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딸 박명애 단독 인터뷰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1997.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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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등 구입 자금 댄 한국기업에 아버지 도움으로 감사장 전해”
황장엽 비서의 수양딸 박명애씨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대남 사업을 활발히 펼친 ‘동지’이자 메신저였다. 지난 한 해에만도 열네 차례나 평양을 방문해 아버지의 뜻과 고민을 헤아리고 헌신적으로 도왔다. 이 인터뷰는 <시사저널> 취재진이 지난해 11월27,28일 중국 심양에서 세 차례 그를 만나 나눈 대화를 요약한 것이다.

황비서와는 어떻게 접촉하나?

한 달에 한두 번씩 평양에 직접 찾아가 뵌다. 심양에서 새벽 3시30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면 다음날 오후 4시께 평양역에 도착한다. 단동·신의주 국경을 넘나들 때는 내가 아버지를 돕는 특수 관계라는 사실이 잘 알려져 경비원들이 아무런 검사 없이 통과시킨다. 국경은 ‘어쩌면 세상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를 절감케 하는 경계선이다. 조선에서는 정차하는 역마다 굶주려 말라붙은 사람들이 차창 안으로 서로 손을 내밀어 차마 눈뜨고는 못볼 마음 아픈 장면이 계속된다.

아버지와는 주로 무슨 얘기를 나누는가?

아버지는 인민들의 굶주림 때문에 걱정이 크다. 11월에 찾아뵈었더니 10월부터 평양 시민 한 달치 양식으로 5일분만을 배급한다고 하셨다. 나머지 25일은 굶는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중국에서 한국인들의 지원을 이끌어내 식량을 모아 보내드리고 있는 사업에 격려와 고마움을 표시하면서도 갈수록 아사자가 늘어난다고 걱정하셨다. 지난 수해와 그로 인한 식량난으로 아사자가 50만명이나 발생했다면서, 이 숫자는 절대 외부에 공개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전쟁을 막을 길이 없다는 고민도 커보였다.

무슨 전쟁 말인가?

조선 인민들 사이에는 이대로 굶어 죽으나 전쟁해서 빼앗아 먹으려다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고 한다. 한국이 쌀 지원을 중단하고, 국제 지원마저 방해하니 내부적으로는 어떻게 해서든 전쟁 분위기를 높여 돌파하려고 하는데 이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안타까워하셨다. 전쟁을 피하려면 한국이 제발 식량 원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중국에서 쌀이 안 들어오는 것도 이남이 이북을 굶겨 죽일 목적으로 다 수입해가 버리기 때문이라며 인민의 적개심을 드높이는 분위기라고 한다.

한국에서 박사장을 통해 평양으로 식량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아버지는 될수록 한국의 종교단체·회사·사회단체·개인 등의 명의로 보내 주기를 원하시고 있다. 그래야만 조선에 아무 문제 없이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주로 한국 교회 사람들과 기업들, 해외 교포로부터 기부받아 보내고 있다. 한국 교회와 개인들은 요령 대학 펑위중 총장이 주로 창구가 되어 나에게 연결해 주면 내가 그 돈으로 식량을 마련해 화차(화물 열차)로 평양에 보낸다.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펑총장을 찾아와 굶고 있는 이북 동포를 지원할 방법을 상의한다.

어떤 방식으로 평양에 보내나?

주로 돈을 기부받아 내가 밀가루·옥수수·소금 등을 사서 평양에 실어 보낸다. 한국에서 가끔씩 물건으로 보내기도 한다. 물건은 여기서 수입해서 북에 수출하는 식으로 꾸민다. 대련항 보세 창고에 잠시 넣어뒀다가 바로 북으로 보내 관세를 물지 않는 방법을 쓰고 있다. 또 북경에 있는 주체재단 사무소에 기금을 내면 내가 오더(주문)받아 밀가루를 사서 실어보낸다.

한국인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냥 지원하는가?

교회·학계 등에서는 별 대가를 바라지 않지만 기업들은 명분을 원한다. 일부 교회는 평양에 있는 특정 교회 이름을 지정해서 보내 달라는 일도 있다. 기업들은 대개 물건을 잘 받았다는 확인서와 감사장을 요구한다. 그래서 내가 평양에 들어가 아버지를 통해 감사장과 확인서를 받아다 전해 준다.

한국에서는 민간 차원에서 대규모 식량 지원 운동이 있었지만 잠수함 사건으로 말도 못꺼내게 되었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식량 지원이 절실하다. 한국에 돌아가거든 언론에서 식량 지원 캠페인을 벌여달라. 어린아이들 우유가루가 제일 급하다. 겨울이므로 옷감도 많이 필요하다. 헌옷이라도 좋다. 뭐든 내게 연결만 해주면 다 보내겠다. 확인서나 감사장이 필요하다면 그것도 받아다 줄 수 있다. 그런 서류를 직접 받아다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

한국의 대기업들도 박사장과 접촉하나?

대기업들도 돈을 내서 밀가루를 보낸다. 조선 투자를 놓고 한국 ㅎ그룹이 ㄷ그룹에 뒤진다고 느끼는지 ㅎ그룹 고문으로 있는 재미교포 한 분이 지난 여름 나를 찾아와 김정우 대외경제협력위원장을 같이 만나자고 부탁했다. 만나서 얘기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해 주고 날짜까지 잡았는데 잠수함 사건이 터져서 유야무야다. ㄷ그룹이 남포공단에 진출해 대북 사업을 세게 하니까, ㅎ그룹이 만회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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