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린 배 움켜쥐고 거리 헤매는 ‘꽃제비’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1999.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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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어린이, 옌볜에만 2천명… 한뎃잠 자며 구걸로 연명
‘꽃제비’는 북한 식량난의 참상을 대변하는 용어가 되었다. 장마당을 기웃거리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북한 어린이의 모습이 식량난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 땅을 배회하던 꽃제비들이 이제 중국의 국경 도시로 흘러 들어오고 있다. 그 수는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 2천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시내에 꽂제비들이 배회한다는 얘기를 듣고 5월15일 저녁 그들을 찾아나섰다. 시내에서 언뜻 보기에 북한 아이 같은 소녀가 길 모퉁이에 서 있었다. 저녁은 먹었느냐고 묻자 아침만 먹고 그때까지 굶었다고 한다. 기자가 밥도 사주고 돈도 주겠다고 하자 아이는 머뭇거렸다. 같이 다니는 동무가 하나 있는데 여기서 만나기로 했다며 밥은 필요 없고 돈만 주면 된다고 했다. 싫다고 하는 소녀를 겨우 설득해 주변 식당으로 데리고 가는데, 소녀의 친구가 나타났다. 소녀보다 키가 약간 더 커보이는 소년이었다. 둘은 오늘 처음 만나 서로 동무 하기로 했단다.

식당에 들어가 먹고 싶은 것을 시키라고 하니까 한사코 일 없다고 한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주문하고 그때까지 지내온 내력을 물으니 묻는 대로 순순히 대답했다. 여자 아이의 이름은 임○○. 올해 열 살. 고향인 무산에서 4년제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년까지 다녔다. 아이의 어머니는 3년 전에 돈 벌러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고향 무산에서 탄광 노동자였는데 지난해 8월 식중독에 걸려 사망했다. 졸지에 아이와 열다섯 살 오빠, 아홉 살 동생 등 세 형제가 고아가 되어 무산 장마당에서 꽃제비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먹을 것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지난 2월 동생이 설사병으로 죽었다.

“돈 벌어 북한에 있는 아버지께 드리겠다”

둘만 남은 오누이는 먹을 것이 있는 중국 국경 도시로 건너오기로 결심했다. 둘은 지난 2월 두만강이 얼었을 때 강을 건너 중국 국경 도시로 넘어왔다. 북한쪽 경비가 삼엄한 밤을 피해 낮에 대담하게 강을 건넜다. 이곳에서 떠돌아다니며 꽃제비 생활을 했는데, 이번에 오빠가 병에 걸려 꼼짝 못하게 되자 약값을 구하러 옌지까지 오게 된 것이다. 주변 사람들 말로는 중국 돈으로 30 위안(한국 돈 약 4천5백원)짜리 약을 먹으면 낫는 병이라고 한다.

사내 아이 이름은 이○○. 5월에 옌지 시내에 들어왔다. 고향인 무산에서 몸이 아픈 아버지가 더 이상 너를 먹일 수 없으니 어디든 가서 먹고 살라고 하는 바람에 집을 나와 무작정 떠돌았다. 사내 아이는 이번이 두 번째 탈북이다. 작년에도 한 번 나왔다가 구걸해서 중국 돈 2백 위안(한국 돈 약 3만원)을 벌어가지고 집에 다녀왔다. 혼자 계신 아버지에게 그 돈을 드렸다고 한다. 여자 아이는 이미 돌아갈 집도 없지만, 사내 아이는 이번에도 돈을 모아 아버지에게 드리겠다고 한다.

아이들을 만나기 며칠 전부터 중국 공안들이 꽃제비 일제 단속을 벌이고 있었다. 그 소식도 아이들을 통해 들었다. 아이들은 “조선에서 특무들이 우리를 잡으러 어제 들어왔다”라고 말했다. 아이들 사이에는 중국 공안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에서 나온 특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아이들에게 중국 공안과 조선 특무는 공포의 대상이다. 끌려가면 매를 맞고 수용소에 갇혀 꼼짝 못한다는 것이다.

