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길사 대북 쌀 판매에도 개입”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7.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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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씨, 북경서 장성택 측근과 극비 접촉…정상회담 조건으로 두 가지 지원책 제시
김현철씨가 미국 곡물 메이저인 카길사의 쌀 50만t 북한 판매 사업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는 주장들이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기업인과 관료 등 판매 사업에 개입한 전과정을 지켜본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현철씨가 카길사의 대북 쌀 판매 사업에 개입하기 시작한 시점은 카길사가 올해 1월7일 미국 행정부로부터 판매 승인을 받기 전인 96년 하반기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김씨는 96년 9월 초 북경에서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장성택 제 1부부장의 측근 인사인 ㅇ씨와 카길사 관계자들을 극비 접촉하는 등 사업에 적극 개입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김현철씨가 카길사의 대북 쌀 판매 사업에 개입하게 된 계기는 카길사와 북한 당국 간의 쌀 거래 조건에 이견이 있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소식통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북한은 내열재 벽돌 원료로 쓰이는 마그네사이트 그린카와 쌀을 맞바꾸되 쌀은 값싼 태국산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카길사로서는 쌀 50만t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의 마그네사이트 그린카를 판매할 곳을 찾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했다. 게다가 카길사는 태국산보다는 값비싼 캘리포니아산 칼로스를 판매하겠다고 고집했다.

한보그룹이 쌀값 대는 형식

카길사와 북한 당국의 거래 조건이 위와 같이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미국 행정부는 96년 8월께 한국 정부에 카길사의 쌀 판매가 가능하게끔 지원해 달라고 은밀히 요청해 왔다.

한국 정부로서는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직접 식량 지원이 힘든 상황에서 카길사의 대북 쌀 판매를 지원하는 간접 방식을 취해서라도, 북한으로 하여금 4자 회담에 참여하게끔 유도하려는 것이 우리 정부가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인 배경이었다는 것이 소식통들의 분석이다.

한국 정부는 이에 따라 카길사의 대북 쌀 판매를 위한 지원책을 마련했는데, 여기에 김현철씨가 적극 간여했다는 것이 정부 및 대북 정보기관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김씨가 주도해 마련한 지원책은 두 가지이다. 우선 북한이 카길사에 쌀 대금으로 지불할 마그네사이트 그린카를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으로 하여금 전량 수입하게 해, 사실상 한보그룹이 쌀 대금을 대는 형식을 취하게 하는 방안이다.

그 다음은 쌀 판매가의 차액을 한국 정부가 대납해 주는 방안이다. 북한이 원하는 태국산 쌀의 t당 가격은 3백15달러. 이에 비해 카길사가 팔려는 칼로스 쌀의 t당 가격은 4백42달러이다. 톤당 1백27달러씩 차액이 생기니, 50만t이면 무려 6천3백50만달러 차이가 발생하는 셈이다. 결국 이 차액을 우리 정부가 카길사에 보전해줄 경우 북한은 40만t도 채 안되는 칼로스밖에 살 수 없는 양의 마그네사이트 그린카로 50만t에 달하는 칼로스를 살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이와 같은 두 가지 지원 방안은 96년 9월 초 중국을 방문한 김현철씨에 의해 북한 당국과 카길사에 전달되었다.

대북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김씨는 96년 9월4~14일 중국 방문 기간에 북경에서 김정일의 매제로서 북한의 개혁·개방을 주도하고 있는 장성택의 측근 ㅇ처장과, 북한 당국과 쌀 거래를 협의하기 위해 북경에 와 있던 카길사 관계자들을 접촉해 한국 정부의 지원 방안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경제난 해결·개방에 필요한 자금 지원 입장도 전달

김현철씨는 ㅇ처장에게 한국 정부가 지원하는 조건으로, 북한 당국이 97년 상반기에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 고위급 회담을 개최하는 데 합의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당시 박상희 중소기협회장이 남미를 순방하던 김영삼 대통령을 수행하다가 북경으로 날아가 김현철씨와 함께 ㅇ처장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ㅇ처장은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소속으로 알려진, 김일성대를 졸업한 엘리트이다.

