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지켜온 고려인의 혈통
  • 타슈켄트·成宇濟 기자 ()
  • 승인 1997.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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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비크 콜호즈, 60년간 ‘고려인 혈통’ 지켜…극단·관현악단 앞세워 단결
우즈베크공화국 수도 타슈켄트 거리를 누비는 자동차 가운데 새 차는 거의가 한국의 대우 자동차이다. 60년 전에는 강제로 끌려갔으나, 지금 그곳은 한국 사람들이 선택해 ‘공략하는 땅’이다. 지난 4월22일에는 아시아나항공이 정기 항로를 열어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거리는 7시간 정도로 가까워졌다. 고려인들이 끌려갈 때는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70여 년을 살아온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강탈해간 고려인 강제 이주는, 세계사에서 유례가 드문 대사건이었다. 스탈린은 강제 이주 제1호 고려인에 이어, 독일인·체첸인·리투아니아인·유태인 등 여덟 민족을 이리저리 옮겨놓는 소수 민족 정책을 펼쳤다.

이웃간 정 두텁고 옛 풍습 그대로

러시아·우즈베크공화국·카자흐공화국에서 몰려 사는 고려인들은 이주 초기에는 대부분 농촌에서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60년이 지난 지금은 도시와 농촌에 거의 반반씩 거주하고 있다. 농촌에 사는 고려인들의 삶은 한국과 여러 모로 비슷하다. 땅을 지키는 이들은 대부분 노인이고, 고등 교육을 받은 자식 세대는 부모들의 높은 교육열 덕분에 거의 예외 없이 도시에 나가 산다.

타슈켄트에서 서쪽으로 45㎞ 정도 떨어진 볼셰비크 콜호즈는, 여러 고려인 마을 가운데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다른 민족을 단 한 사람도 볼 수 없다.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 다른 콜호즈와 달리, 볼셰비크 콜호즈에는 고려인들만 살고 있다. 60년 전 3백호로 건설된 볼셰비크는 지금은 규모가 60호로 줄었으나, 중앙아시아 콜호즈에서는 유일하게 순수 고려인 혈통을 지켜오고 있다. 한민족끼리 살아온 만큼 풍습과 이웃 간의 두터운 정이 어느 마을보다 잘 살아 있다.

볼셰비크 콜호즈에서 60년을 살아온 신알렉세이씨(68)는 이 마을을 만들고 발전시켜온 모든 과정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원동 수찬 지역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강제 이주 명령이 떨어졌을 때‘기차를 탄다’고 즐거워하던 여덟 살 철부지였다. 죽을 곳으로 간다며 눈물을 흘리던 부모를 따라 5남매가 기차에 올랐다. 시베리아를 달리던 중 여섯 살짜리 막내 세르게이가 원인 모를 병으로 죽었다. “어느 역에 도착해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은 소나무 밑을 손으로 팠다. 거기에 동생을 묻고는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재빨리 돌아와야 했다. 변을 보거나 밥을 짓다가 기차가 떠나는 바람에 가족과 헤어진 사람도 많았다.”
‘스탈린이 우리를 죽으라고 여기로 보냈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죽음의 행렬은 계속되었다. 타슈켄트 주에 도착한 고려인들은 마굿간에 수용되었다. 마굿간은 벼룩과 빈대들의 왕국이었다. 바닥에는 더러운 물이 그득했다. “아무리 털어도 벼룩과 빈대가 없어지지 않았다. 밤새 긁다가 죽은 사람도 많았다.”

의사는 물론 약도 없었다. 열병으로 죽어가는 젖먹이의 입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떨어뜨리는 젊은 어머니도 수없이 많았다. 신씨는, 60년이 지난 지금은 눈물조차 말라버렸다고 말했다.

이 마을 사람들이 이같은 악조건에서도 꿋꿋이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김광택(1898~1957)이라는 탁월한 지도자와 그의 ‘문화 정책’ 때문이었다고 신씨는 믿는다. 김광택 콜호즈 회장은 이주한 이듬해에 집보다 구락부(문화회관)와 학교를 먼저 지었다. 당분간 마굿간이나 토굴에서 생활하더라도 문화와 교육이 살아야 민족이 살아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구락부를 갖춘 볼셰비크 콜호즈는 단번에 타슈켄트 주의 문화 중심으로 떠올랐다.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볼셰비크 극단이 구락부 무대에서 <홍길동> 같은 연극을 공연하고,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정기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옷을 깨끗하게 입지 않으면 입장시키지 않을 정도로 구락부를 아끼고 사랑했다.

