(20% 상승) 가격이 올랐고 수입량이 감소한 조기(20% 상승)값도 뛰었다. 

ⓒ시사저널 이해람
9월10일 오후 추석을 앞두고 많은 소비자가 서울 은평구 대림시장을 찾았다. ⓒ시사저널 이해람

“사과 대신 샤인머스캣”…변하는 차례상 풍경  

연서시장에서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김아무개씨는 “과일 가격이 급등해 손님들이 많이 사지 않는 탓에 매출이 지난해보다 50% 정도 떨어진 것 같다”면서 “무화과의 경우 지난해 1kg에 4500원이었는데 지금은 1만원이 넘는다. 두 배 넘게 오른 게 말이 되느냐”고 토로했다. 그는 이어 “추석이 2주 정도 남았으니 그동안 되도록 많이 팔리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과일 가격 상승은 소비 패턴의 변화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과일을 박스째 사지 않고 낱개로 구매하는 게 대표적이다. 경동시장 과일가게 상인 박아무개씨는 “차례상에 올릴 것만 소량으로 구매하는 손님이 많아졌다”고 했다. 일부 소비자는 사과 등 가격이 오른 과일 품목을 피해 ‘대안’을 찾고 있다.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대안 품목은 샤인머스캣이다. 공급량이 크게 늘어나 가격이 하락세이기 때문이다. 2016년 278ha에 불과했던 샤인머스캣 재배면적은 7년 만인 올해 6577ha로 24배 증가했다. 서울 동대문구에 거주하는 김아무개씨는 “시장에서 과일 가격대를 쭉 보고 올해 차례상에 사과나 배 대신 샤인머스캣을 올리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서울 은평구 대림시장을 들렀다 집으로 돌아가던 한 행인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더니, 이게 뭔가”라며 “차라리 명절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씁쓸해했다. 

 

■ 백화점 축산·수산 선물세트는 ‘불티’ 

고물가로 소비가 얼어붙은 가운데서도 백화점의 추석 선물세트 예약판매 매출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해 주목된다. 특히 축산·수산 선물세트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신세계백화점의 8월18일~9월6일까지 추석 선물세트 예약판매 매출을 보면, 지난해 추석 전 같은 기간보다 103.5% 증가했다. 같은 기간 롯데백화점의 예약판매 실적은 60%, 현대백화점은 56.3% 늘어났다. 

20만~30만원대 한우 선물세트가 인기를 끌며 신세계백화점(89%)과 롯데백화점(40%), 현대백화점(103.8%) 모두 축산 매출이 크게 뛰었다. 수산물 선물 판매의 경우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해양 방류로 저조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는 다른 양상을 나타냈다. 롯데백화점에서는 굴비 매출이 지난해 추석보다 4배 이상 증가했고, 갈치와 옥돔, 전복은 2배, 멸치 등 건어물은 3배 늘어났다. 신세계백화점(78%)과 현대백화점(47%)에서도 수산물 선물세트 매출이 두 자릿수씩 뛰었다. 

이는 부쩍 비싸진 과일 대신 축산·수산물을 선물용으로 구매하려는 수요가 늘어난 영향으로 풀이된다. 고가의 한우 선물세트가 잘 팔리는 데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상 선물 가격의 상한이 높아진 요인도 한몫을 담당했다. 

한편 대형마트에서도 선물세트 예약판매 매출이 호조를 나타냈다. 롯데마트는 8월10일부터 9월6일까지 예약판매 매출이 20%가량 늘어났다고 밝혔다. 이마트도 8월10일부터 9월4일까지 선물세트 예약판매 매출이 22.2% 증가해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유통 대기업들은 고물가 상황을 겨냥한 각종 할인 혜택을 앞세워 소비자 잡기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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