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생명 무시하는 나라인가
  • 宋 俊 기자 ()
  • 승인 1999.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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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방지 시스템 심층 취재/119 구조대, 인력·장비 악조 건 속 고군분투… 응급 체계 ‘엉망’… 재앙에 방치된 국민
3월9일 오전 1시20분. 서울 동대문소방서 별관 2층 119구조대 대기실. 어둠을 찢고 비상이 떨어졌다. 긴급 출동이다. 옷을 입은 채 잠들었던 대원들이 하강용 비상 파이프에 몸을 던진다. 구조차에 오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20초. 긴박하게 점멸하는 경광등 불빛. 사이렌을 울리면서 구조차가 발진한다.

1시24분 현장 도착. 그런데 신고자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사건일까? 3분 만에 나타난 신고자는 인사 불성 고주망태였다. 문을 따 달라는 신고. 허탈한 심사를 달래며 신고자를 귀가시키고 차를 돌리는데, 다급하게 비상 호출이 터진다. “불이다!”

대원들, 서슴없이 불길 속으로

1시50분. 현장이 가까워지자 옆 골목에서 소방차 무리가 튀어나와 합세한다. 동네 주차장 화재다. 검붉은 연기가 불빛과 범벅이 되어 동네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지독한 냄새는 눈으로도 맡아진다. 차량 5대가 불 붙은 몸을 뒤채며 비명을 질러댔다. 관창수가 불의 심장을 향해 물줄기를 쏘아대는 사이, 구조대원들은 서슴없이 시뻘건 불길 속으로 뛰어든다.

다행히 피해자는 없었다. 잦아들던 불길이 마지막 발악을 할 무렵, 또 출동 명령이 날아들었다. 2시3분 “주택가에 불!” 기세가 꺾인 불은 진화반에 맡기고, 구조대는 번개처럼 차에 올랐다. 2시7분 현장 도착. 5층짜리 연립의 지하 팝콘 공장에서 발화한 불이 건물 가득 연기를 피워대고 있었다.

팝콘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주민을 구하러 뛰어든 구조대원들의 랜턴 불빛이 건물 복도 창에 오로라처럼 어른거렸다. 복도 구석구석에 쌓인 팝콘 무더기에 불이 번졌더라면 자칫 큰불이 되었을지 모른다. 2시27분 진화. 상황 종료. 퇴각.

구조대의 출동에는 밤낮이 따로 없다. 단잠은 포기한 지 오래다. 최근 119가 쌓아올린 긍정적 이미지는 이같은 피땀으로 형성한 것이다. 97년 서울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76.4%가 ‘사고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기관’으로 119 소방을 꼽았다. 밤낮이 없기는 구급대도 마찬가지다. 구조대가 주로 화재 및 사고에 대응한다면, 구급대의 핵심은 의료 대응이다. 갑자기 아프거나 병이 난 사람은 구급대 몫이다. 화재 때나 사고 때도 구급대는 출동한다.

구급대는 최근 서비스의 질을 한 차원 높였다. 응급의학 전문의가 119 구급 서비스에 일조하게 된 것이다(강서소방서, 서울소방학교 부설 응급구조구급훈련센터). 종전까지 119 구급차에는 간호사와 응급구조사들만 승차했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119 신고를 접수하는방식이 환골탈태한다는 점이다. 지난해 7월 이후부터 종합상황실 완전 디지털화를 목표로 변환 작업이 한창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이용자가 119 신고를 하면, 한국통신의 권역 기준에 따라 해당 지역 소방서 상황실에 벨이 울린다. 접수 요원은 신고 내용을 듣고 구조·구급대를 신고 지역에 급파한다. 이것이 종전 방식이다.

새 방식에 따르면, 서울의 모든 119 신고는 소방본부 종합상황실로 쏠린다. 앞으로 서울 지역 21개 소방서의 상황실이 총집결할 이곳에는 몇 가지 첨단 장치가 숨어 있다. 신고자의 전화 번호를 자동으로 파악하고(ANI시스템), 그 번호의 주소를 척척 추적하며(ALI시스템), 그 주소를 모니터 지도에 자동으로 표시하는 장치(GIS시스템)가 그것이다. 컴퓨터는 신고 내용에 따라 해당 소방서와 소방파출소에 출동 명령을 내린다. 지금은 종로·중부 소방서가 이 시스템을 시범 가동하고 있다. 직원 1명인 소방 출장소 1백19개

그렇다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우리 방재 시스템은 세계의 어느 수준쯤에 비견될까. 결론은 그리 유쾌하지 못하다. ‘우려할 만한 수준’이라는 것이 방재 전문가들의 공통된 결론이다. 방재에 대한 정부의 무신경과 몰이해는 위험 수위를 넘었다. 지난해 9월 정부가 구조 조정의 일환으로 소방 인력 1천4백31명을 감축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 중 60% 가량이 현장 인력. 그 후유증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떨어진다.

