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손’ 연기금의 지원사격…밸류업 ‘사실상 강제’ 될까?
  • 조문희 기자 (moonh@sisajournal.com)
  • 승인 2024.03.18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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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금 등 기관, 밸류업 ‘불성실’ 기업 투자 대상서 제외 전망
당국은 “자율적 판단” 강조…재계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

한국 증시 저평가 해소를 위해 정부 주도로 추진되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점차 구체화되고 있다. 지난달 초안이 공개된 밸류업 프로그램은 기업의 자율적 참여에 초점을 맞춰 실효성 논란에 휩싸였지만, 연기금 등 기관이 지원사격에 나서면서 기류가 달라졌다는 분석이다. 기관 투자자들이 기업 가치 제고에 불성실한 기업에 대한 투자를 줄이는 방식으로 사실상 밸류업 프로그램을 강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위원회 김소영 부위원장이 지난 1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밸류업 기관투자자 간담회에서 발언하는 모습 ⓒ 연합뉴스
금융위원회 김소영 부위원장이 지난 1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밸류업 기관투자자 간담회에서 발언하는 모습 ⓒ연합뉴스

‘밸류업’ 지원사격 나선 국민연금

1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당국은 이달 말까지 상장기업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주주환원 강화를 중심으로 한 밸류업 관련 공시 원칙, 내용, 방법 등에 대한 종합 가이드라인 초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당초 정부는 해당 가이드라인을 상반기 내 제시한다는 구상이었지만, 시점을 앞당기기로 했다.

핵심은 얼마나 많은 기업들이 참여하는지 여부다. 당초 업계에선 밸류업 프로그램의 상당수가 기업의 자발적 참여를 전제로 하고 강제성을 띄지 않아, 영향력이 제한될 것이란 우려를 제기해왔다.

다만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동참 의사를 밝히며 기류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연기금은 밸류업 프로그램 지원을 사실상 공언한 상태다. 지난 14일 이석원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전략부문장은 기자 설명회에서 밸류업 프로그램과 관련해 “국민연금의 방향성과 일치한다면 자금을 투입할 수 있다”며 “향후 정책이 구체화한다면 검토해보겠다”고 언급했다.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투자 규모는 148조원 수준이다. 여기에 나머지 4대 연기금인 공무원연금(1조283억원), 사학연금(3조7256억원), 우정사업본부(5조5587억원)를 포함하면 국내 4대 연기금의 국내주식 투자 규모는 158조3000억원에 달한다. 국내 시장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들 기관 투자자가 움직이면 막대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란 게 중론이다.

지난 2월26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거래소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한국 증시 도약을 위한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 1차 세미나' ⓒ 연합뉴스
지난 2월26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거래소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한국 증시 도약을 위한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 1차 세미나' ⓒ연합뉴스

“밸류업, 중장기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기관 투자자의 적극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제도적 기틀도 닦인 상태다. 당국은 지난 14일 ‘스튜어드십 코드(기관 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 가이드라인을 개정했다. “투자 대상 회사가 기업 가치를 중장기적으로 향상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시행·소통하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스튜어드십코드에는 4대 연기금과 125개 자산운용사 등을 포함해 222개 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관 투자자는 각 기업의 밸류업 동참 여부를 투자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각 기업 입장에선 투자에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면 밸류업 공시 등의 기업 가치 제고 노력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다. 국내 주식시장의 큰 손인 기관의 투자 축소가 결정되면 경영에 큰 타격을 입기 때문에, 사실상 밸류업 프로그램을 강제하는 수단이 되지 않겠느냔 반응이 나온다.

다만 당국은 여전히 밸류업 프로그램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금융위는 “스튜어드십코드 가이드라인 개정은 가입 기관투자자가 투자 대상 회사의 밸류업 프로그램 참여 여부를 점검할 수 있는 명시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의의가 있다”면서도 “스튜어드십코드는 민간 자율규범으로, 세부적인 이행 사항은 기관투자자의 자율적인 판단으로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밸류업에 미흡한 기업에 페널티를 주기보다 적극적인 인센티브를 통해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다는 구상이다.

이에 업계에선 밸류업 프로그램의 확산 여부를 중장기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반응이 나온다. 박혜진 대신증권 연구원은 “기업들 입장에선 기업 가치 제고를 단기간에 추진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밸류업 프로그램이 증시 전반에 퍼져나가기까진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각에선 오는 5월 예정된 밸류업 프로그램 세부 가이드라인 발표를 위한 2차 세미나를 기점으로 기류가 달라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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