요즘이 일제 단속 기간이라는 것은 이곳저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아이를 만나기 하루 전인 14일에도 꽃제비들이 많이 있다는 중국 국경 도시에까지 가보았으나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옌지 시내에서 아이들이 잘 나타난다는 역전이나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며칠 전 상부에서 보름 동안 꽃제비 특별 단속 명령이 일선 공안 부대에 떨어졌는데, 꽃제비를 재우는 사람에게는 5천 위안 정도 벌금을 물린다고 한다. 밥만 먹여도 벌금을 물린다. 이번 단속이 특이한 것은, 공안 한 사람당 꽃제비가 5명씩 할당되었는데, 거두어들인 벌금의 5∼10%를 잡은 사람이 갖게 되어 있어 어느 때보다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닌다는 사실이다.“미국과는 싸워도 남조선과는 안 싸운다”

아이들의 정보력은 대단했다. 검거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거의 모두 다른 지역으로 빠져 나갔다. 어제만 해도 두 아이의 동무 3명이 남한 사람이 많이 있다는 선양을 향해 떠났다. 두 아이도 오늘 밤만 무사히 넘기면 이곳을 뜰 생각이라고 했다.

그동안 주로 어른 위주였던 국경 지대 난민 대열에 아이들이 합류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늦봄부터였다. 식량난으로 가정이 파괴된 아이들이 북한 장마당을 돌며 꽃제비 생활을 하다가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렵게 되자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처음 아이들이 넘어올 때는 북한쪽 경비병이나 중국 공안이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넘어오는 아이 수가 점차 늘고, 때로는 10명, 20명씩 무리를 지어 넘어오자 단속을 강화했다.

꽃제비 수가 늘어나고 단속이 강화되면서 이곳에서조차 아이들은 갈 곳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그동안은 조선족이 많이 있는 시장이나 역전에서 빌어 먹었지만 그것도 이제 힘들게 되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벌금이 무서워 아이들을 재워주려고 하는 곳이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돈을 조금 모은 아이들은 밤샘 영업을 하는 ‘록상청’(비디오방)을 잠자리로 이용했다. 그러나 그곳도 이제는 안전하지 못하다. 공안들이 이런 사실을 훤히 알고 집중 단속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점점 외진 곳으로 숨어들어 한뎃잠을 자거나 단속이 덜한 내륙 지역으로 흩어져 가고 있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공안의 단속만이 아니다. 같은 꽃제비 중 나이가 더 많은 아이들이나 불량배들이 아이들의 푼돈을 노리거나, 이들을 범죄 집단의 하수인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애써 번 돈을 집에 돌아갈 때까지 빼앗기지 않고 보관하는 것도 아이들에게는 큰 숙제다. 일부 아이들은 시장에서 만난 조선족 아주머니에게 돈을 맡겨 놓기도 한다. 개중에는 은행에 예금하는 아이도 있다.

식사가 끝나고 나갈 때쯤 되자 두 아이는 큰 애들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며 자기들을 안전한 데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다.

여자 아이의 손발은 피부병으로 헐어가고 있었다. 두 아이 모두 며칠씩 세수를 못해 무척 지저분했다. 그러나 정작 같이 식사를 하며 지켜본 두 아이는 예의 바르고 총명했다. 어른들이 먼저 수저를 들어야 따라 들었고, 다 먹은 뒤에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할 줄 아는 우리의 아이들이었다.

북한에 있을 때 이미 인민학교 과정을 끝내고 중학교 과정을 배웠고, 그래서 ‘조선어’는 물론이고 조금 더 배웠으면 중국어·러시아어·영어를 배울 아이들이었다. 이런 아이들이 단지 먹을 것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 형제를 잃고 남의 나라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는 말에 여자 아이는 당당하게 군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왜 군인이 되고 싶냐고 묻자 “군인이 되어 미국하고 싸우겠다”라고 했다. 왜 미국하고 싸우려고 하느냐고 묻자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그래야 된다고 배웠단다. 그러면 남조선하고도 싸울 생각이냐고 묻자 고개를 완강히 가로저었다. 남조선하고는 싸우지 않겠다는 것이다. “조선에서도 남조선은 같은 동포이기 때문에 싸우지 않는다고 배웠다”라고 말했다. 남조선하고는 싸우지 않는다는 아이의 대답이 진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인지 이곳에 나와서 든 생각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아이들이 ‘남조선’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내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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