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부시 동갑내기 힘겨루기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3.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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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당선자가 의미심장한 말들을 연속 쏟아내며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노무현은 과연 미국을 향해 ‘노’라고 말하는 첫 대통령이 될 것인가.
"미국이 이래저래 말하면 어렵겠지만 한국민이 확고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 다 죽는 것보다는 어려운 게 낫다. 한국 경제에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굳은 결심을 해야 한다.”
2월13일, 노무현 당선자가 작심하고 한마디했다. 한국노총을 방문해 가진 비공개 간담회에서 참석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었지만, 내용을 따져보면 다분히 전략적이다. 연일 북한에 대한 공격 가능성을 흘리며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미국 부시 행정부에 대한 강한 불만을 직설적으로 토로한 것이다.





노당선자의 발언이 공개된 직후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참석한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한국의 새 대통령이 양국 관계 재검토와 조정을 요구해와 이를 수용했다. 비무장지대의 주한미군 병력을 이동하는 방안을 협의하겠다”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발언한 시기나 형식이 예사롭지 않아 노당선자의 발언에 대한 대응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50년을 이어온 한국과 미국의 동맹 관계가 질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동등한 처지에서 미국과 상호 협력 관계를 맺겠다는 노무현 당선자의 등장이 이런 상황을 촉발했다. ‘끊임없이 꿈을 가지고 도전해 왔고, 도전에 성공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노당선자가 미국을 상대로 또 하나의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도전이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 한반도의 운명은 전쟁 아니면 평화라는 양극단을 오갈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미국관 핵심은 ‘현실주의’와 ‘자존심’



노당선자는 지난 대선을 앞두고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대미 관계를 이렇게 풀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하고 싶다. 기분 나빠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좋지 않고, 사실이 기울어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또 기울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해서도 안되고, 우리가 역사 속에서 보아왔던 대로 현실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실용적으로 하나하나 풀어가는 게 필요하다. 그러나 마음 중심에 자존심은 있어야 한다.”



‘현실주의’와 ‘자존심’, 이 두 단어는 노당선자가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싸고 왜 미국과 갈등을 빚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코드이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또한 가장 미국적이기도 하다. 토머스 허버드 주한 미국대사가 “미국은 항상 국민이 선출한 정권을 상대방으로 인정하고 대화해 왔다”라고 말한 것에서 보듯, 미국 또한 무엇보다 ‘현실’을 중시하면서 유일 강국으로서 자존심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사실 노당선자는 미국을 좋아한다. 1월15일 용산에 있는 한·미연합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그는 리온 라포트 사령관에게 “미국 역사에 대해 부럽고 존경하는 마음이 있다”라고 말했다. 또 <노무현이 만난 링컨>이라는 책을 쓸 정도로 링컨으로 상징되는 미국식 합리주의와 이성주의를 깊이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공화당 강경파가 주도하는 현재의 미국은 노당선자의 머리 속에 입력되어 있는 이상적인 미국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데 몰두하는 부시 행정부는 전쟁을 방지하는 것을 남북 관계의 1차 목표로 삼고 있는 노당선자에게 ‘합리적이지 못한 세력의 집합체’로 여겨지고 있다.





부시 행정부 또한 노당선자를 껄끄럽게 보고 있다. 미국은 지난 대선에서 노당선자보다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랐다. 미국 공화당도 가입해 있는 IDU(International Democratic Union·국제중도우파정당연맹) 구성원인 한나라당은 대선 당시 ‘현정부의 대북 정책으로 손상된 한·미 동맹 관계를 지체 없이 회복해 우리의 안보 태세를 더욱 확고히 하겠다’는 공약을 내놓는 등 확실하게 ‘친미(親美)’를 표방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당선자가 등장했으니 부시 행정부가 어떤 충격을 받았을 것인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미국 국제전략문제센터(CSIS)의 국제 안보 프로그램 국장인 커트 캠벨은 1월6일 국제전략문제센터를 찾은 조웅규·김덕배 의원 등 한국 국회 대표단에게 “미국인들이 노후보가 당선한 데 놀라고 주위 측근들에 대한 정보가 없어 놀라고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통인 한나라당 박 진 의원은 “미국은 당황했다”라고 표현했다.



