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서울로, 그런데 말은 왜 제주로 보내지? [김지나의 그런데 말(馬)입니다]
  • 김지나 아마추어 승마선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2.0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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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元 영향으로 말 기착지가 된 제주
인간의 기준 따라 야생에 버려지는 ‘한라마
제주도에서 체험승마나 외승을 갈 때 주로 볼 수 있는 한라마들. ⓒ김지나
제주도에서 체험승마나 외승을 갈 때 주로 볼 수 있는 한라마들. ⓒ김지나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보다 이런 속담이 탄생한 이유에 주목해보자. 새로운 도전을 하거나 성공을 갈구할 때 사람들은 서울로 향했다. 돈과 사람이 모여드는 서울에는 그만큼 기회도 더 많기 때문이었을 테다. 그에 비견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말’이라고 하면 옛날부터 제주도만한 곳이 없었다.

제주에서 말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가 원(元)의 간섭을 받던 시기다. 원나라가 한반도를 통해 일본과 남송을 침략하려고 했던 그 시절, 그 중간 기착지로 낙점된 곳이 바로 제주도였다. 말을 타고 유목생활을 하는 몽골 사람들은 전쟁을 할 때도 당연히 기마전이 중심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고려 땅 어딘가에서 말을 키워 조달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침 제주도는 일본, 남송과 가깝고 초지가 많아서 안성맞춤이었다. 원나라의 아성이 무너진 이후에도 몽골에서 만든 목장, 몽골에서 데려온 말과 관리인들은 이곳에 뿌리를 내려 제주의 말산업을 발전시키는 기반이 됐다.

몽골 유목민들이 키우는 몽골마. 제주도가 말의 고장으로 유명해진 데에는 고려시대 때 받은 원나라 영향이 크다. ⓒ김지나
몽골 유목민들이 키우는 몽골마. 제주도가 말의 고장으로 유명해진 데에는 고려시대 때 받은 원나라 영향이 크다. ⓒ김지나

저렴해 쓰이고 필요 없어 버려지고

지금 제주도에서 주로 만날 수 있는 말은 ‘제주마’와 ‘한라마’들이다. 사실 제주도에서 승마 체험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재래종인 제주마보다 한라마를 탔을 가능성이 높다. 한라마는 제주마와 외국산 경주마 품종인 더러브렛(thoroughbred)을 교배시켜 태어난 말들이다. 대부분의 제주도 말 목장에서 관광용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이 한라마들이며,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 승마장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이유는 한라마의 저렴한 몸값과 유지비용 때문이다. 유럽에서 생산돼 승용마로서 많은 훈련을 받은 말들은 수천에서 억대까지 가격이 올라간다. 경주마 출신 더러브렛들은 처음 구매할 때 가격 접근성은 좋지만 일반인들이 안정적으로 탈 수 있기까지 상당기간 훈련을 다시 시킬 필요가 있다. 그에 비해 한라마 가격이 높지 않다는 것은 많은 훈련을 거치지 않고도 현장에 투입될 수 있다는 뜻일 테다. 몸집이 작고 튼튼해서 유지관리도 훨씬 수월하다고 한다. 말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라마는 제주마보다 더 유명하고 또 ‘가성비’ 좋은 상품이었다.

작년까지 제주 경마장에서 주로 활약했던 것도 한라마였다. 더러브렛의 피를 물려받은 한라마들은 스피드가 필요한 경주마로도 손색이 없었다. 그래서 1990년 제주 경마장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마사회는 적극적으로 한라마 경주를 지원했다.

‘작년까지’인 이유는 올해부터 한국마사회에서 제주 경마에 제주마만 출전하도록 방침을 바꿨기 때문이다. 제주 경마장에서는 말의 체고를 137cm 이하로 제한하고 있는데, 여기에 맞추기 위해 일부러 말을 굶긴다거나 말굽을 깎는다는 논란이 있어왔다. 기준치 이상으로 성장한 한라마들은 더 이상 경마에 나설 수 없었다. 경주 능력을 키우기 위해 더러브렛과 반복적으로 교배되면서도 신체조건이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퇴출되는 것이다. 거기에 따라오는 혈통 논란도 마사회 입장에서는 골칫거리였던 모양이다.

마사회는 이런 한라마를 제주 경마에서 제외하겠다고 2005년부터 언급한 데다 단계적으로 축소해왔으니 대비할 시간이 충분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말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마 시장에 나설 수 없게 되자 말 생산자들은 더 이상 한라마를 좋은 상품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버려졌던 한라마 '향이'는 작은 패드조차 몸에 걸치는 것을 무서워할 정도로 소심하고 자신감이 없는 상태였다. ⓒ허드앤허트
버려졌던 한라마 '향이'는 작은 패드조차 몸에 걸치는 것을 무서워할 정도로 소심하고 자신감이 없는 상태였다. ⓒ허드앤허트
이제 안장을 얹고 사람을 태우기 위해 기다리는 법을 배운 '향이'. ⓒ출처: 허드앤허트
이제 안장을 얹고 사람을 태우기 위해 기다리는 법을 배운 '향이'. ⓒ출처: 허드앤허트

차근차근 다가가야 서서히 곁을 준다

결국 이 결정으로 수많은 한라마들이 도축장에 보내지거나 야생에 버려졌다. ‘향이’도 그 중 하나였다. 향이는 함께 생활하던 무리에서도 서열이 낮아 먹이도 제대로 먹지 못해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말랐었다고 한다. 자신감도 바닥이어서 멀리서 사람 그림자만 봐도 도망 다녔다. 향이가 사람에게 곁을 주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걸음마부터 천천히 배우는 아기처럼, 지금 향이는 자신의 몸을 쓰는 법을 차근차근 배워나가고 있다. 안장은커녕 작은 패드도 무서워했던 향이는 이제 사람을 태우기 위해 스스로 등을 내밀어주는 여유까지 생겼다.

태생이 어떠하든, 몸집이 크든 작든, 그에 맞는 훈련과 보상이 주어졌을 때 말은 자신이 가진 최고의 가치를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하지만 여전히 중간과정을 생략한 채 인간의 필요에 따라 말을 생산하고 또 폐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람이 만들어낸 기준에 이리저리 맞춰지다 이도저도 안되면 육용으로 보내지는 한라마의 운명이 재래마를 육성한다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애초에 제주가 말의 고장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 배경을 떠올리면, 어디에 유연함이 필요하고 또 어떤 부분에 철저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할지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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