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촌의 ‘못다 한 이야기’②/3대 패밀리의 핏빛 전쟁
  • 정리,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4.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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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은의 보스 오종철 난자, 조직 세계 판도 바꾸고 ‘전국구 주먹’ 굳혀
청송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전 서방파 두목 김태촌씨(57)는 한국 조폭 세계에서 살아 있는 전설이다. 1970년대 초반부터 1990년까지 정치권과 유착한 대표적 정치 조폭 보스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먹 시대를 마감하고 칼과 손도끼 등을 사용해 흉포화하기 시작한 조폭 시대를 연 인물로 이름을 떨쳤다.

15년째 감옥 생활을 하고 있는 김태촌씨는 오는 10월3일로 만기를 맞는다. 그는 사회보호법이 폐지되어 사회에 복귀하면 아내(가수 이영숙씨)와 함께 폐암 수술 후유증을 치료하며 신앙에 귀의해 새 삶을 찾겠다는 각오를 내보이고 있다. “이제 우리 시대는 갔다”라고 말한 김태촌씨는 지난 6개월 동안 편지지에 꾹꾹 눌러쓴 방대한 분량의 회고록 원고를 <시사저널>에 보내왔다.

이번 호에서는 김씨의 어린 시절과 1970~1980년대 대한민국 서울의 주먹 세계를 판가름한 이른바 3대 패밀리의 전쟁 시기를 요약 정리한다. 3대 패밀리란 김태촌씨가 이끌던 서방파, 조양은씨가 지휘하던 양은이파, 이동재씨가 보스로 있던 오비파(OB파)를 말한다.

1970~1980년대 군사 정권의 암울한 시대를 반영하는 이들 조폭 세력의 내부 사정과 움직임은 그동안 이들을 일망타진한 수사기관이 흘린 정보를 통해 주로 알려졌다. 그런 점에서 당대 조폭의 대명사인 김태촌씨가 처음으로 직접 정리한 ‘조폭 전쟁사’는 어두웠던 한국 현대사의 이면을 이해하는 데 또 다른 참고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부터 내 지난 삶을 한 가지씩 회고하려 한다. 나는 1950년 10월10일 전남 담양에서 3남3녀의 다섯째로 출생했다.

부친께서는 미국 선교사로부터 신학을 배운 후 목회 활동을 하다가 경찰에 투신해 파출소에서 근무했다. 어머니는 일제시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중학교를 졸업했다. 6·25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집은 다복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여순 반란 사건과 빨치산 소탕 작전 때 총살 처형 문제로 인해 파멸되었다.

기독교 신자인 부친은 빨치산 즉결 총살 때 총구를 다른 곳으로 돌려 권총을 쏘았다고 한다. 살인은 피할 수 있었지만, 이 일로 국법에 위배되어 결국 순경 옷을 벗었다. 그 후 광주로 이사해 서방면에 터를 잡고 살았다. 서방파는 어릴 적 내 고향 이름을 딴 것이다.

부친은 갖가지 사업을 했지만 모두 망했다.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자 노상에서 품팔이를 했다. 어머니마저 과일·채소 장사를 해야 했다. 부모님은 새벽에 리어커에 과일과 채소를 싣고 노상에서 장사를 했지만 빚더미에 쌓인 우리집은 줄곧 가난에 시달렸다. 우리 식구들은 하루에 밥 한끼 먹지 못하고 강냉이죽(옥수수죽)으로 연명했다.

나는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지만 가난과 배고픔이 싫어, 어린 나이에 가출했다. 같은 또래의 불량 소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나쁜 짓만 골라서 하고 다녔다. 안해본 일이 없다. 신문팔이, 우산장수, 구두닦기, 아이스케키 장사 등 밑바닥 인생을 시작했다. 불량 서클을 만들게 되었고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원정 싸움도 하고 편싸움도 하다가 열일곱 살에 광주소년원에 들어갔다. 스무 살까지 소년원을 세 번씩이나 들락거리며 싸움만 하고 다니다 보니 깡패가 되었다.

배 곯던 소년, 가출해 깡패 되다

나는 1973년 광주교도소에서 8·15 가석방으로 출소한 송태준 선배를 따라 상경했다. 호남파 원조인 송태준 선배의 별명은 ‘송깡’이었다. 번개파 두목 박종석 선배, 정학모 선배, 박영장 선배 모두 송태준 선배의 후배들이다. 송태준 선배는 4·19혁명 이후 이정재·임화수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난 다음 가장 체계적인 조직을 이끌던 2세대 호남파 총두목이었는데, 유신정권 때 일제 단속에 걸려들었다. 카지노 대부 전낙원 파라다이스그룹 회장과의 마찰로 인해 호남파 식구 10여 명과 함께 검거된 것이다.

박영장 선배도 당시 송태준 선배와 공범이었다. 두 선배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재판받은 후 고향인 광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가 그 해 8월15일 석방되었다. 광주교도소 안에서 나는 송·박 두 선배를 만나 정성껏 모셨다. 석방되면 서울에 올라가기로 사전 약속이 된 상태였다. 먼저 석방된 내가 8·15 광복절 사면으로 가석방된 두 선배를 광주교도소로 모시러 갔다. 송선배를 따라 상경한 나는 친척도 없고 가족도 없고 인맥도 없는 형편이어서 송선배 집에서 함께 지냈다.

