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만원에 팔려가는 여성들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1999.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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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여인 대부분 인신 매매 되어 ‘노리개’로 전락
중국·북한 국경 지대에서 흔하게 듣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팔려가는 북한 여성 이야기다. 꽃다운 나이에, 또는 버젓이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여성이 굶어 죽지 않으려고 팔려가고 있다. 이렇게 팔려간 여성들은 한족이나 조선족 남성의 성적 노리개 또는 개인 소유물로 취급되어 인간 이하 생활을 강요당한다. 개중에는 또다시 팔려가거나 학대에 못이겨 뛰쳐 나오거나 자살하기도 한다.

북한 여성들이 매매되어 중국으로 건너온다는 이야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95년께부터 이런 이야기가 국경 지대에서 떠돌기 시작했다. 초기에 넘어온 여성 중에는 친척의 도움으로 시집 가기 위해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점차 조직적인 인신 매매가 성행해, 이제는 국경을 넘는 여성의 거의 대부분이 매매 대상이다.

이처럼 중국쪽 국경 지대로 북한 여성이 많이 넘어오게 된 데에는 나름으로 수요와 공급이 맞아떨어진 점도 있다. 예를 들어 한족의 경우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여성의 상당수가 개혁 개방 이후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남쪽으로 옮겨갔다. 조선족은 조선족대로 많은 여성이 한국으로 시집 가거나 돈 벌러 떠났다. 여성이 태부족해진 그때 굶주림을 참다 못한 북한 여성들이 건너오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 학대·공안 단속 ‘이중고’에 허덕

여기에 인신 매매 조직이 가세했다. 이들은 국경 지역 불량배들에서부터 과거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밀수를 해온 사람 등 여러 부류이다. 특히 과거 변경에서 장사나 밀수를 하던 사람들은 북한의 경제난으로 그나마도 장사할 거리가 떨어지자 여자 장사에 눈을 돌렸다. 개중에는 중국쪽 공안이나 북한 경비대와 짜거나, 북한 쪽에 연계 조직을 가진 기업형 인신 매매단도 있다. 그들 중에는 매우 악랄한 자들도 있다. 여성을 한 번 팔아 먹고는 공안으로 위장해 다시 빼앗아 오거나, 아예 처음부터 며칠 있다가 도망쳐 나오지 않으면 신고하겠다고 위협하는 경우도 있다.

거래되는 금액이나 대상도 천차 만별이다. 중국 돈으로 최하 2천 위안(한국 돈 약 30만원)에서 최고 7천 위안까지 거래된다. 젊고 예쁠수록 비싸고 그렇지 않으면 값이 떨어진다. 대상도 처녀에서부터 주부·노인에 이르기까지 광범하다.

인신 매매단의 횡포가 아니더라도 중국 남성이나 조선족 남성과 함께 사는 북한 여성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이들의 결혼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자녀를 가질 수 없다. 아기를 낳아도 호적에 올릴 수 없어 거의 대부분 유산한다.

또 시시때때로 닥치는 중국 공안의 검거 선풍은 이들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 놓는다. 특히 할당 채우기식 검거가 시작되면 한 마을 전체가 울음바다가 된다. 국경 지대 농촌의 경우 한 마을의 남성 상당수가 북한 여성과 동거하기 때문이다. 일단 단속에 걸리면 남편은 벌금을 내야 하고, 또 아이가 있을 경우에는 아이를 떼놓고 여성만 북한으로 돌려보낸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남편의 학대이다. 대개 북한 여성과 함께 사는 한족이나 조선족 남자들은 교육 수준이 낮고, 특히 한족의 경우 나이가 많거나 신체 불구자, 혹은 여러 면에서 비정상인 사람이 많다. 반면에 돈을 주고 사왔다는 우월감 때문에 여성을 성적 노리개나 물건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북한 여성들은 대체로 이들보다 교육 수준이 높아 이런 대우를 참아내기가 쉽지 않다.

