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 일으키는 오묘한 기의 세계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9.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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氣란 무엇인가/몸안 12경락 통해 움직여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이 황과 기대승은 각기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내세워 수십 년간 논쟁했다. 현대에서 주목되는 철학자 김용옥은 스스로를 기(氣) 철학자라고 정의한다. 기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고 동양 철학의 진수와도 닿아 있어 ‘기는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데 한평생 노력을 쏟아부어도 마땅한 결론을 얻기 힘들다.

여기서는 독자가 알기 쉽도록 기를 인간과 사물 그리고 우주 공간에 가득한 에너지, 즉 ‘기운’이라고 정의한다. 에너지가 몸 구석구석에 골고루 잘 전달되면 심기(心氣)가 좋고, 에너지의 흐름이 갑자기 끊어지면 기절(氣絶)한다. 환절기 때 바뀐 기운에 쉬 감염되면 감기(感氣)에 걸리고, 에너지가 쇠진하면 기진(氣盡)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가 센 것이 좋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강약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청탁(淸濁)이다. 강한 기를 갖고 있어도 탁한 기운이라면 그 사람의 일생은 불행으로 마무리된다.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흐르지 않는 기는 썩어서 탁기가 된다. 반면 약한 기운이라 할지라도 자꾸 돌리면 힘을 얻어 강기가 된다. 탁기를 청기로 바꾸고, 약기를 강기로 바꾸기 위해서는 기를 돌리는 ‘운기(運氣)’ 수련을 해야 한다.

기는 원기(元氣)·정기(精氣)·진기(眞氣)로도 나뉘는데,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기운을 원기라고 한다. 강기를 타고난 사람은 ‘원기가 좋다’ ‘원기 왕성하다’고 한다. 정기는 음식물을 섭취하고 대기를 호흡함으로써 생겨나는 기운인데, 인간은 평소 이 기운으로 살아간다. 사람들은 흔히 몸이 약해지면 보약이나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고 공기 맑은 곳을 찾아 간다. 이것이 바로 정기를 올리기 위한 노력이다.

진기(眞氣)는 명상 수련이나, 몰두한 상태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나오는 기운이다. 박세리가 몰두한 상태에서 퍼팅할 때 나오는 기운, 어린아이가 해 지는 줄도 모르고 흙장난을 할 때 나오는 기운이 진기이다. 다 죽어가던 노인이 몹시 그리워하던 자식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기는 것도 진기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기는 마음 편하게 몰두한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침식을 전폐해도 배고픔과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진기가 발생할 때는 곧 강기·청기가 발생하고, 운기가 잘되는 상태이다. 그러나 타고난 원기가 쇠약한데, 정기마저 키우지 않고 진기만 운기시켜도 문제가 된다. 음악 신동 모차르트가 그런 경우로, 음악에 몰두할 때는 진기가 발생했지만 정기가 부족해 결국 그는 요절했다.

경제 운용에서 펀더멘털(기초)이 중요하듯, 기본적인 원기와 정기를 갖추고 있어야 진기를 발생시킬 수 있다. 따라서 기 수련자들은 정기를 키워 단전에 모으라(蓄氣)고 강조한다. 축기가 잘된 것을 ‘정이 충만하다’는 뜻에서 정충(精充)이라고 한다. 정충이 잘된 남성은 정력이 세고 활력이 넘친다. 그러나 정력을 함부로 낭비하면 금방 쇠잔해지므로, 운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충만한 정기를 운기시키면 기가 장대하게 뻗어 나가는데 이를 기장(氣壯)이라고 한다. 부챗살처럼 기가 온몸으로 뻗치는 사람은 자신감이 있어 열린 마음을 갖게 되고, 감정 조절을 잘해 어른스러워진다.

