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한 법 탓에 맞고 또 맞는다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3.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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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보호에 치중해 피해자 권익 못 지켜…“가해자 강제 체포 ·격리 조처 있어야”
도대체 한국 부부는 서로 얼마나 때리고 맞을까. 한국의 부부는 10쌍 중 3쌍이 1년에 한번 이상 ‘손찌검’이 오가는 부부싸움을 벌인다. 10%대를 유지하는 외국과 비교할 때 2~3배이다. 같은 아시아권인 홍콩(14%)이나 일본(17%, 평생 기준)과 비교해도 월등히 많다(아래 표 참조).






남성들의 일방적인 폭행이 많은 것도 한국 사회의 특징이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김은경 연구원에 따르면, 흉기를 쓰거나 막무가내로 아내를 패는 비율은 외국에 비해 4~8배 높다. 가령 미국은 심각한 폭행의 경우 남녀 차이가 별로 없다. 여성도 주먹을 휘두르거나 칼이나 총을 집어드는 일이 남자 못지 않은 것이다.



가정 폭력 사건 40%가 흉기 사용



일선 검사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가정 폭력 가운데 90%가 부부 폭력이고, 대부분 남성이 가해자다. 수원지검에서 자신이 맡았던 가정폭력사건 1백19건을 분석한 이영주 검사에 따르면, 아내가 경제력이 없어 맞고 산다는 통념은 신빙성이 없다. 1백19건 중에서 남편이 아내를 부양하는 비율은 37% 미만이고, 반대로 여자가 전적으로 책임지거나 함께 버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가정 폭력 가해자가 대학 재학 이상의 학력을 가진 경우도 18.5%나 되었다. 몽둥이나 칼, 깨진 소줏병 등 위험한 도구를 쓴 사건이 40%였다.



전문가들은 아내 구타를 ‘가부장적 테러리즘’이라고 부른다. 폭력뿐 아니라 비하와 협박을 총동원하는 고문의 한 형태로,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뒷받침된다는 것이다. 상습적인 구타의 경우 결혼을 전후해서, 대부분 결혼 1년 이내에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첫 구타가 발생했을 때 여성들은 외부에 알리는 것은 곧 가정을 깨는 일이라는 가부장적인 금기 때문에 스스로 첫 단추를 잘못 꿴다.



한국은 1998년부터 가정 폭력 관련 법(가정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국가가 가정 폭력에 적극 개입하는 노선을 드러냈다. ‘배우자 구타’가 가정사가 아니라 사회 범죄라는 특례법의 인식은 상징성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허술한 법망은 오히려 폭력에 대한 내성을 길러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실제 경찰에 신고해도 조사를 받고 돌아온 남편이 “별거 아니네. 어디 또 신고해 보라”며 또 구타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한국여성의전화에 따르면, 신고했다는 이유로 더 때린 경우가 20%에 이르렀다. 외국의 연구는, 피해자가 다시 맞을 확률이 사건 발생 이후 11일 이내에 매우 높게 나타난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영주 검사는 “이미 처벌받거나 수사가 진행 중일 때 다시 아내를 때려 입건되는 경우가 많았다”라고 지적했다.



