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개 지역 8천여 명, 억울한 떼죽음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9.11.0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25 양민학살 사건 전모 추적/42개 지역 8천여 명 희생… 진상 규명·보상 시급
민족 분단과 전쟁의 비극이 남긴 상처 하나가 50년 만에 치유되는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한국전쟁 와중에 피난길에 오른 양민을 미군이 집단 학살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해 한·미 양국 정부가 합동으로 진상 규명과 보상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노근리 사건을 계기로 언론은 그동안 묻혀 있던 전국 각지의 유사한 양민 학살 사건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1차적인 관심 대상은 주로 미군이 저지른 양민 학살 사건이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이 남긴 민족사의 상처는 미군 관련 학살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8·15 광복과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일부 국군·경찰·우익 단체’도 오판과 실수로 비무장 민간인을 무차별 살상했다. 그 규모와 피해 범위는 전국에 걸친 광범한 것이었지만, 그동안 시대 정신이 되다시피 했던 ‘반공 의식 고취’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논의가 철저히 금기시되어 왔다. 북한과 대치하는 현실에서 북측이 군·경을 비방하는 데 악용할 소지가 있다는 점도 그 상처를 외면하게 만든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다행히 90년대 들어 분단을 극복하려고 전향적인 노력이 이어져 왔고,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화해와 평화 정착 노력이 더욱 진전되고 있다. 전쟁 후 50년 가까이 남북한 사회를 획일적으로 지배해 오던 서로에 대한 증오심은 차츰 동포 의식 고취 쪽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또 우리 군대와 경찰 역시 과거의 잘못된 관행과 부끄러운 모습을 시정해 국민의 군대, 국민의 경찰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쪽과 화해·평화를 도모하는 일 못지 않게 내부의 곪은 상처가 어떻게 방치되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것도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우군이던 미군이 저지른 양민 학살에 대해서도 뒤늦게나마 진상 규명과 피해 보상에 나서는 상황에서, 일부 국군이 자국민을 상대로 벌인 끔찍한 양민 학살에 대해서도 서둘러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정부와 국민의 도리일 것이다. 더구나 전국 각지의 양민 학살 피해 유족들은 90년대 들어 국회·정부·언론을 상대로 끊임없이 환부를 드러내 보이며 치료를 호소하고 있다. 이제 억울하게 쓰러져간 영혼들을 진혼해야 하고, 그 유족들의 가슴에 맺힌 한도 달래 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여기에 소개하는 양민 학살 사례들은 바로 그런 ‘억울한 죽음’에 대한 조사 기록이다. 이 기록은 지난 10년 동안 <시사저널>이 추적한 내용과 제 4대 국회(60년 4·19혁명 직후) 진상조사반이 조사한 국가 공식 기록을 토대로 했다. 당시 국회는 자유·민주 양당과 무소속 의원으로 구성된 ‘(아군이 저지른) 양민 학살 진상조사반’을 전국 각지의 사건 현장에 파견해 조사를 벌였다. 겨우 11일이라는 짧은 현장 조사만으로도 국회 조사반은 무려 42개 지역에서 8천여 명에 달하는 끔찍한 양민 학살극이 벌어졌음을 확인했다. 당시 국회는 이 조사를 토대로 ‘학살 진상 규명과 피해 보상 요구에 대해서는 새로 들어설 민주당 정부가 군·경·검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해 해결하도록 한다’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러나 뒤이어 발생한 5·16 쿠데타로 이 결의는 물거품이 된 채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지난 10년간 <시사저널>을 비롯한 여러 매체의 끈질긴 양민 집단 학살 사건(산청·함양·거창·문경·함평) 추적 보도와 각 지역 유족회의 청원에 대해 정부가 모르쇠로 일관했던 것만은 아니다. 현재 행정자치부는 96년 국회에서 제정된 특별법에 의거해 거창·산청·함양 세 곳의 양민 학살에 국한해 위령 사업을 펴고 있기는 하다(62쪽 상자 기사 참조). 그러나 유족회가 결성되어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요구하는 다른 지역 양민 학살 사건은, 명백한 증거가 속속 드러나는데도 아직껏 해결할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시사저널>은 당시의 국회 기록을 토대로 하여 생존 유족과 목격자·관련자의 증언 및 미군의 공식 기록을 보강해 그동안 은폐되어 온 양민 학살 사건들을 종합해 정리한다.
■ 문경 양민 학살 사건

