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길었던 ‘운명의 밤’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5.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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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담지 못한 ‘그때 그 사람들’의 10·26 행적

 
1979년 10월26일 밤 7시40분, 서울 종로구 궁정동 50번지에서 총성이 울렸다. ‘뜻밖의’ 총성으로 12명의 운명이 갈렸다. 6명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6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동안 10·26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주인공이었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은 역사의 조연으로 그쳤던 김재규씨의 부하들에게 카메라를 가져간다. 하지만 영화는 2% 부족해 보인다. 영화가 담지 못했던 <그때 그 사람들>의 하루를 재판 기록을 통해 재구성해 보았다.

■ 10월26일 오후 5시. 광화문

박흥주 대령(39)은 광화문 에스콰이어 매장에 들러 구두를 샀다. 중앙정보부 김재규 부장(54)의 수행비서인 그는 왼발에 무좀이 심한 편이다. 하지만 부마 사태에 매달리다 보니 구두를 살 틈이 나지 않았다. 이날은 궁정동에서 ‘대행사’가 있어 시간이 났다. 박대령은 새 구두를 신고, 헌 구두를 경호차 트렁크에 넣은 다음 궁정동으로 돌아갔다.

궁정동은 중정이 관리하는 극비 장소다. 이곳을 관리하는 의전과장은 중정부장의 심복이 맡는다. 의전과장은 박선호씨(45). 김재규 부장과 사제지간이다. 김재규 부장이 군복을 잠시 벗고 대륜중학교 체육교사로 있을 때, 박선호의 담임이었다. 1978년 개인 사업을 하던 박씨를 의전과장에 앉힌 이도 김재규였다.

오후 4시25분 박선호 과장은 친구인 청와대정인형 경호처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정부장이 참여하는 대행사가 열린다.” 그는 곧바로 프라자호텔로 향했다. 영화에서 배우 조은지가 맡은 ‘쿨한 여자’ 신재순씨(당시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3년)를 프라자호텔에서 태웠고, 내자호텔에 들러 가수 김윤아가 역을 맡은 심수봉씨를 태웠다.

■ 오후 6시5분. 궁정동 정문

‘할아버지’가 궁정동에 도착했다. 차지철 경호실장을 비롯해 정인형 경호처장, 안재송 경호부처장, 청와대 경호원 김용태·김용섭·박상범 등이 함께 왔다. 중정 경비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경비원 대기실에서는 유성옥(36)·김태원(32)·이기주(31) 씨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 무전으로 ‘할아버지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유성옥씨는 박선호 의전과장의 운전기사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이 날도 오전 8시에 출근했다. 오전에는 이문동 중정 본부에 들러, 궁정동으로 새로 배치된 운전기사를 데리고 왔다.
유씨는 차량을 정비하다가, 오후 3시 대행사를 준비하라는 통보를 받고, 6만원을 받아들고 동대문 시장에 가서 장을 보았다. 장을 보면서도 그는 흥이 났다. 10여 일 뒤면 새신랑이 되기 때문이다. 네 살과 두 살짜리 두 아들을 낳고도 돈이 없어 부인(26)에게 면사포를 씌워주지 못했다. 11월13일이면, 서울신문사 강당에서 부인에게 면사포를 씌워주게 되었다. 그는 일찌감치 동료들에게 청첩장을 돌렸다.

김태원씨는 전날 야간 근무를 했기 때문에 이 날은 비번이었다. 오전에 처가에 가서 점심까지 얻어먹고 집에 돌아왔다. 영화에서는 집에서 호출 전화를 받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가 은행 가는 길에 궁정동에 전화를 걸었다. 궁정동 경비원은 비번일 때도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에 전화를 해야 한다. 대통령이 회포를 푸는 날이 일정치 않기 때문이다. 전화를 하자 대행사가 잡혔다며 서둘러 출근하라고 했다. 오후 5시, 그는 은행에 가다 말고 택시를 타고 궁정동으로 향했다.

