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불행해 나는 행복하다"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3.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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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수사로 울고 웄는 정치인들/이인제,김용학,허태열, 입이 귀에 걸려
자민련 이인제 의원의 사무실에는 최근 들어 지지자들의 격려성 전화가 부쩍 많아졌다. 이의원이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는 코빼기도 안 비치던 사람들이 요즘에는 의원회관 문턱이 닳도록 이의원 방을 찾고 있다. 다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안희정씨가 구속된 이후에 생긴 현상이다.

초반 상황은 이의원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갔다. 이의원에게는 ‘습관적인 경선 불복자’ ‘대표 철새’라는 부정적인 수식어가 붙은 데다, 자민련 김종필 총재하고도 삐걱거리면서 심지어 무소속으로 출마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2003년 12월14일 안씨가 구속되면서 상황은 단번에 반전되었다. 총선 직전까지 진행될 측근비리 특검에다 재판 일정까지 감안하면 안씨의 출마 자체가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을 타고 이의원은 김종필 총재와의 관계 개선까지 이끌어냈다. 그 결과 2003년 12월23일 열린 이의원의 지구당 개편대회는 김총재를 비롯해 자민련 지도부가 대거 참석하는 대흥행을 이루었다.

이처럼 노대통령 측근들이 검찰의 전방위 수사로 상처를 입거나 낙마하면서, 이들의 도전에 내심 부담감을 가지던 현역 의원들은 그야말로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썬앤문그룹으로부터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고, 또 특검이 예정되어 있는 이광재 전 국정상황실장이 출마를 준비하던 강원 영월·평창의 김용학 의원(한나라당)이나, SK그룹으로부터 1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밭갈이를 하던 부산 북·강서 을의 허태열 의원(한나라당)이 대표적이다.

양경자·송영진 등 의원 10여 명 ‘비명’

특히 허의원의 경우 현직 대통령을 유일하게 이겼던 국회의원이라는 점에서 열린우리당측이 반드시 이겨야 할 지역구로 점찍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허의원도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을 맡아 대여 공격수로 앞장서는 등 알게 모르게 위기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최도술 전 비서관에 이어 역시 이 지역에 출마가 거론되던 신상우 전 의원마저 썬앤문 문병욱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자 허의원은 한시름 더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노대통령의 한 측근은 “여우 피하려다 오히려 호랑이를 만날 수도 있다”라고 일침을 가한다. 이 지역구들은 워낙 상징성이 강해 열린우리당 쪽이 호락호락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에 반해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원은 한나라당 도전자가 수사선상에 오르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더 입지가 좋아진 경우다. 서울 도봉 갑이 지역구인 김의원에게는 한나라당 양경자 위원장이 가장 부담스런 상대다. 전국구 의원 출신인 양위원장은, 15대와 16대 총선에서 연속 김의원에게 지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지역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찰의 노대통령 측근비리 수사 과정에서 양위원장이 썬앤문그룹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양위원장은 2003년 12월22일 최병렬 대표에게 서한을 보내 “대선 3일을 앞두고 김성래 썬앤문 부회장으로부터 천만원을 받아 자동차를 바꿨다. 김부회장이 구속된 뒤 자녀들이 고생한다 싶어 지난 달 초 돈을 갚았다”라고 고백했다.

이처럼 강력한 도전자가 상처를 입어 현역 의원들이 좋아라 하는 경우가 있다면, 반대로 막강 현역들이 치명상을 입어 도전자들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진 지역구도 10여 곳에 이른다. 현재 각종 비리 혐의로 국회에 체포동의안이 계류된 의원은 한나라당 박명환(서울 마포 갑)·박주천(서울 마포 을)·박재욱(경북 경산·청도) 의원과 민주당 박주선(전남 보성·화순)·이훈평(서울 관악 갑) 의원, 열린우리당 정대철 의원(서울 중구)이다.

최돈웅·박명환 지역구에 공천 희망자 몰려

여기에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강원 강릉)과 김영일 의원(경남 김해)은 불법 대선 자금 수백억원을 모금하고 관리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고, 한나라당 이양희 의원(대전 동구)은 한 기업으로부터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민주당 설 훈 의원(서울 도봉 을)은 이회창씨 20만 달러 수수설 발언과 관련해 현재 재판이 진행중이며, 민주당 김홍일 의원(전남 목포)도 나라종금 안상태 전 사장에게서 1억5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상태다. 또 열린우리당 천용택(전남 강진·완도)·송영진(충남 당진) 의원은 각각 군납 비리와 미군 기지에서 도박을 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으며, 한나라당 김윤식 의원(경기 용인 을)은 2003년 12월26일 선거법 위반 혐의로 벌금 천만원이 확정되어 아예 의원 직을 잃었다.
이렇듯 현역 의원의 입지가 흔들리는 지역구는 당 안팎에서 도전자가 많이 나온다는 공통된 현상을 보인다. 박명환 의원이 4선 고지를 바라보고 있는 서울 마포 갑의 경우, 각 당에서 공천을 희망하는 사람만 10명이 넘는다.

민주당에서는 최근 김중권 전 대표를 이 지역에 긴급 차출했다. 국민의정부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과 민주당 대표를 지낸 김씨는 2000년 총선 때는 고향인 경북 봉화·울진 지역에 출마했다가 19표 차로 석패했다. 12월26일 마포 갑 조직책으로 임명된 그는 “고향을 떠나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중앙당이 수도권 총선 전략 차원에서 마포 갑을 맡아달라고 두 달 전부터 부탁해와 장고 끝에 지역구를 옮기기로 결심했다”라고 말했다. 승부는 결국 수도권에서 판가름 난다는 민주당 지도부의 ‘수도권 중진 배치 전략’에 따른 셈이지만, 이 지역 현역 의원이 궁지에 몰려 있다는 점도 계산에 넣은 듯하다.

강원도 강릉의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강릉은 지금까지 최돈웅 의원의 철옹성처럼 여겨졌다. 최의원은 선거법 위반 혐의로 당선 무효가 확실해지자 2001년 9월 의원 직을 사퇴하고 그 다음달 치러진 10·25 보궐선거에 출마하는 편법을 감행했다. 여론이 그렇게 나빴는데도 불구하고 최의원은 이 지역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번 ‘차떼기’ 정국에서는 천하무적 최의원도 만회하기 힘든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게다가 가장 강력한 도전자로 꼽히던 심기섭 강릉시장마저 출마를 접었다. 이 때문인지 한나라당 안에서부터 공천 희망자가 줄을 잇더니, 최근에는 12월28일 개각에서 교체된 최종찬 전 건교부장관이 열린우리당 후보로 이 지역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굳힌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가 하면 현역 의원과 도전자가 함께 수사선상에 오른 경우도 있다. 전남 보성·화순의 박주선 의원은 이 지역에 출마가 거론되던 양길승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과 손영래 전 국세청장이 잇달아 특검 대상이 되거나 검찰에 구속되는 바람에 선거를 손쉽게 치를 뻔했다. 하지만 그 역시 나라종금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체포동의안이 국회에 계류중이어서 낙관하기 어려운 처지다. 현재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에서 5~6명이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지만, 아직은 도토리 키재기다.
총선을 앞두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검찰 수사가 여러 사람 울고 웃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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