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등 대기업 3곳서 자금 지원
  • 김 당 기자 ()
  • 승인 1997.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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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말고도 대기업 셋, 2백25만달러 제공…잠수함 사건 후에도 ‘물밑 돕기’ 계속
<시사저널>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현대그룹의 대북 밀가루 지원은 한승수 부총리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재직하던 95년 들어 입안된 총 5백만달러 상당의 식량 지원 계획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한부총리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기 위해 비서실장을 사임한 후 한동안 사업 추진이 중단되었다가 김광일 현 비서실장에게 인계되었다. <시사저널>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김실장에게 인계된 식량 지원 계획의 1차 성과물은 현대그룹이 자금을 댄 약 백만달러(98만6천달러)어치이다.

김광일 비서실장 체제에서 맨 먼저 현대가 대북 비밀 지원 자금을 댄 배경에는, 지난 대선 때 국민당에서 ‘정주영 대통령 만들기’에 함께 참여했던 현대그룹 관계자들과 깊은 인연이 있는 김실장과 당시 축구협회 회장 및 2002년 월드컵 유치위원회 수석 부위원장으로서 누구보다도 월드컵 남북 공동 개최에 강한 열망을 갖고 있었던 정몽준 의원(정주영씨의 4남)의 이해 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정몽준 의원은 지난해 2월 월드컵 개최지 결정 ‘D­100일’에 맞추어 가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남북 공동 개최 또는 분산 개최에 대해 매우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정의원은 이 때 평소 친분 관계가 두터운 ㅅ교회 ㄱ목사 등이 남북 공동 유치와 관련한 자신의 대북 채널로 활동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ㄱ목사는 ‘선교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귀국한 직후였다.

이밖에도 정의원이 남북 공동 유치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는 다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수없이 확인된다. 정의원은 96년 5월31일 한·일 공동 개최가 결정되기 며칠 전인 5월24일 북한이 ‘월드컵 개최 의사가 없다’는 전문을 국제축구연맹(FIFA)에 보내온 사실이 밝혀진 뒤에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남북 공동 개최에)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심지어 정의원은 한·일 공동 개최 결정 직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북한에 세계적인 행사인 월드컵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김광일·정몽준, 월드컵 남북 분산 개최 낙관

치밀하고 판단력이 뛰어나고 말을 아끼는 스타일인 정의원이 결과적으로 허튼소리를 한 셈이다. 그러나 정의원으로서는 결코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그 시점은 바로 △현대종합상사 북경대표부의 중국 본부장 정재관 부사장이 재미 교포 사업가 김양일씨와 밀가루 구입 대금 지원 방법을 모색해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상사홍콩’을 통해 신용장을 개설(5월)한 데 이어 △현대그룹이 자금을 지원해 밀가루 3천4백t이 중국 요령성 단동의 단동수출입집단을 거쳐 북한 광명성총회사로 인도(6∼7월)된 시기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즉 식량 지원을 통한 남북 공동 또는 분산 개최 카드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남북 공동 개최에 대한 열망이 정몽준 의원 개인 또는 현대그룹 차원에 국한한 것이었을까. 해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월드컵 남북 공동 개최 문제는 남북 관계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는 카드’였다. 월드컵 유치위 멤버들의 면면만 보아도 그렇다. 정부의 의지는 당시 대통령의 남북통일 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평통) 수석 부의장인 이홍구 전 통일원장관을 초대 유치위 위원장으로 앉힌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당시 이홍구 부의장은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월드컵 유치 못지 않게 남북 공동 개최도 중요하다. 전직 통일원장관이 유치위에 왔을 때는 그런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라고 밝힌 바 있다.

그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이 월드컵 유치와 관련된 대기업 차원의 대북 지원 및 청와대 관련설이었다. 즉 이홍구 위원장의 뒤를 이은 LG그룹의 구평회 위원장 및 현대그룹의 정몽준 수석 부위원장을 측면 지원하기 위해 현대그룹뿐만 아니라 LG그룹도 대북 식량 지원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96년 5∼6월께 <시사저널>은 두 그룹이 북한측에 선을 대고 있다는 사실을 대북 무역을 하는 사업가들로부터 확인했지만, 두 그룹이 실제로 자금을 지원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혹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었다. 월드컵 유치 업무와는 전혀 무관한 김광일 비서실장이 고려대 노동대학원 특강(5월14일)에서 이례적으로 ‘한국이 월드컵을 유치하면 일부 경기를 북한에서 분산 개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낙관한 것도 바로 밀가루가 북송되기 직전이었다.
황장엽 비서 수양딸이 물자 북송 창구

그렇다면 당초 5백만달러어치 식량 지원 계획에서 현대그룹이 자금(백만달러)을 댄 식량 지원말고 나머지 4백만달러 지원 계획은 어떻게 되었을까. 또 김양일씨가 중개한 대북 식량 지원 계획에서 현대만 자금을 대고 다른 대기업들은 전혀 참여하지 않을 것일까. 그 의혹의 실마리를 풀어주는 단서는 최근 망명한 조선노동당 황장엽 비서의 수양딸인 박명애씨(34·중국 심양 明興經貿公司 총경리)가 아버지(황장엽 비서)의 뜻을 받들어 비밀리에 수행해온 대북 식량 및 물자 지원 사업의 전모에서 찾을 수 있다.

