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사재 출연이라는 관행은 정당한가
  • 이진우 MBC 《손에 잡히는 경제》 앵커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4.01.05 17:05
  • 호수 1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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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의 성패가 날씨에 달려있던 옛날 임금의 중요한 임무는 기우제였다. 비가 몇 달 동안 내리지 않아 민심이 흉흉해지면 임금이 직접 산으로 올라가 기우제를 지냈는데, 기우제만큼은 신하들을 시키지 않고 임금이 직접 무릎을 꿇고 며칠 동안 비가 올 때까지 혼자 기도를 했다고 한다. 기우제를 지내기 시작한 지 꽤 지났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하늘이 임금을 버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그건 하늘이 임금의 권위를 인정했다는 의미이니 그 후로 몇 년은 아무도 임금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했다. 당시 임금들은 이렇게 종종 억울하기도 하고 과도해 보이기도 하는 책임을 떠안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런 부당한 책임과 부담이 오히려 왕의 권위를 유지하는 힘의 근원이기도 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신청한 가운데 28일 서울 여의도 태영건설 본사에 걸린 깃발 모습 ⓒ연합뉴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신청한 가운데 28일 서울 여의도 태영건설 본사에 걸린 깃발 모습 ⓒ연합뉴스

현대사회에서도 이런 기우제 같은 일이 종종 벌어진다. 태영건설 워크아웃 과정에서 불거진 대주주 사재 출연 논란이 대표적이다. 워크아웃은 태영건설로부터 돈을 받아야 하는 채권자들이 태영건설을 살려보자는 논의를 하고 그 일을 진행시키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 일이 태영건설의 생존에도 도움을 줄 수 있으니 태영건설 대주주도 사재를 털어 그 일에 도움을 줘야 한다는 논리다.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왜 대주주가 나서야 하느냐는 점이다. 태영건설이 혹시 워크아웃 덕분에 살아난다고 해도 그 혜택은 태영건설의 모든 주주가 골고루 받는 것이니만큼, 주주들이 지분율에 따라 조금씩 돈을 모아 도움을 줘야 한다는 논리라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겠으나, 다른 주주들은 괜찮고 대주주만 희생해야 한다는 건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마치 비가 오지 않는 게 오로지 임금의 책임이라는 논리와 비슷하다.

우리는 평소에 대기업 오너들이 ‘쥐꼬리만 한’ 지분으로 회사를 쥐고 흔드는 전횡을 하는 것은 나쁜 일이며, 지분율만큼만 권리를 행사해야 하고, 지분율이 낮은 다른 주주들도 똑같은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그런 의미다. 소액주주든 대주주든 회사의 경영에 관한 책임과 권리를 정확히 그 지분만큼 갖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업이 위기를 맞게 되면 평소에는 당신도 일개 주주일 뿐이니 자중하라고 지적하던 바로 그 오너 회장에게 사재를 내놓으라고 한다. 물론 그동안 그 기업을 사실상 주물러온 당사자이니 그런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사재가 출연되고 나면 마치 기우제를 지낸 후 비를 맞으며 산에서 내려온 임금처럼 그 오너 회장에게는 그 기업을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기업이 어려울 때 ‘당신이 이 기업의 사실상 주인이니’ 당신 혼자 사재를 출연하라고 했다면 그 기업이 살아난 후에는 ‘이제는 당신이 이 기업의 주인이 아니니 다른 주주들을 존중하라’고 소리칠 명분이 없는 것이다. 평소에는 자기 소유물처럼 주무르다가 문제가 생기면 지분율만큼만 책임지고 물러나겠다는 오너들의 무책임함이 꼴불견이라는 비판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평소에는 기업이 주주들의 것이며 모든 주주는 평등하다고 주장하다가 그 기업이 어려워지면 대주주 회장이 솔선수범해 사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똑같이 이상한 주장이다.

기업 거버넌스를 개선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이라면 가끔 등장하는 대기업 오너 사재 출연 논란에서 입장을 명확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저 사람은 평소에 우리가 주장하던 대로 기업의 오너가 아니라 지분이 많은 주주에 불과하니 그에게 사재를 출연하라는 압박은 그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줘야 한다는 주장만큼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진우 MBC 《손에 잡히는 경제》 앵커<br>
이진우 MBC 《손에 잡히는 경제》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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