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2023년에도 ‘안녕들 하십니까’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0.09 08:05
  • 호수 1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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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연말, 대학가에는 큰 종이에 손글씨로 꾹꾹 눌러쓴 메시지들이 게시판 혹은 담벼락에 줄지어 나붙었다. 서울의 한 대학교 학생이던 주현우씨가 국가 기관의 대선 대입, 철도 노조의 파업 등 당시 사회를 달군 이슈들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담아 작성한 대자보 글이 그 시초였다. 이후 첫 작성자인 주씨가 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을 똑같이 붙인 글들이 지방의 대학 캠퍼스와 버스 정류장까지 뒤덮으며 큰 화제가 되었다. 주씨가 자신의 대자보에서 “저는 다만 묻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없으신가, 혹시 ‘정치적 무관심’이란 자기 합리화 뒤로 물러나 계신 건 아닌지 여쭐 뿐입니다”라고 적은 것처럼 이 대자보들은 당시 시민들의 ‘안녕’을 묻는 방식으로 사회를 향한 자신들의 메시지를 빽빽이 담아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동시대인들의 ‘안녕’을 묻는 질문은 그때와 같은 대자보로 표출되지만 않았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 각자의 마음속에서, 혹은 공·사석에서 ‘안녕’이란 화두는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특히 끔찍한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고 대형 참사 등 각종 사건·사고에 따른 아픔이 악몽처럼 질기게 남아있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사람이 서로의 안부를 묻기 바쁜 사이에도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듯이 아주 굳건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힘 있게 ‘안녕’한 사람들이 있다. 과거 정부에서 잘나갔던 ‘그때 그 사람’들은 세간의 평가가 어떻든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의기양양하게 살아 돌아와 다시 높은 자리에 오르기까지 한다.

채아무개 상병 순직 사건을 수사하다 해임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이 9월5일 오전 항명 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기 위해 용산구 국방부 군 검찰에 출석하며 취재진 질문을 듣고 있다. ⓒ 연합뉴스
채아무개 상병 순직 사건을 수사하다 해임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이 9월5일 오전 항명 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기 위해 용산구 국방부 군 검찰에 출석하며 취재진 질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한 젊은이가 주어진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대에 갔다가 폭우 실종자 수색 작업을 하던 중에 어이없는 죽음을 맞았는데도 수색을 지시한 최고 책임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또한 안녕하다. 그 당사자인 해병대 1사단장은 “책임을 통감하고 사단장으로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밝혔지만 정작 해병대 측은 “책임을 다하겠다는 표현이 사퇴는 아니”라고 뒤로 물러섰다. 게다가 이 사망 사건을 담당한 해병대 수사단장은 항명을 했다는 이유로 보직 해임을 당했고, 사단장과 여단장 등은 혐의 내용이 빠진 채 사실관계만 적시돼 경찰에 넘겨졌다. 또 재산 신고 누락 등으로 도마에 오른 신임 대법원장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자신의 잘못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사퇴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아무튼 뭐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얼버무린 채 넘어갔다.

20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한 인물이 당시 국회에서 툭하면 “사퇴하세요!”를 남발하는 바람에 ‘사퇴’의 엄중함이 희석되어버린 탓일까. 자신의 과거 행적에서 잘못이 드러나 숱한 지탄을 받아도 주저없이 높은 자리에 오르려거나, 이미 올라있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그들만의 영광 속에서 변함없이 버티며 ‛안녕’하다. 또 그중 일부는 과거의 일이 무슨 대수냐는 투로 뻔뻔스러운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이형기 시인의 《낙화》 속 한 구절을 차용해 자주 회자되는 ‘떠나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말은 이제 하도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탓에 조금은 진부해졌다. 하지만 글귀는 진부해졌더라도 그 울림만은 결코 진부해질 수 없다. 줄을 잘 선 누군가만 특별하게 안녕한 나라가 아니라, 모두가 공정하게 안녕한 나라를 만들기는 정녕 불가능한 것일까. 10년 전 대학가에 울렸던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외침이 오늘 다시 가슴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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