어쨌든 대선 직후 부시 행정부는 노당선자에게 유화 제스처를 보였다. 부시 대통령은 12월20일 노당선자에게 전화를 걸어 “취임 후 가급적 빨리, 편한 시기에 미국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고, 1월13일에는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특사로 파견했다. 노당선자의 대미 관계 자문에 응하고 있는 임병규 변호사는 “미국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이 아닌 당선자에게 특사를 보낸 전례가 없다”라고 말했다. 존 볼턴 국무부 군축·국제안보담당 차관, 제임스 모리아티 국가안전보장회의 아시아지역담당 수석국장, 칼 포드 국무부 정보조사담당 차관보, 리처드 하스 국무부 정책기획대사도 줄줄이 한국에 와 노당선자를 만났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노당선자에 대한 미국측의 불만과 의구심은 높아 가는 분위기이다. 미국 사정에 밝은 사람들은 몇 가지 이유를 들었다. 우선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 1월3일 임채정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 “부시 미국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각기 양보를 요구하는 조정안을 만들고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미국 고위 당국자는 이 발언을 접하고 “극단적으로 해로운 발언이었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한국이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중간자적인 태도를 취한 데 대한 서운함이었다. “균형적인 한·미 관계 재정립이 필요하다”(정대철 대미 특사) “한국의 젊은이들은 전쟁 시나리오보다는 북한이 핵을 갖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윤영관 인수위 통일외교안보분과 간사) 등의 발언도 미국을 불편하게 했다. “다른 것은 달라야 한다”라는 노당선자의 2월13일 발언은 이런 면에서 결정판이었다.





당선자 주변, 외교 전문가 거의 없어 문제



이처럼 여러 정황을 볼 때 노당선자측과 부시 행정부가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갈등이 실제 이상으로 확대된 데는 국내외 일부 언론에 책임이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미국 3대 방송사 가운데 하나인 CBS TV의 간판 시사 프로그램 <60분>이 ‘양키 고 홈’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한국의 반미 감정을 다룬 20분짜리 특집물을 내보낸 것이나, 국내의 일부 보수 언론이 마치 주한미군이 금방이라도 모두 철수할 것처럼 보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노당선자도 2월13일 “북한을 공격하면 안된다고 하니 미국 언론이 문제를 삼았는데, (이것을) 한국 언론이 뻥튀기를 하고 있다. 언론이 미국과 다르다고 하는데 안 다르면 결과적으로 전쟁을 감수하자는 것이냐”라며 언론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노당선자측에 미국 핵심 인사들을 상대해 일을 풀어갈 외교 역량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노당선자 자문교수단의 외교·통일 분야 핵심 인사는 문정인(연세대)·윤영관(서울대)·서동만(상지대) 교수와 이종석(세종연구소)·서주석(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이다. 이들 가운데 문정인·윤영관 교수가 나름으로 미국에 인맥을 갖고 있으나 외교적인 경험, 적극적인 자세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 정대철·유재건·김운용 의원과 조순승·김상우 전 의원, 임병규 변호사로 구성된 외교자문회의도 운영하고 있으나 실제 활동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어찌 보면 작은 부분이고, 노당선자와 미국이 갈등을 빚고 있는 원인은 좀더 큰 틀에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싶다. 민경우 통일연대 평화위원은 “노당선자의 외교 안보 구상의 핵심은 북한에 대한 대규모 경제 지원 및 남북 경제 협력과 동북아시아 경제 협력을 연계해 한국을 동북아시아 허브 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미국의 구도와 정면으로 배치한다”라고 주장한다.



“노무현 동북아 구상, 미국 구도와 정면 배치”



한나라당 윤여준 의원도 “한반도 남쪽에 어떤 성격의 정권이 들어서느냐는 것은 미국의 세계 전략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앞으로 미국은 ‘반미’를 내걸고 등장한 노무현 정권을 신뢰하지 않고 한반도 정책을 재조정하려고 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카터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낸 미국의 대표적인 전략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거대한 체스판>이라는 책에서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에서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이 통일 혹은 중국의 영향권으로 편입되는 등 ‘탈미(脫美)’ 입장으로 가면 동북아에서 미국과 일본의 지위 역시 크게 변화할 것이다’라고 우려한 것을 예사롭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노당선자의 외교 안보 진영이 짜이면 다시 한번 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노당선자가 서두르지 말고 한·미 동맹 관계와 대북 전략과 관련한 위기 관리 전략을 세워 차분하게 상황에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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