이 무렵 나에게는 절친한 친구 둘이 있었다. 이석권과 김성광이었다. 우리 세 사람은 20대 초반 함께 서울로 상경해 터를 잡고 본격적인 건달 생활을 시작했다. 각자 역할을 분담했다. 나는 서방파 연합 전체 조직을 관리하며 대외적으로 세를 유지하기로 했고, 김성광은 서울 시내의 유흥업소를 장악해 세를 확장하기로 했으며, 이석권은 도박장 개장 등 유흥업을 직접 경영하면서 경제적인 기반을 잡아 조직의 자금을 책임지기로 한 것이다.
1975년 내 친구들은 양은이파와 피비린내 나는 3년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우리 서방파 조직원들과 양은이파 조직원들은 수시로 칼부림을 해 병원에 실려 가곤 했다.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조직원들은 불구가 되다시피 했다. 당시 나는 최근 태권도협회 전무이사로 있다가 물의를 일으켜 미국으로 도피한 번개 박종석 선배, 1976년 신민당 각목대회 사건 당시 핵심 인물로 등장한 신 아무개 국회의원의 사위 박영장 선배, 정현준 게이트의 로비스트로 등장한 신 아무개 선배, 오기준 선배 들을 모시고 있었다.

김성광은 지난 정권에서 국회의원 김 아무개 의원의 몸통 실세 로비스트로 지목되어 최근 구속 수감된 정 아무개 선배를 모시고 있었으며,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은 오종철 선배를 모시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조양은은 총두목 오종철 선배의 행동대장이었다. 그 무렵 명동에는 자유당 시절 명동파 두목 이화룡씨 행동대장이었던 신상현 선배가 있었다. 나는 신상현 선배를 존경했고 개인적으로 좋아했다. 신상사라는 별명은 군에서 상사로 있었다고 해서 붙었다.

그 무렵 명동파와 호남파 사이에 조그마한 충돌이 있었다. 이 사건이 조양은 행동대장이 일약 ‘전국구’로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호남파 대부 정 아무개 선배와 대구 조 아무개 선배, 조양은의 총두목 오종철 선배가 행동대장 조양은을 시켜 사보이호텔에 모여 있는 신상사파를 급습했다. 당시 사보이호텔 커피숍에서는 내 선배와 내가 좋아하는 분들이 신상사파와 함께 설날 덕담을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조양은은 인정 사정 없이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김 아무개 명동파 고문에게 상처를 입히고 도주했다. 마침 신상사는 그 자리에 없어 화를 면했다. 나는 분노했다. 선배들 또한 분을 참지 못했다.

나는 내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던 신상현 선배에게 무례를 범한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직계 선배들도 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총두목 오종철을 제거하고 조양은을 적당히 손을 보아 고향으로 내려보내라는 특명이었다. 나는 즉각 핵심 멤버 7명을 데리고 오종철과 조양은을 잡으러 다녔다. 그러던 중 무교동 어느 식당에서 조양은을 잡았다. 그러나 나는 조양은을 어리게 보았고, 소년원 시절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에 손보고 싶지 않았다. 총두목 오종철을 제거하면 조양은은 자연히 중심을 잃고 미아가 되리라는 계산이 있었다.

내가 데려간 후배 7명은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눈짓만 하면 조양은은 그 자리에서 불구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조양은을 너무 얕보고 있었다. 나에겐 오직 총두목 오종철 선배가 목표였던 것이다. 나는 후배들에게 작업하지 못하도록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양은은 이러한 나의 배려로 봉변을 면했다. 이때부터 3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대검·낫·도끼로 오종철 ‘난자’

밤이면 오종철 선배를 찾기 위해 골목골목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10시께 무교동 거리를 거닐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내 친구 김성광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에게 혹시 오선배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성광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2층을 가리키며 저 다방 안에 오선배가 있었는데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오선배의 얼굴을 확실하게 기억할 수가 없었다. 무교동에서 몇 번 뵙고 인사한 것이 전부였다. 오선배는 보디가드인 직계 후배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다고 했다.

보디가드 중 하나인 센츄럴호텔 철이는 사보이호텔 습격 사건 때도 현장에 투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너나없이 모두 보복해주고 싶었지만 나의 목표는 오직 총두목 오종철 선배였다. 나는 오른팔이던 이 아무개에게 오종철 한 사람만 처치하되 생명은 살려두고 하반신만 불구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절대로 보디가드와 그 일행에게는 상해를 입히지 말라고 했다.

