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명예·신분 보장 ‘3박자’ 옛말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1998.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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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명예·신분 보장 ‘3박자’ 삐끗… 개혁 움직임에 반발
법률 사무소가 밀집해 있는 서울 서초동 법조 타운은 요즘 유난히 을씨년스럽다. 이곳 변호사들을 떨게 만드는 것은 겨울 추위가 아니다. 한 변호사는 “좋은 시절은 갔다”고 잘라 말한다. 그는 요즘 변호사들의 처지가 ‘절벽 위에는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절벽 밑에는 악어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변호사의 천국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었을까.

변호사는 사법 시험에 붙은 후 사법연수원을 수료하면 20대에 ‘영감’ 소리를 듣는 명예로운 직업인이다. 어디 명예뿐인가?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사법연수원을 갓 나온 초임 변호사에게는 또래 직장인의 3배가 넘는 월소득 5백만원이 보장되었다. 1년에 억대를 버는 변호사들도 수두룩하다.

빚에 쫓겨 도망다니는 변호사도 생겨

물론 누구나 쉽게 명예와 고소득을 함께 누릴 수는 없다. 현대판 과거 제도인 사법 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지나는 것보다 어렵다. 합격률이 고작 2∼4% 정도. 그러나 이 엄청난 경쟁의 터널을 지나면 윤택한 삶이 보장된다. 설사 비리를 저질러도 영업 제한을 받을 뿐 아무도 국가가 준 변호사 자격증을 박탈할 수 없다.

그런데 신분 보장·명예·고소득 3박자를 모두 갖춘 변호사들에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변호사들의 주장으로는 현재 개업 변호사 30% 이상이 사무실을 운영하기조차 어렵다. 문 닫는 법률 사무소가 늘고 있으며, 심지어 빚더미에 올라 도망다니는 변호사도 생길 지경이다.

전례 없는 변호사 업계의 불황은 90년대 들어 변호사가 크게 늘고 영장 실질 심사에 따른 구속자 수 감소, 그리고 변호사 업계에도 예외 없이 ‘IMF 경제난’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88년 1천6백66명이던 활동 변호사 수는 10년 사이 2배 이상 늘었다. 올 11월 말 현재 3천5백28명.

공급이 많은데 일감(소송, 특히 민·형사 사건)이 줄었으니 변호사들도 경영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내년 1월 4백86명이 배출되는 사법연수원 28기생 가운데 백여 명이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취업난을 호소하는 것도 유일한 돌파구인 단독 개업을 감행하기가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이같은 변호사들의 하소연이 과장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박상기 교수(연세대·법학)는 “많은 개업 변호사들이 경영난을 말하지만 과거 화려한 시절에 비해 어려워졌다는 얘기일 뿐이다. 사법연수원생 역시 기대 수준을 낮추면 취직이 어렵지 않다는 점에서 자발적 실업자라고 볼 수밖에 없다”라고 꼬집는다.

어쨌거나 변호사들을 괴롭히는 것은 줄어든 소득만이 아니다. 금쪽같이 여겨 왔던 명예가 땅에 떨어지고, 신분 보장에 대한 위협이 가시화하는 것에 위기 의식을 느끼는 변호사들이 더 많다.
변호사는 법조 3륜의 한 수레바퀴로서 사법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직업인이다. 그래서 국가도 이들에게 독점적 이익을 부여하는 대신 높은 윤리 의식을 요구한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펴낸 안내 책자에 따르면, 변호사는 ‘고도의 교육과 훈련으로 얻은 축적된 학식과 기술을 가지고 사회의 각종 법률 문제를 처리하는 법률 전문 직업인’이다. 또 단지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고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변호사법 1조 1항).

그러나 지난해 10월 불거져 나온 이순호 변호사 사건은 많은 국민이 변호사에게 등을 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변호사들이 인권의 보루이기는커녕 부패의 화신으로 비친 것이다. 이 사건은 재야 법조인(변호사)이 재조 법조인(판·검사)까지 비리에 연루시켜 사법 정의를 땅에 떨어뜨렸다는 ‘변호사 원죄론’을 불러일으켰다.