49년 12월24일 오후 1시께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 부락 주민 86명이 국군 정찰대에 집단 학살된 사건이다. 가해 부대는 당시 문경·점촌 지역에 주둔하던 국군 제3사단 25연대 3대대 7중대 2소대 및 3소대 76명이었다. 학살 현장 책임자는 3소대장 유진규 소위와 김점동 하사, 2소대를 지휘한 안택효 중사였다. 당시 민간인 남자 43명, 여자 43명(젖먹이 3명, 초등학생 9명 포함)이 희생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현지 부대 인솔자의 오판과 상부 명령 무시였다. 즉 순찰만 돌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군부대가 들러도 환영해 주지 않는 마을 분위기에 분개해 주민들을 ‘공비 협조자’로 단정하고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사건 후 7중대장과 이의승 문경경찰서장이 공모해 상부에 ‘공비 소행’으로 허위 보고했지만 서울에서 내려간 경찰 수사반과 당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이 각기 진상을 조사해 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임을 확인하는 기록을 남겼다. 사건의 파문을 막기 위해 이듬해 1월7일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현지에 다녀갔으며, 이후 이 사건은 공비들이 저지른 것으로 공식 기록에 남아 있다.

90년대 들어 유족회를 결성한 희생자 유족들은 정부에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당시 끔찍했던 사건 현장은 지금도 고스란히 보존된 상태이다. 사건 현장에 유골 50여 구가 아직까지 방치된 채 발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군 당국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명했지만, 최근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당시 한국 경찰이 작성한 조사보고서와 미군이 자체 조사한 진상 기록(군사 기밀 자료)이 발굴되었다. 당시 문경 군수(채문식 전 국회의장)와 부대 인솔자들 및 현장 생존자들도 2소대와 3소대가 저지른 만행임을 증언하고 있다. 유족회(회장 채의진)는 “명백한 증거가 나왔는데도 국민의 정부가 해결해 주지 않으면 헌법 소원을 제기하고 국제 사회에 호소하겠다”라고 배수진을 치고 있다.
■ 산청·함양·거창 양민 학살 사건

한국전쟁 와중인 51년 2월8일부터 11일까지 경남 산청·함양·거창 지역 주민 1천4백24명이 집단 학살된 사건. 가해 부대는 당시 이 지역에 공비토벌대로 주둔한 국군 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 3대대(대대장 한동석)였다.

이 사건은 처음에는 거창 양민 학살로만 알려졌다. 3대대가 마지막 이틀( 2월10∼11일) 동안 저지른 거창군 신원면 학살 사건만이 당시 임시 수도 부산에 있던 국회에 제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사저널>과 유족들의 추적(93년)에 따라 3대대 병력이 산청군 금서면에서부터 거창군 신원면까지 양민을 집단 학살했다는 증거가 나옴으로써 이 사건은 산청·함양·거창 양민 학살로 기록되게 되었다. 산청·함양 피학살자는 7백5명, 거창 피학살자는 7백19명이었다. 당시 3대대는 지리산 지구 공비 토벌 작전을 벌였는데, 공비가 깊은 산속으로 은거하자 3개 군 자연 부락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뒤 이를 공비 소탕이라고 보고했다.

역대 정부에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요구하던 유족들의 청원이 95년에야 받아들여져 국회에서 ‘거창 사건 등 관련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거창사건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전국의 양민 학살 중 유일하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 사건이다.

■ 함평 양민 학살 사건

역시 한국전쟁 때 영·호남 지역 공비토벌대로 주둔한 11사단이 자행한 양민 학살이다. 50년 12월6일과 7일, 51년 1월12일 전남 함평군 월야면·해보면·나산면 주민 5백24명이 집단 학살되었다. 주민을 학살한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 인솔 책임자는 권준옥 대위였다. 함평 학살 사건은 60년 5월23일 민주당 김의택 의원을 조사반장으로 국회의원 11명이 현장을 찾아 진상 조사를 한 뒤 국회 본회의에 보고하고 ‘해결해야 할 심각한 양민 학살’로 규정했다.

