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 재주 넘자 러시아가 한몫 챙긴다
  •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dwj@e-sisa.co.kr)
  • 승인 2001.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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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에 협조하는 대가로 체첸 진압 작전 묵인·러시아의 나토 가입 협조·부채 탕감 등을 요구하고 있다.




테러 전쟁을 선포하고 무한 질주를 구가하던 워싱턴은 중앙아시아에서 복병 크렘린과 격돌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는 데 중앙아시아 군사 기지가 필요했고, 독립국가연합(CIS) 맹주국을 자처하는 러시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국으로부터 대가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테러 사건 직후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러시아 연방안전국(FSB) 간에 벌어진 첩보전은 007 영화를 방불케 했다. 언론도 정보전에 가세했다. 중앙정보국이 중앙아시아 5개 국에 접근해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는 낌새를 연방안전국의 정보 레이더와 언론이 포착했다. 〈공동신문〉(9월18일자)은 중앙아시아에 '은혜로운 독수리'가 출현했다며 경계 경보를 울렸다. 그때 이미 크렘린은 역공작에 착수한 상태였다. 블라지미르 루샤일로 국가안보위원회 보좌관이 듀샨베·타슈켄트·아시하바드를 잇달아 방문해 세 나라가 워싱턴과 밀약을 맺었음을 확인했다. 푸틴은 9월18일 독립국가연합 긴급 정상회담을 열어, 대미 협상 창구를 러시아로 단일화했다. 이어서 국가안보회의 논의를 거쳐 협상 카드를 준비했다. 크렘린은 '판도라 상자'(아프가니스탄) 개봉이라는 강수를 선택한 워싱턴의 고충과 대응 순서를 꿰뚫어 보고 있었던 듯하다.


양국 정상은 9월22일 40분간 전화로 협상했다. 24일 푸틴은 독립국가연합의 반테러 전쟁 지원 성명을 발표했다. 곧바로 우크라이나는 미군 수송기 영공 비행 허용과 군사 기지 제공, 카자흐스탄은 후방 지원을 약속했다.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댄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은 미군에 군사 기지를 제공하겠다고 공식 발표했고, 그루지야도 헬기장 사용을 허락했다. 반테러 전쟁 지지와 독립국가연합 국가 영공 이용 절대 불가를 고수했던 푸틴은 부시와의 협상 후 태도를 바꾸었다. 까닭은 무엇일까?


협상 의제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크렘린이 꼼꼼히 계산하고 움직인 것은 확실하다. 〈더 모스크바 타임스〉(9월24일자)는, 독립국가연합이 테러 전쟁을 지원하는 대가로 러시아는 미국에 △체첸 진압 작전 묵인 △나토 확장 중단 및 러시아의 세계무역기구(WTO)·나토 가입 협조 △옛 소련 부채 탕감 △독립국가연합 군사기지 한시적 이용과 일방적 행동 자제 △중앙아시아에서 테러 발생 때 군사 지원 등을 요구했다고 분석했다.


푸틴, 숙원 사업 일거에 해결할 기회 잡아




푸틴은 미국 테러 사건을 자신의 국내 정치 입지를 강화하고 러시아의 해묵은 숙제를 해결할 기회로 활용하려고 한다. 우선 푸틴과 부시는 모두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다. 민주당으로부터 실정을 공격받던 부시는 반테러 전쟁으로 하나가 된 미국민으로부터 90% 지지를 받고 있다. 부시는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라는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 주면서 장기전을 유도해 정권 재창출을 겨냥할 것으로 보인다. 푸틴도 주도면밀하게 대선 전략을 계산했다. 푸틴은 '전(全)러시아조국당'과 연합해 두마(하원)를 장악했고, 최근 주간지 〈프로필〉의 여론조사를 보면 지지율도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그는 미국의 테러 전쟁에 적극 개입해 국내 정치 기반을 공고히 하고 싶어한다.


푸틴은 이번에 최대 정적인 베레조프스키 처리 문제까지 부시와 일괄 타결한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이었지만 푸틴과 사이가 틀어진 베레조프스키는 지난해 부정 부패와 청부 살인 혐의를 받고 해외로 추방되었다. 주목할 점은, 베레조프스키가 푸틴 정권을 위태롭게 할 치명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고, 미국 정보기관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푸틴은 부시로부터 베레조프스키가 해외에서 반 푸틴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다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테러 사건 바로 전 베레조프스키는 체첸에 들어가 체첸 지도자들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주간지 〈아르구멘트 이 확트〉(논쟁과 사실)는 '체첸 카드'가 정계 복귀를 위한 그의 마지막 승부수라고 예상했다(9월4일자). 그러나 이번 미국 테러 사건으로 베레조프스키의 국내 정치 복귀 기도는 수포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미국과 서방은 체첸 전쟁을 테러 전쟁으로 인정했고, 러시아는 강도 높은 체첸 진압 작전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는 빈 라덴이 체첸을 지원하는 것에 주목해 정보를 수집하며 작전 개시일을 고르고 있다.