이기주씨의 일상 역시 평범했다. 중정 경비원 30명 가운데 그는 유일한 해병대 출신이다. 해병대 대령 출신인 박선호 과장은 그를 특별히 신임했다. 이날도 이씨는 오전 7시에 출근해, 비서실을 정리하고 박선호 과장 방을 따로 청소했다. 오후에는 오랜만에 이발을 했다.

■ 저녁 7시40분. 궁정동 만찬장

이들의 평범한 일상은 저녁 7시 김재규 부장이 만찬장을 빠져나오면서 깨졌다. 김부장은 자기 집무실로 올라가 권총을 양복 바지에 넣었다. 그의 바지는 라이터 주머니가 유난히 크다. 김재규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라이터 주머니를 일부러 크게 만들고, 그곳에 권총을 넣고 다녔다. 김부장은 궁정동 정원에서 박선호·박흥주 씨를 불렀다.

“나라가 잘못되면 자네들이나 나나 죽는 거야. 오늘 저녁에 해치우겠다.” 박선호 과장이 물었다. “각하까지 포함됩니까?” 박선호 과장은 청와대 경호원이 4명인데도 7명이라고 불려 말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피하고 싶었다. 박선호씨는 30분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김부장은 망설이는 박흥주 대령을 향해 주먹을 쥐고 “민주주의를 위하여”라고 힘주어 말했다. 영화 장면 그대로다.

김부장이 심복을 차출했듯, 박선호 과장도 자기 심복인 이기주·유성옥 씨에게 무장하라고 지시했다. 이씨는 M15 기관총을, 유씨는 리볼버 권총을 차고 박과장을 따랐다. 박과장은 이씨의 총이 너무 크다면서 권총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영화에서는 ‘운짱’(운전기사)인 유성옥씨가 도망가는 것으로 나오는데, 사실은 이기주씨가 도망칠 생각을 했다. 재판에서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너무 겁이 났다고 밝혔다.

박흥주 대령과 함께 이기주·유성옥 씨는 청와대 경호원 김용태·김용섭·박상범 씨가 있는 주방을 맡았다. 영화와 달리 이들은 제미니 승용차를 타고 주방 옆에서 대기했다. 박선호 과장은 정인형·안재송 씨가 있는 대기실을 맡았다. 해병대 동기로서 친구였던 정인형 씨 때문이었다.

영화에서 심수봉 역을 맡은 김윤아는 엔카를 부르지만, 재판 기록에 따르면, 심수봉씨는 자신의 히트곡인 <그 때 그 사람>을 불렀다. 앙코르를 받자 <눈물 젖은 두만강 designtimesp=29083>을 불렀고, 다음 순서로 차지철 경호실장을 지목했다. 차실장은 <도라지>와 <나그네 설움>을 불렀다. 차실장 다음 순서는 신재순씨. 그녀는 심수봉씨에게 <사랑해 당신을> 반주를 부탁했다. 심씨가 기타로 반주를 시작하고, 신재순씨가 막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 김재규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이때가 7시40분이었다.

대기실에 있던 박선호 과장은 첫 총성이 나자 총을 먼저 뽑았다. 그는 안재송씨에게 총을 겨누고, 정인형씨에게는 “같이 살자”고 소리쳤다. 운명을 가르는 15초.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인 안재송씨가 총을 뽑았다. 박선호 과장은 방아쇠를 당겼다. 뒷걸음치며 쏜 총에 정인형씨마저 쓰러졌다. 제미니 승용차에 타고 있던 이기주·유성옥·박흥주 씨는 이때 차에서 뛰어내려 주방으로 뛰었다.

■ 저녁 8시5분. 육본 벙커

영화 후반부가 그렇듯, 아무것도 모른 채 김재규 부장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던 조역들은 주인공이 체포되자 모두 우왕좌왕했다. 김재규 부장 자신도 갈피를 못 잡기는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확인 사살한 다음, 김부장은 와이셔츠 차림에 맨발로 정승화 총장과 김정섭 차장보와 함께 차에 올랐다. 앞좌석에는 김부장의 그림자 박흥주 대령이 탔다. 궁정동을 빠져나온 차량은 삼일고가도로를 탔다. 중정 남산분청으로 향한 것이다. 그러나 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지하 벙커로 가자고 하자, 김재규 부장은 “부(중앙정보부)? 육본?” 하며 망설였다. 박흥주 대령이 육본으로 가자고 하자, 차는 방향을 틀었다. 스스로 민주 혁명이라 일컬었던 김재규의 거사가 실패로 유턴한 순간이었다.