기장 단계를 완전히 거친 사람은 자기 몸을 자기 생각대로 통제할 수가 있다. 영(靈)이 아주 맑아져 감정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화를 내야 할 때 화 내고 즐거워해야 할 때 즐거워할 수 있게 된다. 조금 집중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도 움직이는 독심술을 갖추는데, 이를 신명(神明) 단계라고 한다.기 충만해도 삿된 마음 쓰면 화 초래

기 수련자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바로 신명 단계이다. 신명 단계로 들어가면 록 음악이 쾅쾅 울려도 독서 삼매경에 빠져들 수가 있다. 이러한 정신 통일은 ‘내가 하는 일이 가장 즐겁다’는 확고한 정신력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신명 단계란 신경계까지도 완전히 장악하는 강한 정신력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정신력은 상상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령 실제로는 얼음물 속에 들어가 있는데도, 따뜻한 목욕탕에 들어와 있다고 믿는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얼어 죽지 않고 버틸 수 있다. 강한 상대와 마주쳤는데 이길 수 있다고 상상하고 최선을 다해 맞서면, 진짜로 이기는 상황이 일어난다. 일반인들은 이것을 마인드 컨트롤에 의한 결과라고 말하지만, 기 수련자들은 고도의 정신 집중, 즉 정신력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오묘한 기는 인체에서 어디로 흐르는 것일까. 중국 기공의 원전 격인 <황제내경>은 기가 경맥(經脈)과 낙맥(絡脈)으로 흐른다며 12경락(經絡)을 소개했다. 12경락은 기가 흐르는 고속 도로라고 할 수 있는데, 이곳의 교통량이 많으면 국도가 나머지 교통량을 소화해야 한다. 기경 팔맥(奇經八脈)은 고속 도로로 가지 못한 기 흐름을 처리하는 국도 구실을 한다. 12경락과 기경 팔맥이 잘 뚫려 있으면 운기가 잘되어 강기·청기가 형성되고, 진기가 발생해 신명 단계로 진입하기 쉬워진다.

12경락 등은 몸 안에 있는 것이므로 몸을 움직여 주면 그 기능이 활발해진다. 이를 위해 기 수련자들은 요가나, 도인(導引) 체조를 한다. 수련 단체에 따라서는 지압이나 안마를 중시하는 곳도 있는데, 이를 활공(活功)이라고 한다. 도인 체조나 활공으로 몸을 풀고 마음을 단전·장심혈에 집중하면, 장심혈이 짜릿짜릿해지면서 뭔가 돌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때 뇌파가 α파 상태로 떨어지면서 명상 상태에 빠져든다.

기운이란 돌고 도는 것이므로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도 주고받을 수 있다. 기를 주고받는 곳이 단전을 비롯한 ‘혈(穴)’이다. 명상 상태에서는 이러한 혈을 활짝 열어 천지에 가득한 기운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명상 수련을 하다 보면 외부 기운을 받아 화 난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상심을 되찾는 능력이 생긴다. 스트레스에 대한 면역력이 높아져 질병에 저항력이 강해지고, 정신 집중을 잘해 공부도 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신명 단계에서 삿된 마음을 사용하면 예상치 못한 불행에 직면할 수도 있다. 신명 단계에서는, 독심술은 물론이고 자기 영혼을 자기 몸에서 빼내 이리저리 이동시키며 세상을 관찰하는 유체 이탈(遺體離脫)을 할 수가 있다. 고도의 수련을 쌓으면 호풍 환우(呼風喚雨)하는 신통력도 부릴 수 있다고 한다. 이때 삿된 마음으로 이런 재주를 부리면 주화 입마(走火入魔)에 걸려든다.

사람 중에는 정충·기장 과정을 거치지 않았는데도 태생적으로 신명 단계에 이르렀거나, 정충·기장을 무시하고 신명 단계 진입을 목표로 기 수련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펀더멘털이 약하고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해, 파멸하는 경우가 많다. 사이비 종교 지도자나 사리 사욕을 추구하는 무당 중에 특히 이런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처럼 기 수련은 육체 건강은 물론이고 정신 세계 완성까지 추구하므로 하면 할수록 어렵고 복잡해진다. 그러나 신비주의를 배격하고 심신 수련에만 매진한다면 건강 회복에 큰 도움이 된다. 답답하고 피곤할 때 기지개를 펴면 몸과 마음이 상쾌해진다. 기 수련자들은, 기지개는 기가 손끝까지 뻗히는 것이라며 ‘氣指開’라고 표현한다. 경제 위기와 추위로 움츠러들었을 때 힘차게 기지개를 펴보는 것도 괜찮은 기 수련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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