소방 업무의 특징은 장비·시설에 딸린 절대 인원이 필수라는 점이다. 예컨대 펌프차는 관창수·동력 담당 등 5명이, 물탱크차는 2명이, 구급차는 3명이 팀을 이룬다. 팀을 이루지 못하면 특수차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소방은 5년째 인력 부족을 호소하고 있다. 전체 소방 공무원 중 80%가 10여 년째 24시간 맞교대로 근무하는 열악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소방 인력을 1천4백31명이나 줄였다.

한국 소방 공무원은 한 사람이 약 2천1백명의 국민을 담당한다. 이는 일본의 2.4배, 미국의 9.6배, 프랑스의 8배에 해당하는 수치다. 지난해 9월 대량 감원으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읍·면 지역 출장소를 대폭 통폐합했으며, 1백49개소는 맞교대 인원마저 줄여 야간 근무를 포기했다. 운전사 1명만 배치한 곳도 1백19개소나 된다. 소방·구조·구급 기능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더구나 시골 지역에는 연로한 독거 노인이 많이 살고 있다.

장비 문제도 심각하다. 생존자 확인에 필수인 음향 탐지기는 아예 전무하다. 무전기가 좋은 사례다. 119 구조대의 경우 무전기는 구조반장에게만 지급된다. 불 속에서 사람을 발견해도 구조대원은 공기호흡기를 메고 있어 업고 나오지 못한다. 동료를 불러야 하는데,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에 무전기가 없는 것이다.

국민이 사랑하는 119, 정부는 홀대

공기호흡기의 호스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대원이 넘어질 때 호스가 접혀 질식사하는 사고가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차량이며 장비의 노후는 새로운 얘기도 아니다. 사망·부상한 소방 공무원이 97년 2백12명에서 98년 2백37명으로 증가한 것은 장비·인력 난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119는 공무원 가운데 가장 폭넓게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부서로 꼽힌다. 그런데 왜 이처럼 홀대를 받는 것일까. 간단하다. 현재 소방의 지위는 행정자치부에 소속된 일개 국이다. 더구나 더부살이 역사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근대적 의미의 소방이 처음 생긴 것은 1910년 일제 경무국(경찰)의 보안과 소방계였다. 39년에는 방공 업무와 통합되어 방호과로, 45년에는 경무국 통신과로 전전했다. 46년 비로소 경찰을 떠나 독립했다가, 48년 건국과 함께 다시 내무부 치안국(경찰)에 인수되었으며, 이후 소방계·방호계·경비계를 떠돌았다. 70년대 중반 내무부 산하 민방위본부에 소속되었다가 92년 이후 현재의 광역 체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선진 각국이 지금 같은 현대적 의미의 소방 체제를 갖춘 것은 대부분 교통 사고·테러·가스 사고 따위 대형 재난을 겪으면서부터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소방은 재난 관리 체제의 중추를 맡는다(태풍·지진·회오리바람 등 자연 재해까지 포함하는 경향도 있다). 나아가 연구·교육·산업화 기능으로 범주를 확산해 가며 과학적 성가를 휘날리기도 한다. 70∼90년대의 일이다.

여기서도 한국은 세계 추세를 거스른다. 다리·백화점 붕괴, 가스 폭발, 지하철 공사장 붕괴 따위 기록을 두루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소방에 재난을 관리할 실권을 주지 않는다. 실무는 소방에 맡기되, 지휘 체계는 옥상옥을 두는 식이다. 구성원 80%가 격일 밤샘 근무를 해야 하는 예산 규모를 가지고 ‘뿌리 깊은 연구·교육’을 펼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풍부한 방재 경험이 연구 성과로 쌓이지 못하고 사라진다. 국가적 손실이다.

산불(산림청), 항공기·열차 사고(건설교통부), 가스·전기·광산 사고(산업자원부), 방사능 사고(과학기술부) 등 재난 유형 별로 수습 주무 부처가 10여 곳으로 나뉜 것도 일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결국은 민활한 119 구조·구급대의 손길을 빌리기 십상이다. 어떤 교수들은 아예 소방을 청으로 격상시켜 재난 관리 총책을 맡기는 방안을 주장하기도 한다(47쪽 상자 기사 참조).

응급 의료 시스템도 보강이 시급하다. 모름지기 경찰·소방·응급 의료는 3대 사회 안전망으로 꼽힌다. 한국의 응급 의료 체계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이 황량한 여건에서도 이만큼의 구조·구급 시스템이 가능했던 데에는 성실하고 헌신적인 대원들의 정신력이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119 대원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박봉에 맞교대라는 악조건에서도 직업 만족도가 높고, 이직률이 매우 낮다는 점이다. 동대문소방서 김 욱 구조반장의 직업 자랑은 이렇다. “5년쯤 지나니까 몸이 겨우 맞교대에 적응하더라. 가족과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하고 명절이 없는 것이 좀 아쉽지만 만족한다. 고맙다는 말 듣는 직업이 얼마나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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