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예속된 북한의 고대사 연구
  • 李興煥 기자 ()
  • 승인 1995.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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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학자, 역사 인식·연구 방법 1백80도 달라…학문 토론 불가능
남북한의 역사 연구 방법과 과정은 이념이나 체제만큼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고대사도 예외는 아니다. 오사카 경제법과대학 학술회의 마지막 날, 한국 학자의 대표 자격으로 폐회식 인사말을 했던 金廷鶴 교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는 “남북한 학자들의 견해 차이가 예상보다 컸다. 통일 후에 이 일을 어떻게 할지 걱정스럽다. 역사를 인식하고 연구하는 방법이 서로 1백80도 다르다. 순수한 학문 분야에서만큼은 남과 북이 어느 정도 접근할 줄 알았는데, 토론 과정에서 보니까 남북한의 차이를 극복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북한 학자들을 앞에 두고 한 말이다. 학문적 토론을 나눌 수 없다는 말에 북한 학자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의 한 고고학자는 북한 학계의 정치적 성격을 이렇게 지적한다. “김일성-김정일 세습 체제에 북한 학자들도 동원되고 있다. 단군릉 발굴설도 그 일환이다. 북한 학자 중에는 고고학의 권위자도 있다. 뼈 얘기가 터무니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발표한 논문을 꼼꼼히 읽어보면 그런 실수를 할 인물이 전혀 아닌데도 논리 전개에서 허점투성이다. 세습제를 도와주려고 학자들도 총궐기한 마당에 지금 당장 반론을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학자로서는 사활이 걸린 이 문제에 대해 김정일 시대 이후에는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북한의 역사 연구, 정치에 예속

북한의 역사 연구의 특징은 연구자 개인이 아닌 집단 연구의 형태를 이룬다는 점이다. 즉 특정 고위층 인사 등 상부의 ‘교시’로 연구 과제가 정해지면, 연구 집단이 조직되고 각 개인 연구자는 일정한 분야를 분담하는 형태이다. 연구 계획과 토론, 집필 역시 집단으로 이루어진다. 완성 단계에 들어간 연구 과제는 또 한번의 집단 토론 단계를 거쳐 최종적인 견해로 결론을 맺는다. 북한 역사학자는 2~3년 전부터 집중적으로 투입한 고대 유물 발굴 작업도 ‘김일성 주석의 교시’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趙仁成 교수(경희대·사학)는 “북한의 고대사 연구는 70년대 이후 정치에 예속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렇다 할 만한 성과가 없다”고 지적한다. 李基東 교수(동국대·사학)는 “북한이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처음 발표했을 때 대부분의 한국 고대사 학자들은 새로운 고조선 자료가 나온 것이 아니라 집권층의 새로운 정치 노선이 시작된 것으로 파악했다”고 말한다.

북한 학계는 63년부터 65까지 3년 동안 중국의 요령·길림·흑룡강 등 동북 3성의 고대 유적을 중국과 공동 발굴한 적이 있다. 당시 공동 발굴에 참여했던 북한의 30~40대 학자들이 지금은 학계의 원로로 남아 있다. 이 공동 발굴에 참여했던 한 학자는 당시 작업도 김일성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밝혔다.

대박산 단군릉 발굴 작업의 초기 과정 또한 유적 연구 과정의 특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김일성의 단군조선 연구 교시가 떨어진 것은 92년 가을께다. 학자들은 이때부터 문헌에 나타난 단군 관련 장소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단군릉이라고 전해지는 대박산의 유적지를 파기 시작한 것은 93년 1월. 땅에 삽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혹한기였다. 아무리 엄동설한이라도 김일성의 교시가 떨어진 한 유적 발굴 작업을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사카 학술회의에 참석한 북한 학자들의 발표 형식과 내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관된 전체 내용을 각자가 일부분씩 맡아 발표하는 형식이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한 학자는 “저들은 사전에 입을 맞추고 나왔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모두가 개인 자격인데다가 고대사에 대한 의견도 조금씩 다르다. 물론 학자들의 개인 학설을 틀 안에 넣어 획일화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경우처럼 특정 주제를 놓고 특정 상대와 서로 토론하는 자리에는 어느 정도의 의견 조종이 필요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

한국, 신석기 시대 연구 미약

한국 고고학계는 신석기 시대 연구가 미약한 편이라고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고고학 연구학자들의 세대 간격도 이런 상황에 일조했다. 60대 후반 이상의 원로 학자들이 한 그룹을 이루고, 그 다음이 대부분 50대 학자들이다. 오사카 회의의 북한 단장인 사회과학원 金哲式 제1부원장은 “김원룡 선생이 작고한 뒤에 남한 학자들이 세대 교체가 된 것 아니냐”고 우리 학자들에게 묻기도 했다. 세대 간격은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고고학의 일반적인 편년은 신석기 시대를 기원전 5000~1000년까지로 잡는다. 고고학계의 한 학파를 형성했던 김원룡 박사가 주장했던 이런 견해를 일부에서는 보수적인 입장이라고 평한다. 신석기 연대가 이보다 앞서 있었다고 보는 ‘손보기 학설’은 흔히 진보적인 견해로 일컬어진다.

한국의 국사 교과서에 서술된 단군 항목은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고조선에 대해 서로 견해가 다른 학자들이 집필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의 영역·성격·연대 등이 개인 학설에 따라 혼재하는 양상이었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崔夢龍 교수(서울대·고고미술사학)는 “우리도 이제는 국익 차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고대사에서 남북한 간의 첨예한 대립이 예상된다. 저쪽은 사활을 걸고 있다. 쌀이 없어서 굶는 판국에 장군총보다 더 큰 규모로 국가 차원의 토목 공사(단군릉 개축)를 벌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라고 반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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