변호사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혐오가 얼마나 심각한가는 최근의 세 가지 사례가 생생하게 보여준다. 지난 11월 규제개혁위원회는 ‘1백55개 사업자 단체 규제 개혁안’을 내놓으면서 변호사 단체에도 칼을 댔다. 주요 내용은 △대한변호사협회(변협) 및 지방변호사회의 변호사 등록 및 가입 의무 규정을 폐지하며 △변협이 갖고 있는 변호사 징계권을 법무부나 대법원으로 이관한다는 것이다.

변호사 불신 분위기는 자업 자득

그러자 변협을 중심으로 변호사 단체들이 즉각 격렬하게 반발했다(42쪽 인터뷰 참조). 변호사 단체는 공익성이 강하며, 권력을 비판해야 하는 변호사들을 정부가 통제(징계)하겠다는 발상은 무리하다는 주장이었다. 나름으로 수긍할 만한 논리였으나 국민의 반응은 냉담했다. 일부 언론은 독점적 특혜를 누리려는 집단 이기주의라고 질타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변호사 간에도 의견이 엇갈린다. 규제 개혁에 반대하는 변호사들은 자율 시대에 웬말이냐며, ‘인권 옹호와 권력 견제’라는 변호사 단체의 기능을 무력화하려는 정치 권력의 음모라고까지 해석한다. 재미있는 현상은 찬성하는 변호사들은 물론이고 반대하는 변호사들조차 이 지경에 몰린 것을 자업 자득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변협이 피라미만 잡아내 솜방망이 징계를 해왔으며 공익 활동 역시 활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올해 변협 예산은 20억원인데 절반 가까운 돈을 사무비(8억7천만원)로 쓰고 있다. 이 가운데 인권 사업비(9천3백만원)·조사 감찰비(3천만원)·교육 사업비 같은 공공 성격이 강한 예산은 모두 합쳐도 12.7%(2억5천3백만원)에 그쳤다.

12월 초의 부가가치세법 개정안 파동은 더 좋은 예다. 이 개정안이 그야말로 우여 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하자 일부 재경·법사 위원과 변호사 단체에 거센 비난이 쏟아졌다. 지난 3월 좌초된 후 재상정된 이 개정안이 간신히 재경위를 통과한 후 율사들이 대거 포진한 법사위에서 한참 실랑이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개정안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이 내세운 이유는 법률 소비자에게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지만, 이것을 그대로 믿는 국민들은 별로 없다. 변호사 업계의 로비를 받아 변호사의 이익을 대변했다고 보는 것이다.

부가가치세는 결국 소비자가 부담하는 간접세이지만 계약 과정에서 세금 계산서를 발행해야 하기 때문에 변호사들이 실제로 돈을 얼마나 버는지 드러난다. 흔히 고액 전문 직업인 가운데 탈세의 주범으로 거론되는 것이 변호사·의사 등인데, 의사의 경우 전국민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면서 90% 이상 세원이 노출되고 있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변호사들이 세원이 드러나는 것을 우려해 저항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라고 꼬집었다.

김칠준 변호사는 “부가세법 개정안이 통과된 사실을 특별하게 평가하고 싶다”라고 말한다. 수임 과정이 투명하게 드러나면 비리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고, 세금 문제에 떳떳하지 못해 제약을 받아 온 공익 활동도 펼 수 있다는 해석이다. 가령 변호사들이 나서 ‘세무 비리 센터’를 운영하면 많은 세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는 제 발이 저려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변호사 떨게 하는 소비자의 권리 찾기

내년부터 부과될 부가세 10%가 변호사에게 경제적 영향을 준다면, 현재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인 변호사법 개정안은 변호사의 지위와 업무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우선 법조 비리의 핵심으로 지목되고 있는 브로커를 불법 고용한 변호사에 대한 처벌이 가능해졌다. 이순호 변호사의 경우 법규 미비로 법원이 뇌물증여죄만 적용했고 형량도 항소심에서 8개월로 줄어들었다. 사법 역사상 전대 미문의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치고는 지나치게 가벼운 벌을 받은 셈이다.