김현철씨가 남북 정상회담 건을 북한 당국에 전달했다는 소문은 황장엽 노동당 비서 망명 사건 직후에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청와대의 한 인사는 당시 남북 정상회담이 추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한 사례를 귀띔했다. 그는 “황비서의 서울행을 위해 청와대가 중국 강택민 주석에게 보낼 김대통령의 친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친서에는 황비서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이 없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었다.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는데 어떻게 황비서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겠는가’라는 점을 친서에 적시할 것인지를 놓고 청와대측이 무척 고심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현철씨가 장성택 측근 인사를 통해 북한 당국에 제시한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지원 방안은 카길사의 대북 쌀 판매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씨와 ㅇ처장이 접촉한 과정에 정통한 또 다른 정보 소식통에 따르면, 김씨는 당시 북한 당국이 만약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할 경우 한국 정부로서는 북한의 경제난 해결과 개방에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고 한다.

북한, 정상회담 부담 느껴 쌀 판매 협상 결렬

그러나 현실은 북한으로 하여금 남북 정상회담 제안을 수용하느냐 여부를 고민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김씨가 장성택 측근 인사를 만난 직후인 96년 9월18일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이 발발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 정부가 더 이상 시혜적인 대북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남북 관계는 급격히 긴장 국면으로 치닫고 말았다.

한국 정부의 지원에 의한 카길사의 대북 쌀 판매는 무산되는 것이 아니냐는 견해가 한때 대두했다.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은 다시금 한국과 긴밀한 협의를 거쳐 지난 1월 중순 카길사에 북한에 쌀을 판매해도 좋다고 승인했다.

여기에는 북한 당국이 잠수함 사건에 대해 사과한데다, 북한의 식량난이 더욱 극심해지자 간접으로 식량 지원을 해서라도 북한의 4자 회담 참여를 유도하려는 한국 정부의 정치적 의지가 많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올 1월 말까지 진행되던 카길사와 북한 당국간 쌀 판매 협상은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이는 북한 당국이 카길사의 대북 쌀 판매와 관련한 한국의 지원이 남북 정상회담 수용을 전제로 하는 이상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대신 마그네사이트 그린카와 쌀을 아무 조건 없이 맞바꾸자고 제안했는데, 카길사로서는 마그네사이트 그린카의 수요처를 찾기 힘들어 북한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카길사와의 협상에서 북한 당국은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들일 기미를 어느 정도 보였던 것 같다. 이는 당시 한보철강이 북한으로부터 마그네사이트 그린카 도입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 와중에 한보철강 부도 사태가 일어났고, 이로 인해 마그네사이트 그린카 도입 사업을 실질적으로 담당했던 한보그룹 김종국 전 재정본부장이 구속되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북한 당국은 앞으로 4자 회담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한국과 미국으로부터 직접 식량 지원을 받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카길사의 경우처럼 한국 정부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한 식량 지원은 남북 정상회담 수용 등 부담이 너무 커서 북한 당국으로서는 수용하기가 어렵다고 결론을 내린 것으로 분석된다. 이는 북한 당국이 지난 3월 초 워싱턴에서 미·북한 준고위급회담을 가진 뒤 쌀 1백50만t을 지원하면 4자 회담에 응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낸 데서도 알 수 있다.

“대북 정책에도 ‘김현철 후유증’”

북한 당국의 이같은 입장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로서는 이에 적극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는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이‘김현철 후유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북한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다시 말해서 김현철씨와 그의 사조직이 과도하게 개입함으로 인해 남북 관계가‘엉망진창이 되는 통에’정부로서는 정작 식량 지원을 위해 북한 당국과 실무적으로 접촉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얘기다.

실제로 외무부가 4자 회담에 북한이 참여하면 식량 지원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다고 해도, 식량 지원은 안기부와 북한 당국간 실무 접촉이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간 김현철씨의 개입에 따른 폐해로 북한 당국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면서 안기부가 북한 당국과의 접촉 창구를 구축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는 것이 앞서 소식통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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