지난 5월15일 국경의 한 도시에서 인신 매매단에 이끌려 팔려갔다가 도망쳐온 한 여성도 남편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뛰쳐나왔다. 최성자(가명)씨. 올해 나이 22세. 김책이 고향인 그는 고향에서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문학교를 다니던 학생이었다. 사회 경험이라고는 해보지 못하고 순진하게만 살아온 최씨가 강을 건너게 된 것은 다른 동포들처럼 굶주림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 최씨 가족은 먹을 것 없는 고향을 떠나 97년 1월에 할머니가 사는 두만강변 국경 지역으로 이사했다. 식량난 이후 북한에서는 그나마 중국과 접한 국경 지역이 사정이 나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삶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사한 지 몇 달 안되어 할머니가 세상을 떴다. 세상을 뜨기 전 할머니는 산에 가서 풀을 뜯어 먹다가 독초를 먹었다. 그 이틀 뒤에는 결핵으로 몸져 누운 아버지가 세상을 등졌고, 식구들의 연이은 죽음에 충격을 받은 어머니마저 자리에 누웠다.이러다가 온 식구가 다 죽겠다는 위기감이 최씨를 덮쳤지만 1년 동안은 고생을 ‘쎄게’ 하면서도 버텼다. 그러나 지난해 4월에는 스스로 한계를 느꼈다. ‘앉아서 굶어 죽으나 강 건너다 빠져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독한 마음이 생겼다. 중국에 가서 막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첫 번째 탈출은 성공했을 수도 있었다. 한 곳에 소개받아 갔는데, 주변에서 밀고해 이틀 만에 도망쳤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국 사람과 미국 사람을 만나 얼마간 도움을 받았다. 기쁜 마음에 그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중국쪽 국경을 서성이다가 인신 매매단의 마수에 걸려 인생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강변에서 그를 발견한 그들은 한편으로는 위협하고 한편으로는 자신들을 따라오면 잘 먹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꾀어서 중국 농촌의 한 조선족 총각에게 그를 넘겼다. 사회 경험이 없는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순진하게 생각했다. ‘고향에 가 봐야 내 입 하나 더 느는데, 그거 더는 것만 해도 어딘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기가 팔려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사실을 안 것은 농사꾼인 남편이 자신을 때리면서 “3천 위안에 사왔으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서이다.

“굶어 죽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가 그 집을 떠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북한 집에서 온 편지를 받고 나서였다. 그동안 남편과 살면서 고향에 잘 있다는 편지를 인편으로 보냈는데 답장이 온 것이다. 그 내용은 그의 가슴을 도려냈다. 바로 밑 여동생이 큰 사고를 당했으니 돈 좀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굶주림에 지쳐 기차역에서 곡식 낟알을 줍던 동생은 마침 들어온 화물 열차의 앞부분에 옥수수 낟알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을 주으려고 하는 순간 기차가 출발해 다리가 기차 바퀴에 깔린 것이다. 급히 병원으로 데리고 갔지만 피를 너무 흘려 다리를 자를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 편지를 받고 더 버틸 힘을 잃은 그는 그 뒤로도 남편의 구박이 계속되자 집을 뛰쳐나왔다. 지금 그는 중국 국경 지대에서 ‘한 고마운 분’의 보호를 받으며 다시 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고 있다.

남편의 학대와 단속될 두려움, 불안정한 가정 생활 등으로 요즘은 굶어 죽더라도 최씨처럼 고향에 돌아가 죽겠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자살 충동에 시달리기도 한다. 국경 도시에서 만난 한 북한 여성은 “내 주변에도 몇 차례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자살 시도가 몇 차례 거듭되자 이상하게 여긴 약국에서 수면제가 아닌 다른 약을 주어 살아났다는 것이다.

이 여성은 국경을 넘을 때 기지를 발휘해 인신 매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넘어와서도 조선족 출신의 좋은 사람을 남편으로 만나 부부 관계도 원만하다. 그러나 3년째 이곳 생활에 익숙해 있는 그도 낯선 사람이 집에 찾아오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기는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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