비리 판·검사에 대한 변호사 등록 거부 제도를 신설한 것도 이순호 변호사 사건의 여파다. 비리에 연루된 의정부 지원 판사들이 모두 변호사로 등록해 파문이 일자 부도덕한 변호사가 생기는 것을 원천 봉쇄할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영구 제명제를 도입하고 징계받은 변호사의 활동 제한 기간을 늘리는 등 징계 강화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법무부가 이같은 개정안을 마련한 것은 언젠가 자기들이 갈 자리로 생각해 항상 온정을 베풀었던 변호사 업계의 비리를 더이상 방치했다가는 재조 법조계 전체가 돌팔매질을 당하겠다는 위기 의식이 높아진 탓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법무부가 변호사법 개정안에서 판·검사 출신이 변호사로 개업할 때 2년 동안 형사 사건을 수임하지 못하도록 해 전관 예우의 병폐를 줄이자는 변협과 법률 전문가들의 의견을 묵살한 것은 옥에 티로 남는다.

달라진 세태는 고객의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변호사의 권위에 눌려 지냈던 고객들이 변호사의 과오나 불성실, 과다 수임료, 소비자에게 불리한 약관 등을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전 성공 보수를 둘러싸고 분쟁을 벌이다 변호사의 무고로 13일간 옥살이한 김 아무개씨는 3년 8개월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변호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일부 승소했다. 그는 위자료 천만원을 받아냈다. 또 다른 김 아무개씨도 변호사의 불성실로 이의 신청 기한을 넘기자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광주의 녹색소비자문제연구원은 ‘착수금은 어떠한 사유가 발생하더라도 반환하지 않는다’는 약관을 문제 삼아 공정거래위원회에 심사를 청구해 놓은 상태다.

변협이 접수한 소비자 진정 건수는 95∼97년 백 건대에서 올 11월 말 현재 3백86건으로 폭증했다. 무성의 변론에 대한 진정이 가장 많았다. 이같은 법률 서비스 실태는 소비자보호원 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왼쪽 도표 참조).

이석연 변호사는, 앞으로 한국 변호사가 걸을 길은 두 가지라고 말한다.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성실함으로 의뢰인에게 고품질 서비스로 봉사하든가, 목숨을 걸고 비리를 저지르든가 두 갈래 길에서 최후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이다.

“변호사여,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변호사 업계는 이미 치열한 생존 경쟁에 접어들었다. 단독 개업보다 변호사 여러 명이 합동 법률 사무소를 내거나 업무를 전문화하지 않으면 살아 남기 힘들다는 생존 논리도 확산되고 있다. 더 이상 송무(소송)에만 매달리거나 백화점식 영업을 계속하면 살아 남을 수 없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대형 로펌(법무 법인) 소속 변호사와 단독 법률 사무소 변호사 간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뚜렷해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손광운 변호사는 분쟁 조정은 물론이고 분쟁을 예방하려는 법률 수요가 앞으로 훨씬 많아질 것으로 전망한다. 정치 논리가 득세하는 시대에서 합리적인 법 논리가 지배하는 계약 시대로 옮아 가고 있기 때문에 ‘문서 뒤에는 항상 변호사가 있다’는 말처럼 변호사를 사려는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이다.

올해 초 미국 뉴욕 외채 협상에서 한국 협상단은 월가의 워커 변호사에게 탄복했다.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수백명의 금융기관 관계자를 집요하게 설득하는 탁월한 실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미국 변호사 자격을 갖고 있는 외교통상부 김형진 변호사는 “미국에서는 수천명의 워커 변호사가 의뢰인, 즉 미국의 이해를 위해 불철주야 뛰고 있다. 이것이 미국의 힘이다”라고 말한다.

일찍이 셰익스피어는 ‘변호사를 모두 죽여라. 그러면 세상이 더 나빠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변호사를 사회의 유익한 존재로 만드는 일에는 법률 소비자의 의식 전환과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지만 변호사들의 윤리 의식이 가장 중요하다. 법전 속에서 잠자고 있는‘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는 경구가 현실 세계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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