러시아의 체첸 진압은 정치·경제·군사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경제적으로는 카스피 해 유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 송유관이 체첸을 통과하는데, 이미 두 차례나 공격을 받아 송유관이 파괴되었다. 군사 전략적 의미는 더욱 중요하다. 우선 체첸 지역은 미국과 나토가 카프카스(코카서스)와 카스피 해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는 전략 요충지이다. 또한 이곳을 차지하면 나토의 전진 기지인 터키를 압박하고 카프카스 국가인 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아르메니아를 통제할 수 있다.


푸틴은 중앙아시아 국가의 경제를 회생시키고 중앙아시아를 러시아 영향권에 묶어 두려고 한다. 러시아는 미국이 반테러 작전 협조 대가로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약속했던 경제적 이득을 챙겨주면서 반사 이득도 노리고 있다. "만일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테러리즘 근절을 목표로 세계를 돕는다면,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어 이득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안정과 번영에 관심이 있다"라고 재건개발유럽은행(EBRD) 수석경제연구원 윌렘 부이테르는 말했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 휩쓸릴 경우 가뜩이나 정치·경제·종교 문제로 불안한 중앙아시아가 전쟁터로 변할 위험도 있다. 가장 큰 위협 요소는 과격 이슬람 단체의 테러 반격이다. "만일 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의 공군기지에서 미국 폭격기가 발진한다면 '우즈베키스탄이슬람운동(IMU)'의 보복 공격이 예상된다. 탈레반으로부터 지원받는 이 단체는 중앙아시아 안보에 가장 심각한 위협 요소로 간주된다"라고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국가방위재단위원회(NDCF) 선임위원인 윌리엄 싱글레턴은 말했다.


중앙아시아와 카스피 해의 혼란은 중국의 군사 개입을 초래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특히 중국과 경제 협력 관계가 밀접한 투르크메니스탄으로 혼란이 확산된다면 중국은 개입할 명분을 갖게 될 것이다. 유럽연합도 방관하지 않을 전망이다. 1991년 독립 후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러시아와 경제 관계를 지속하면서, 평화 유지를 위해 나토와 손잡았다. 서유럽에 협력의 손을 뻗친 것이다. 특히 카스피 해 유전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유럽연합 국가들은 중앙아시아의 상황 변화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러시아의 친유럽 정책 탄력 받아




따라서 미국 테러 사건을 계기로 중앙아시아는 순식간에 열강의 각축장이 되게 생겼다. 옛 소련 정권 때부터 중앙아시아는 중국과 파키스탄을 견제하기 위한 러시아의 전략적 군사 요충지이며, 카스피 해 유전이라는 막대한 이권과 밀접한 지역이다. 최근 러시아는 타지키스탄 군사기지를 현대화하고, 주둔 병력을 2만5천명으로 늘렸다.


러시아는 빠른 속도로 유럽연합과 나토에 접근하고 있다. 미국이 테러 전쟁을 선포한 직후 러시아 일간지 〈이즈베스티야〉(9월16일자)는 '러시아가 유럽에 접근할 기회가 왔다'고 언급했다. 중앙아시아의 현안이 일단락되자 푸틴은 9월24일 독일을 공식 방문해 독일 의회에서 연설하는 영광을 누렸다. 크렘린의 숙원인 친유럽 정책이 탄력을 받은 것이다. "러시아의 유일한 전략적 옵션은 유럽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유럽이 아니고, 유럽연합과 나토를 확대한 범대서양적 유럽이다." 지정학적 관점에서 21세기 세계 질서를 전망한 브레진스키가 그의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 크렘린에 한 조언이었다.


러시아는 미국이 주도해 아랍권이 재편되는 것은 질색이다. 러시아와 이란은 10월2일 비밀 군사협력 협정을 공식화했다. 러시아는 카스피 해 유전 보호와 이권 분배에서 주도권을 잡고, 대미 정책에서 '이란 카드'를 활용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러시아는 이라크·요르단과 외교 접촉을 강화하면서, 아랍권을 아우르려는 미국의 움직임에 쐐기를 박았다. 반 테러 전쟁은 '워싱턴의 강수'에 맞선 '크렘린의 묘수'라는 체스 게임을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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