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로 본 2000년 출판계
  • 이권우 (<출판저널> 편집장) ()
  • 승인 2001.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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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 속 빈곤'… 양 못따라간 질

사진설명 출발은 '불안', 마감은 '영광' : 올해 출판계는 부흥기를 맞은 듯 베스트셀러를 양산했으나, 그 내용은 그리 알차지 못했다. 사진은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코너

새 즈믄해 한국 출판의 출발은 무척 불안했다. 종이 책의 종말론을 퍼뜨린 디지털 신봉자들의 선전 공세에 맥을 추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돌파구는 일찍 열렸다. 지난해부터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던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정찬용·사회평론)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밀리언 셀러 탄생을 예감케 했다. 이 예감은 출판계를 흥분시켰다. 여기에는 말못할 사정이 있었다. 대여점 등장과 도매상 부도 여파로 밀리언 셀러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출판계를 떠돌았다. 그러나 <영어공부…>가 선전하자 출판계는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되돌아보면, <영어공부…>는 밀리언 셀러 시대 도래를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해리포터 시리즈(조앤 K. 롤링·문학수첩)DHK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버트 기요사키 외·황금가지)가 잇달아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전지구적 차원에서 성공을 거둔 해리포터 시리즈는 종이책의 위력을 확인케 한 문화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는 부에 대한 이중적 잣대를 비웃으며 우리의 통념을 뒤흔들어 놓았다. 통속물에 불과하다는 혹평에도 <가시고기>(조창인·밝은세상)가 폭발적으로 팔려나갔고, <국화꽃 향기>(김하인·생각의나무)가 그 '왕홀'을 물려받았다. 불안했던 출발이 영광으로 마감된 해였던 것이다.

우리 출판은 이제 부흥기를 맞이한 듯하다. 이처럼 '판'이 크게 벌어졌던 예가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 한 해를 정리해 보면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불편해진다. 새삼 강조할 필요 없이, 베스트 셀러는 일반 대중의 집단 무의식을 반영한 거울이다. 그렇다면 올 한 해 우리 대중은 무엇을 꿈꾸었는지 분명해진다. 거칠게 말하건대, 우리 시대의 평균적 교양인들은 개인과 가정의 안녕만을 바란 것이다. 남들보다 먼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으며, 이를 위해 '절대로' 영어 공부를 해야 했다. 그리고 죽어가는 아들과 아내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작은 영웅을 찬양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올해 잘 팔린 책을 훑어보면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헌신을 강조한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오직 나(와 가족)만 살아 남으면 된다는, '각개약진'이 고무·찬양된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다! 나와 가정이 뿌리 내린 곳은 어디인지, 그리고 부자 아빠가 되려는 사람이 그토록 많았건만 왜 나라 경제가 결딴 나기 직전까지 왔는지 말이다.

<노자와 21세기>(김용옥·통나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이윤기·웅진닷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피에르 쌍소·동문선)가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랐던 것은 그나마 반가운 일이다.


판은 커졌으나, 정신은 '빈곤'

뱁새걸음으로 황새걸음 쫓느라 정신 없던 대중이 사막에서 오아시스 만난 듯 읽은 책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다. 더디 가도 사람 생각 먼저 하는 사회를 희구하는 소박한 바람이 이 책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고전과 느림의 철학에 관심이 높아진 것은, 방어기제가 발동했기 때문이라 분석할 수 있다. 너무 빨리 변화하는 시대에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지 못한 대중이 잠시 책으로 둘러친 울타리 안에서 숨을 고른 것이다.

어떤 출판 관계자는 이른바 '빅5'가 도매상 부도를 2년 유예시켰다고 말했다. 그만큼 출판은 올해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기록햇다. 고민은 이 대목에서 시작된다. '판'이 커진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판이 담아낸 정신의 빈곤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 것이다. 반성과 변혁을 꿈꾸지 않는 동시대인들을 상대로 출판이 무엇을 더할 수 있을까. 소문 난 잔치가 끝난 시점에서 기쁨보다 고뇌가 앞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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