구체적인 내역을 살펴보면, 50년 12월6일 월야면 정산리 동촌 부락 남녀노소 60명이 마을 앞 논두렁에서 집단 학살되었고, 다음날에는 월야면 정산리 6개 부락 주민 3백명이 속칭 남산뫼에서 학살되었다. 또 51년 1월11일에는 해보면 상곡리 모평 부락 주민 1백28명과 나산면 우치리 주민 46명이 집단 학살되었다. 당시 5중대는 함평군 불갑산에 은거한 공비를 소탕한다는 목적으로 출동했다가 양민 학살을 저지른 후 이를 공비 소탕이라고 보고하고, 농가에서 수거한 낫과 호미 등 농기구를 노획물로 보고했다. 아군이던 방위군은 물론 공비 토벌 작전을 수행하던 경찰 가족까지 무차별 학살했다.

5중대의 행위는 군 당국의 작전 명령까지 어긴 것이었다. 당시 하달된 작전 명령은 ‘양민은 부락에서 평지로 소개하고, 농작물은 공동 작업으로 수확케 하며 아군의 통신망과 보급로를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5중대는 양민을 학살하고, 농작물은 전부 불태웠다.

당시 헌병사령관을 지내고 훗날 육군참모총장까지 역임한 최경록씨는 공비토벌대였던 11사단의 일부 예하 병력이 집단 양민 학살(산청·함양·거창·함평)을 저지르게 된 배경에 대해 사단장의 작전 지휘 능력과 품성을 연결지어 회고했다. “11사단은 무리하게 전과를 올리는 데 급급해 여자를 겁탈하고 소를 다 잡아 먹고 양민을 죽인 뒤 상부에 공비를 소탕했다고 보고했다. 그때 최덕신의 11사단에는 이등병이 없었다. 전원이 1계급 특진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11사단장 최덕신은 훗날 월북했으며, 86년 북한에서 사망해 평양시 교외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함평 사건 유족들은 93년 유족회(대표 정진재)를 결성해 해마다 합동 위령제를 지내고, 정부에 사건 진상 규명 및 명예 회복을 요구하고 있다. 함평군도 양민 학살 조사 전담 부서를 두고 4년여 동안 조사한 끝에 당시 5중대원들의 양심 선언을 끌어냈고, 월야 지서장과 선무공작 대장 등으로부터 양민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받아 모든 기록과 증거를 책자로 엮어냈다. 이를 토대로 국회가 제정한 ‘거창 사건 특별법’에 함평 사건도 포함시키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에 앞서 유족회와 함평군은 군 예산과 전남도 도비에서 각각 1억원씩을 책정해 위령탑 건립 부지를 마련하고 있다.

■ 나주 동창 양민 학살 사건

함평 양민 학살을 저지른 바로 그 부대(5중대)가 50년 1월20일 나주군 세지면으로 이동해 면소재지인 동창 마을 주민 96명을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5중대는 이 부락 주민들이 공비에게 협조했다는 명목으로 만봉천이 흐르는 동창교 밑 자갈밭에 주민을 집결시킨 뒤 노인과 어린이를 분리하고 남은 주민 96명 전원을 학살했다. 이어서 들판에서 일하던 부락 주민 40명도 인근 산속에 배치된 5중대원 백여 명이 집중 사격을 퍼부어 사살했다. 이후 이 부락 주민과 후손 들은 연좌제에 묶여 온갖 불이익과 고통을 받아오다 함평 사건 진상 규명 작업이 벌어지자 함께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나주시 의회가 정부에 나주 양민 학살 상처를 치유해 달라고 건의했으며, 사건 진상을 파악한 이 지역 출신 정호선 의원과 이상수·박찬주 의원(이상 국민회의)은 지난 3월 국회에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 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

50년 9·28 서울 수복 직후 경기도 고양군(현재 고양시)에서 엄청난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 학살은 수복 이후 조직된 우익 단체 치안대와 경찰에 의해 저질러졌다. 당시 학살의 명분은 인민군 점령 기간에 부역했던 사람들을 색출해 처단한다는 것이었는데, 대부분 그 가족들이 끌려가 몰살되었다. 학살 장소는 고양시 탄현동 고봉산에 있는 폐금광 금정굴이었다. 고양 경찰서장과 치안대장의 지시에 따라 학살이 자행되었는데, 피해 유족들은 천여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당시 경찰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양민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양경찰서장을 곧바로 직위 해제했다. 93년 결성된 유족회(대표 서병규)와 고양시민회 등 이 지역 시민단체와 시의회가 유골 발굴 작업을 벌이는 한편 국회에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고 해마다 합동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95년에는 이 지역 시민단체들이 1차로 유골을 발굴해 서울대 법의학교실에 의뢰한 결과, 여자와 어린이 유골이 최소한 1백53구는 넘는다는 회신을 받았다. 현재 이 사건 역시 행정자치부에 접수되어 있으나, 행정자치부는 이념 갈등의 산물이므로 일방적으로 처리하기가 어렵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 국민보도연맹(보련) 학살 사건