지금도 사람들이 모이거나 손님이 오면 아코디온을 연주하며 노래 부르기를 즐기는 교사 蒐?조이반씨(69)는‘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힘은 문화를 잊지 않은 데서 나왔다’며 어릴 적 기억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고국이 잘 살면 우리 문제도 해결”

“37년 강제 이주 후 논을 만들기 위해 도랑을 파야 했다. 연장이 모자라 막대기와 숟가락, 손으로 파기도 했다. 그 고생을 할 때 힘을 내라고 오케스트라가 옆에서 연주해 주었다. 41년 전쟁 시기에 다른 마을에 연주하러 갔다가 리투아니아에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던 실력 있는 유태인 지휘자를 만났다. 김광택 회장이 그를 초빙해 45년까지 여기서 오케스트라를 이끌도록 했다.”

고려인들을 격려하고 결속하는 역할을 담당한 볼셰비크 극단과 오케스트라는 다른 지역 순회 공연을 하면서 동포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빼어난 소질을 보인 배우는, 원동에서 건너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자리잡은 민족 극단 ‘조선극장’에 스카우트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조선 극장은 카자흐스탄뿐 아니라 고려인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놀부전> <심청전> <춘향전> 등을 공연했다.

원동에서 함께 온 고려인 학교가 폐쇄되자, 볼셰비크 콜호즈의 고려인들은 학교를 다시 세우고 2세 교육에 열의를 보였다. ‘배워야 인간질을 한다’는 강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학생이라 하더라도 모스크바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다. 스탈린이 사망한 53년까지 모든 고려인들이 거주 이전은 물론 여행의 자유마저 박탈당하는 유배지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젊은 모험가’들이 공민증을 위조해 모스크바의 대학에 입학했다가 신분이 발각되어 쫓겨오기 일쑤였지만, 잠자리를 얻지 못해 기차역을 전전하면서 기어코 졸업한 ‘독종’도 더러 있었다.

취학 제한뿐 아니라 국가기관 취업 봉쇄, 은행 대출 금지 등 유배된 죄인 취급을 받던 고려인들을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전쟁에 참여치 못하게 한 것이었다. 2차대전 참전은, 고려인들이 소련의 적성 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릴 절호의 기회였으나, 소련 당국은 이것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군인이 아니라 탄광·군수공장·북극권 삼림 벌채 등 후방의 노력 전선에 동원되어 추위와 기아, 강제 노력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벼농사의 천재’‘1백27개 민족 중 농사일을 가장 잘한다’는 칭찬을 들으며 60년 세월을 살아온 고려인들의 삶에 최근 들어 큰 변화가 일고 있다. 젊은이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에 정착하고, 농사꾼으로 사는 40대마저 대부분 러시아나 우크라이나로 나가 농사품을 판다. 농산물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우즈베크공화국에서 힘들여 농사를 짓는 것보다 뛰어난 농사 기술로 품을 파는 것이 훨씬 큰 이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농사일이 시작되는 3월께부터 추수하는 10월까지 볼셰비크를 비롯한 고려인 마을들에는 노인과 어린이만이 남아 집을 지킨다.

볼셰비크 콜호즈의 지발렌친씨(48)는 남아 있는 마을 사람 가운데 젊은 세대에 속한다. 10년째 지어온 고추 농사로 1년에 3천달러 수입을 올린다는 그는, 3남2녀를 모두 대처로 내보냈다. 아플 틈도 주지 않는 농사일을 자녀들에게는 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은 공동 묘지를 북망산이라 부른다. 북망산이 가장 붐비는 날은 한식이다. 설과 추석과 환갑 등 고려인들이 성대하게 지켜오는 명절과 풍습은 다른 민족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어른 앞에서 고개를 돌려 술을 마신다든가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등 고려인들만이 지니고 있는 일상적인 관습도 많다.

“후손들이 큰 걱정이다. 고려말도 못하고,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고국이 잘 살면 이 문제는 금방 해결된다. 한국과 북조선이 통일하고 힘을 키우면 여기에서 우리 위신도 서고, 후손들도 고국과 민족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볼셰비크 학교의 역사 교사였던 조이반씨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고국을 향해 갖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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