맨발로 육본에 도착한 김재규 부장은 박흥주 대령에게 윗옷과 구두를 달라고 했다. 박대령은 그날 오후에 산 새 구두를 벗어 주었다. 대신 그는 운전병의 신발을 뺏어 신었다.

한편, 궁정동에 남아 있던 박선호 과장은 영화에서와 달리 김부장으로부터 어떤 지시도 받지 못했다. 정문으로 향했지만 김부장을 태운 차량이 떠난 뒤였다. 다시 식당으로 되돌아갔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시신도 빠져나간 뒤였다. 김계원 비서실장이 경비원인 유성옥·서영준 씨를 채근해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재빨리 옮긴 것이다.

박선호 과장은 경비실에 있던 김태원씨를 데리고 현장으로 갔다. 그리고 이기주씨에게 “깨끗이 정리 됐어?”라고 물었다. 이씨는 이를 확인 사살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김태원씨는 M16으로 안재송씨에게 1발, 정인형씨에게 2발, 차지철 실장에게 2발을 쏘았다. 운이 좋게도 주방에 있던 박상범 청와대 경호원은 확인 사살을 피했다. 그는 4발을 맞고도 살아 남았다. 그는 지난 김영삼 정권 때 경호실장을 지냈다.

■ 10월27일 0시40분. 국방부

육본 벙커에서 박흥주 대령은 경호조에 무전을 쳤다. 그리고 만일에 대비해 경호조를 육본에 오게 했다. 경호조가 도착하자 박흥주 대령은 트렁크에서 헌 신발을 꺼내 신었다. 그는 김재규 부장과 함께 국무회의가 열리는 국방부로 향했다.

그러나 0시40분, 정승화 총장의 지시로 김재규 부장은 보안사에 전격 체포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보안사 서빙고동에 끌려간 김재규 부장은 고문을 당했다. 그는 항소이유서에 ‘새벽에 연행되자마자 수사관들이 닥치는 대로 구타했고, 심지어 전화선을 손가락에 감고 전기 고문까지 했다’고 밝혔다.

국방부에 남아 있던 박흥주 대령도 무장 해제를 당했다. 경호조들도 마찬가지였다. 운명을 직감한 박대령은 부장 차를 타고 국방부를 빠져나와 새벽에 중정 남산분청으로 향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육본으로 들어오라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메시지였다. 그는 응하지 않았다. 새벽 4시, 행당동 달동네에 있는 집을 찾아 부인을 만났다. 그러나 부인의 얼굴만 보고 이문동 중정 본청으로 차를 몰았다. 그는 중정 1차장실에서 차를 마시다 보안사 요원에게 체포되었다.

박선호 과장도 마지막 순간 가족을 찾았다. 대방동 집에 들러 부인과 여섯 살짜리 늦둥이 아들을 태우고 방배동에 있는 처가로 향했다. 그리고 아내와 장모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자살하겠다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내는 만류했다. 그는 제 발로 남산분청을 찾아갔고 기다리던 보안사 요원들에게 연행되었다.

이기주·김태원 씨는 남아서 끝까지 뒷정리를 했다. 이씨는 10월27일 아침 7시 경비원 유석술씨에게 김재규 부장이 사용한 총과 탄피 등을 땅에 묻으라고 했다. 부탁을 들어준 유석술씨는 증거인멸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경비원 대기실에 있다가 연행되었다.

국군 서울지구병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시신을 지키던 유성옥·서영준 씨는 병원에서 보안사 요원들에게 붙잡혔다.

영문도 모른 채 오로지 윗사람의 지시를 따라야 했던 10·26사건의 조역들, 그들의 긴 하루는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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