<시사저널> 취재진이 한국을 처음 방문했던 이 대북 무역 사업가를 처음 만난 것은 95년 12월이었다. 당시 박명애 총경리(대표 이사)는 비보도를 전제로 자신이 황장엽 비서의 수양딸이라고 밝히고, 방한 목적을 “수해로 인한 북한의 심각한 식량난 및 물자난을 해결하기 위해 남한 기업들의 지원을 호소할 목적으로 왔다”라고 밝혔다. 박씨는 <시사저널> 취재진과 만나기 직전에도 ㅈ제약회사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박씨는 돈이건 현물이건 자기를 통하면 북한에 물자를 지원할 수 있으니 대북 식량 지원을 촉구하는 캠페인 기사를 써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이후 <시사저널> 취재진이 박씨를 다시 만난 때는 96년 11월이었다. 보도가 무산된 <시사저널>의 이른바 ‘밀가루 북송’ 기사와 관련해 추가 입증 자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시사저널>은 당시 한국 대기업들의 자금 지원을 받은 박씨가 황장엽 비서가 창립한 국제주체재단 평양사무소를 창구로 식량 및 물자를 공급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입증할 수 있는 화물 송장 몇장을 팩시밀리로 받아 확보하고 있었다. 단동­신의주간 화물 수송을 증명하는 ‘단동역’ 직인이 찍힌 이 송장에는 ‘명흥경무공사’가 ‘주체재단 평양사무소’ 앞으로 ‘面粉(밀가루)’을 보낸 것이 적시되어 있다. 당시 국회에서 ‘밀가루 북송’ 문제를 제기한 국민회의가 입수한 화물 송장도 바로 이 송장의 사본이었다. 문제는 한국의 어떤 기업이 돈을 댔느냐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시사저널>은 박씨로부터 △철도 화물 송장(중국 단동­신의주) 18종 △수출계약서 3장 △수출증명서 1장 등 대북 수출입무역 관련 서류들을 입수했다. 그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수출증명서이다. 명흥경무공사 총경리 박명애의 직인이 찍힌 이 수출증명서에는, 명흥경무공사가 북한 무역회사를 통해 그동안 △밀가루 5천t(1백 50만달러) △원단 30만m(25만달러) △소금 만t(50만달러) 등 식량 및 물자를 2백25만달러어치 북한에 지원해 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수출계약서 세 장은 이와 관련해 명흥이 조선(북한)의 무역회사들과 실제로 수출 계약을 맺은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고, 화물 송장 18종은 밀가루가 실제로 단동에서 신의주로 운송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게다가 수출증명서에는 대북 식량 및 물자 지원이 96년 4∼11월에 이루어졌음을 증명하고 있다. 즉 잠수함 사건(9월18일)이 벌어지고 이른바 토끼몰이식 토벌 작전이 진행되는 상황에서도 물밑으로는 북한에 식량과 물자가 지원되는 이중적인 대북 정책이 진행된 것이다.

박명애씨는 자기가 북한에 송출한 밀가루와 생필품의 구입 자금을 누가 댔는지는 끝내 수출증명서에 문서로 특정해 주지 않았다. 이 서류들도 ‘언론 보도 및 기타 다른 용도로 활용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각서를 쓰고서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씨는 한국의 어떤 기업들이 구입 자금을 지원했는지에 대해서는 비보도를 전제로 구두로 밝혔다. 박씨에 따르면 현대그룹과 ㄱ그룹, ㅈ그룹, 또 다른 ㅎ그룹 등 대기업 4개가 박씨의 식량 및 물자 지원에 자금을 댄 대기업들이다.

한국 기업들의 도움을 받은 식량 지원 사업이 언론에 보도될 경우, 한국 기업의 자금 지원이 끊기는 것은 물론 박씨의 식량 지원 비밀 사업 자체도 타격을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박씨로서는 보안 유지가 불가피했다. 그러나 황장엽 비서의 망명이라는 돌발 변수 때문에 박명애씨의 신분과 사업 내용이 언론에 공개됨에 따라 <시사저널>로서는 비보도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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