6·25 발발 직후인 50년 6월28일∼8월31일 수원 이남 지역에서 약 30만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들이 보련원이라는 이유로 퇴각하던 경찰과 우익단체에 학살된 사건이다. 보련은 49년 4월5일 결성된 전향자 조직을 일컫는다. 당시 유명한 사상 검사이던 오재도 검사(현재 변호사)가 만든 보련에 가입한 이들은 전국적으로 50만명을 웃돌았다. 오변호사는 보련 결성과 학살이 자행된 경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보련은 세계 사상사에 유례가 없는 성과로 외국에서도 조사해 갈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서 보련원들이 적에게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인해 경기도 이남에서 학살이 벌어졌다.” 오씨는 한국전쟁 개전 초기 서울에서 미처 피난 가지 못한 군경과 가족이 의외로 많이 살아 남은 데는 보련원들의 도움이 컸다면서, 수원 이남에서 무차별 학살한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이북에서도 반동으로 규정된 보련원은 오히려 인민군이 숙청할 대상이었는데도 남한쪽 군경이 심사도 하지 않고 무조건 집단 학살했다는 것이다. 서울과 경기 북부의 보련원만 학살을 모면했을 뿐 전국 각지에서는 약 30만에 달하는 보련원들이 영문도 모른 채 불려가 학살당했다. 30만이라는 숫자는 4·19 직후 전국 각지의 유족들이 국회에 낸 청원 내용에 들어 있다. 오재도씨는 “이제 정부가 보련 가입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공식 확인해 범국가 차원에서 위령제를 올릴 때가 되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 그밖의 양민 학살 사건

6·25 개전 초기에 대구형무소와 부산형무소에서는 기결수와 미결수를 포함해 수용자 전원이 집단 학살당했다. 이같은 사실은 제 4대 국회 조사단(윤용구·주병환·임차주 의원)이 부산과 대구 형무소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통해 밝혀졌다. 대구형무소에서는 1천4백2명이 학살되었고 부산형무소에서는 4천8백32명이 학살당했다. 대구형무소에서 학살된 이들의 시신은 경산군 경산면 평산동 뒷산 코발트광산 지하 갱에 지금까지 방치되어 있다. 그밖에도 제4대 국회 보고서에는 한국전쟁 당시 전국 각지에서 양민 학살이 벌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1일 간의 짧은 국회 조사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난 피학살 민간인만도 경남 3천85명, 경북 2천2백명, 전남 6백명, 전북 1천28명, 제주도 1천8백78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당시 조사반은 특별 입법으로 가칭 ‘양민 학살 사건 처리 특별 조치법’을 제정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보고서를 마무리지었다.

정부, 상처 치유에 적극 나서야

물론 긴박한 전쟁에 학살과 파괴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고, 쌍방 간에 보복의 악순환을 불렀을 수도 있다. 결국 민족 전체의 불행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다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국민적 교훈을 얻기 위해서라도 은폐되고 외면되어온 양민 학살 진실은 기록되어야 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작업도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거창사건특별법으로 첫 단추를 끼운 상처 치유 작업에 국민의 정부는 더 적극 나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뿔뿔이 흩어지고 체념한 채 피맺힌 가슴을 쓰다듬고 사는 피해 유족에게도 국가적 차원에서 진혼의 통과 의례를 거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작고하기 전에 취재 기자와 만난 한국전쟁 당시 경찰 총수 박병배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 평화가 깃들고 국민이 화합하려면 국가와 전국민 차원에서 커다란 진혼제를 한번은 올려야 할 것이다. 지금 나라 구석구석 중천에는 건국과 한국전쟁 시기에 억울하게 죽은 수백만 민간인의 원혼이 구천에 떠돌고 있어서 나라가 잠시도 평온하지 않은 면도 있다고 본다. 새로운 세기로 넘어가기 전에 나라의 앞날과 후손을 위해서 이들을 위령하는 대대적인 진혼 행사를 가져야 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