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호기심의 대명사, ‘앨리스’들의 세상을 엿보다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4.03.16 13:00
  • 호수 1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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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서구 극장에서 시작한 남자배우의 여장 문화
‘K드랙문화’ 선도한 뮤지컬 《앨리스 스튜디오》 주목

우리나라에서도 공연된 적이 있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라카지》(원제: 새장 속의 광인들, La Cage Aux Folles)는 동명의 프랑스 희곡을 각색해 ‘드랙퀸 클럽’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코미디다. ‘드랙퀸’이란 사회가 규정하는 성별과 다르게 겉모습을 꾸민다는 뜻의 드랙(drag)과 남성 동성애자가 스스로를 칭할 때 쓰는 여왕 퀸(queen)이 합쳐진 말이다.

단어 자체의 의미가 흥미롭다. 드랙의 사전적 의미인 ‘바닥에 물건을 끄는 행위’가 19세기 후반 서구에서는 남자배우가 입은 긴 치마나 망토 등이 무대 바닥에 질질 끌리는(Dragged) 모습을 묘사한 은어라고 한다. 서구 극장 역사에서는 여자배우가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남자배우가 이를 대신해야만 했던 남자배우의 여장은 셰익스피어 시대부터 익숙한 문화다. 시간이 지나, 여자배우가 무대에 서게 된 이후에도 드랙 문화는 특정 공연의 형식으로 남게 됐다.

오늘날 무대 위 드랙퀸은 스커트, 브래지어, 하이힐, 코르셋, 긴 장갑, 진한 메이크업, 금색의 가발 등 여성적인 아이템을 착용하면서 동시에 목젖이나 수염, 근육 등 남성의 특징이 되는 부위를 함께 노출한다. 과장된 여성성을 연기하는 남성 배우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이 드랙퀸을 생활 속에서 접하기는 어렵다. 이는 일상복이 아니라 클럽의 쇼나 ‘퀴어퍼레이드’(성소수자 문화행사) 같은 특별한 무대를 위해 마련된 의상이고, 드랙퀸 문화 자체가 하위문화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뮤지컬 《라카지》 공연에서 배우 정성화가 연기를 하고 있다. ⓒ로빈 킴 제공
뮤지컬 《라카지》 공연에서 배우 정성화가 연기를 하고 있다. ⓒ로빈 킴 제공

과장된 여성성을 연기하는 드랙퀸

하지만 이들이 등장하는 연극과 영화는 성공 사례가 많다. 19세기 말 연극 《찰리의 이모(Charley’s Aunt)》(1892)는 초연 당시 엄청난 인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번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역대 최고의 뮤지컬 코미디 중 하나로 마릴린 몬로가 주연으로 나온 1959년 영화 버전으로도 잘 알려진 뮤지컬 《뜨거운 것이 좋아(Some Like It Hot)》에서도 여장 남자의 인기가 높다.

《헤드윅(Hedwig)》은 성전환에 실패한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로 의상은 드랙퀸을 따라 한다. 주크박스 뮤지컬 《프리실라 사막의 여왕(Priscilla Queen of the Desert)》(2011)도 로드무비 형식으로 호주 드랙퀸들의 자아 성장기를 담았다.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얻은 《킹키부츠(Kinky Boots)》(2012)의 주인공은 건장한 체격의 흑인 드랙퀸 롤라다. 이 작품의 피날레 곡인 《네가 힘들 때 곁에 있을게(Raise You Up/Just Be)》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 성장하는 내용이다. 2019년 동명의 영화를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만든 《투시(Tootsie)》에서도 중년 남성이 여성 역을 당당하게 연기해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뮤지컬 《킹키부츠》 공연 사진 ⓒ메튜 머피 제공
뮤지컬 《킹키부츠》 공연 사진 ⓒ메튜 머피 제공

드랙퀸 특유의 화려함과 기괴함이 이러한 작품들의 시각적인 특징이라면, 뮤지컬 역사에 길이 남을 명대사도 많이 남겼다. 《라카지》의 대표곡 《나는 나(I Am What I Am)》는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보도록 노력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라는 가사로 유명한데, 이는 주류사회에서 소외된 드랙퀸이 세상에 대고 당당하게 외치는 목소리다.

물론 반대급부도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드랙 문화가 점차 비즈니스화됐다. 남성이 여성의 이미지를 모방하고 복사하는 데 집중하는 콘텐츠가 늘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단순히 예쁜 남자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은 진정한 드랙 문화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 그 본질이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이를 당당히 세상에 보여주는 것. 그 과정에서 유쾌한 창조를 가미하는 것이다.

뮤지컬 《앨리스 스튜디오》 공연 사진 ⓒ김동환(소동 스튜디오) 제공

K뮤지컬 《앨리스 스튜디오》

그간 해외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드랙 콘텐츠가 매스컴을 통해 경쟁적으로 노출되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K드랙문화’를 진지하게 다루는 작품은 드물다. 이러한 점에서 3월1~3일 성동문화재단 성수아트홀에서 공연을 가진 뮤지컬 《앨리스 스튜디오》는 특별하다. 이 작품은 우리 사회에서 비주류로 살아가며 편견에 맞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 주인공 로라의 이야기를 다뤘다.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여주인공 로라와 이름이 같은 여주인공을 통해 독립적인 중년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로라는 가부장제가 만연한 사회에서 평생 살아온 50대 치매 엄마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이자 멘토로서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인공 앨리스와 상통하는 창조적인 호기심으로 무장한 내면을 가졌다. 의상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드랙퀸의 외형이 결합된 특별한 캐릭터다.

오랜 이별 끝에 새로운 이름으로 찾아온 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은 중년 성장기 드라마다. 로라는 평생 꼭 맞는 투피스만 입고 살다 앨리스 스튜디오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옷차림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되는데, 옷은 곧 그 사람의 개성이자 본질이라는 모토는 드랙 문화의 핵심 가치이기도 하다. 작품의 배경이 앨리스의 ‘의상실’이 되면서 형형색색의 다양한 의상처럼 이곳을 찾아오는 세 명의 ‘앨리스’를 다역과 앙상블이 저마다의 사연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

이 작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우수 레퍼토리 지원사업에 처음 선정돼 2020년 5월, 교내 공연으로 처음 시작했다. 2020년 10월 구로문화재단 구로아트밸리 중극장에서 트라이아웃 공연을 가졌고, 코로나19 시기에도 충무아트센터 창작뮤지컬어워드 NEXT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를 통해 더욱 단단해진 작품으로 돌아와 이번 성수아트홀 공연을 갖게 됐다.

이번 공연에서는 초연부터 활약해온 류세일, 권영은, 곽다인, 류석호, 류주비, 김수민 배우의 열연과 새로 합류한 강은일이 작품의 완성도를 더 높였다. 프로젝트 《xxy》의 연출가 김지은과 작곡가인 정경인 콤비와 이지선 음악감독, 5인조 라이브밴드의 연주가 합을 맞춰 드라마와 음악의 정교한 퍼즐을 맞춰나갔다. 짧은 기간 동안 공연된 이 작품은 공연계의 작은 시도였지만, 자신의 내면에 굳건히 또아리를 틀고 있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분장과 공연으로 표출해 냈다. 앨리스 캐릭터의 진정성만으로도 기억할 만한 작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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