가정폭력특례법의 기본 취지가 ‘피해자 권익 보호’가 아니라 ‘가정 보호와 유지’라는 점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이찬진 변호사에 따르면, 이는 복지 제도가 허술한 탓에 가정이 해체될 경우 피해자의 생존권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경찰이 일선에서 무마를 종용하는 태도와 맞물리면서 더욱 범죄 예방 효과를 갉아먹는다. “아이를 봐서 참으시죠” “정식으로 고소장을 접수해야 수사가 가능한데, 이혼할 겁니까?” 등이 주로 듣는 얘기다. 심각한 학대에 시달리다가 쉼터에 들어온 여성들은 오히려 이런 경찰의 태도에 무력감을 느꼈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신고를 받고도 출동하지 않거나, 현장에서 훈계를 늘어놓고 무마하는 것은 명백한 월권이다. 이찬진 변호사는 “경찰청이 내부 지침을 내리고는 있지만 여전히 미흡하다. 교통사고 때와 같은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외국은 어떨까. 1980년대 후반부터 가정 폭력을 사회 문제로 인식하면서 국가가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고, 피해자 의사와 상관없는 ‘강제 체포’나 ‘무조건 기소’를 택하는 곳도 적지 않다. 캐나다에서 시행되는 강제 체포는, 현장에 출동한 경관이 4시간 이내에 폭행이 있었다는 확신이 설 경우 무조건 가해자를 체포한다. 영국은 기소까지 강제하고 있다. 피해자 의사에 비중을 둘 경우, 여성이 보복 폭력을 당할 우려가 있는 데다가, 폭력에 시달려온 여성에게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한국의 특례법은, 형사법적인 접근을 취하면서도 형사 사건으로 처리할 수도 가정 보호 사건으로 처리할 수도 있도록 했다. 일선 검사들은 폭력의 심각성이나 재발 위험을 가려 판단하기보다는 피해자의 뜻, 그 가운데서도 이혼할 결심이 섰느냐 아니냐로 사건을 분류한다. 아무리 심하게 폭행당했어도 아내가 이혼할 의사가 없으면 처벌하지 않거나 가정 보호 사건으로 넘기는 것이다. 하지만 가정 폭력 가해자의 유형 분류를 시도하는 조은경 교수(한림대·심리학)는 초기 단계부터 가해자의 유형을 파악해 대처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가정 보호 사건으로 분류되면 처벌은 사회 봉사나 보호 관찰, 수강·상담 명령, 치료 위탁 등에 그친다. 가해자를 격리할 수 있는 감호 처분 등은 시설이 마땅치 않아 거의 사문화한 상태이다. 형사정책연구원 김은경씨는 “드라이버로 정수리를 찍고, 음부에 불을 붙여 화상을 입히고 방안에 소변을 보는 등 죄질이 나쁜 경우에도 보호 관찰 처분을 받는다. 이는 한 달에 한두 번 보호 관찰관에게 상황을 보고하면 끝나는 조처다. 또 폭행을 당한다 해도 아내가 신고할 엄두가 나겠는가”라고 비판한다.



법원의 위탁으로 상담을 진행하는 가정법률상담소 박소현씨에 따르면, 남편들은 대부분 잡혀오기 전까지 법에 대해 전혀 모른다. 그리고는 ‘아내가 맞을 짓을 했는데,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투덜댄다. 개중에는 ‘더러워서 안 때리겠다’는 이들도 생겨난다. 어찌되었건 남의 가정 일에 남이 뭐라고 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기는 것이니 나쁠 것은 없는 셈이다.



악질적 폭력에 시달릴수록 구조 요청 못해



문제는 법이 미비한 탓에 악질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일수록 구조를 요청할 가능성이 적다는 점이다. 구속 수사를 제외하고는 수사를 받고 한두 시간 만에 귀가하는 것이 관례여서 보복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주의적 관점을 가진 전문가들은 가정폭력특례법이 ‘가정 보호’가 아니라 ‘피해자 권익 보호’를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고 지적한다. 재발이 우려되는 경우 가해자를 격리하는 임시 조처를 적극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피해자 쉼터는 있어도 가해자를 격리할 수 있는 곳은 마땅치 않다. 법원은 고육책으로 ‘안방 출입금지’ 등 희화화한 처분을 내놓곤 한다.



부부 싸움과 배우자 학대를 구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이영주 검사는 “피해자 대부분이 가정 폭력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사건을 무마하거나 축소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신고한 경우에도 별다른 이유 없이 합의하고 다시 살아보겠다며 물러서, 적절히 처리하기가 어려웠다”라고 토로한다.
왜 그럴까. 심리학자들은, 절망적인 여성들일수록 ‘스톡홀름 증후군’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피해자가 힘이 센 가해자에게 심리적으로 동조하는 현상으로 ‘네가 맞을 짓을 했다’는 남편의 말에 순응하고 체념을 체화한다는 것이다. 도움을 청해도 도리가 없으면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된다.
매맞는 여성을 돕는 한 기관의 사이트를 열면 첫 화면에 이런 문구가 뜬다. ‘매맞을 짓이란 없다.’ 과연 인간에게 다른 인간을 때릴 권리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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