특공대원의 총지휘자는 이 아무개였다. 최 아무개, 김 아무개, 오 아무개, 김 아무개 등 7~8명이 각각 대검 도끼 낫 쇠파이프 야구방망이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오선배를 정확히 가르쳐 달라고 했다. 친구가 오선배를 지적하자 나는 이 아무개에게 다시 오선배를 일러준 뒤 작업을 마치면 흩어져 장충단공원 앞 태극당으로 집합하라고 지시했다. 무교동 극장식 술집 엠파이어 주차장 앞 인도에서 나와 김성광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선배와 그 직계 후배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내 동생들은 순간적으로, 정확히 작업을 실시했다. 피가 솟구치고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뒤섞였다. 구경꾼까지 아수라장이었다. 대검·도끼·낫으로 오선배의 하체가 난자당하고 있었다. 보디가드들은 오종철 두목을 그대로 두고 도주했다. 처음에는 내 동생들에게 달려들었지만 상대가 못 되었다.

나는 확실하게 작업을 마친 특공대 동생들에게 흩어지라 지시하고 각자 택시에 올랐다. 30분 후 장충단공원 앞 태극당에서 만났다. 아군에게 도끼로 발등을 찍힌 후배의 치료를 마치고 선배들에게 보고했다. 확실하게 작업을 끝냈다고 보고했지만 도대체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며칠 전 다른 특공대가 오선배를 습격했지만 미수에 그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나는 늘 오선배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살았다. 선배들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기는 했지만 나와는 아무런 개인적 감정도 없었다. 당시 대한민국 제1인자로 인정받았던 큰 인물을 영원히 은퇴시켜 버렸기에 항상 마음에 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광주 모 다방에서 오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망설여졌지만 용기를 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오선배에게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조직을 위해 저지른 나의 만행을 사과했다. 마침 오선배가 서울로 가는 길이어서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배웅했다. 역시 큰 인물이고 큰 그릇이었다. 오선배는 내 등을 두드려 준 다음 서울로 상경했다. 그때 내 나이 25세. 조직 폭력 세계에서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하수인이라는 것을 오선배는 알고 있었다.

무교동 엠파이어 주차장 앞에서 오선배를 난자한 사건은 대한민국 조직 세계의 판도를 갈라놓았고 모든 건달들을 경악시켰다. 나는 현장에서 지휘만 했는데 마치 내가 직접 칼을 휘두른 것처럼 소문이 났다. 그 때부터 김태촌은 칼잡이라는 좋지 못한 이름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조직 폭력 세계에서든 일상 생활에서든 그 어떤 사람도 칼로 찌른 적이 없다. 다만 신변 보호용으로 칼을 항시 휴대하고 다녔고, 위급한 상황에서 흉기를 휘두르며 싸운 적은 있다.

1980년 전두환 군사 정권이 들어서면서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양은이파와 서방파 일당의 핵심 멤버들이 전부 격리 소탕되었다. 나는 1980년 6월 체포되어 수도경비사령부에서 재판을 받았다. 범죄단체 조직 등의 죄로 함께 재판받은 공범들 중 오기준 선배는 3년을 복역했고, 내 친구 손하성과 김성광은 집행유예를, 나머지 후배들은 징역 1년 안팎을 살고 나왔다.
내가 5년 6개월을 복역하는 동안 서방파의 세력은 미약해졌다. 내가 사회에 있을 때는 대한민국의 어느 조직도 감히 넘보지 못했는데 징역 5년 6개월을 살다 보니 그러지를 못했다. 조양은마저 육군본부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아 사실상 양은이파가 와해되다시피 하다 보니 서울 시내는 무주공산이 되었고 그 빈틈을 타 오비파가 등극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오비파 두목 이동재의 세상이었다.

그 무렵 내 친구 이석권은 도박장과 유흥업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석권과 오비파 조직 간에 도박판 문제로 다툼이 있었다. 이석권이 오비파 두목 이동재를 포커판 매장 문제로 무시하자 이동재가 격노한 것이다. 그 일로 인해 이석권이 오비파 조직원들에게 대로변에서 난자당하고 말았다. 생명에 위험이 있거나 불구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은 언론에 대서 특필되었고 이후 오비파 조직은 형사들의 추적을 받고 있었다.

이석권이 오비파에게 난자당했다는 소문은 대전교도소에 있는 내 귀에도 들려왔다. 서방파가 오비파에게 당했다는 사실은 수치스러웠지만 나는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오비파 두목 이동재가 꿰뚫어보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김태촌이 이석권을 의리 없는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석권을 건드려도 김태촌이 절대 복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꿰뚫고 린치를 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교도소장을 면담했다. 당시 나는 모범수로 생활하고 있었다. 귀휴를 신청했다. 귀휴란 교도소에 복역 중인 모범 수형자가 사회로 휴가를 다녀오는 것이다. 1주일간 귀휴가 결정되었다. 귀휴 나가 보니 예상했던 대로 오비파 세상이었다. 양은이파와 서방파 세력은 약해져 있었고, 이동재의 오비파의 세력은 강해져 있었다.

귀휴 1주일 동안 박종석·오기준·박영장 선배 등 서방파 선후배와 친구들을 만나보았고, 특히 이석권과는 하룻밤 호텔에서 지내며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비록 불구는 아니었지만 오비파 조직원들로부터 잔인하게 난자당한 이석권의 걸음걸이와 건강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나는 이석권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오비파에게 보복하지 않고 있는 것은 수형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석권 네가 내 친구임에도 그저 체면치레 식의 형식적 옥수발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석권은 후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친구로서 옥수발만 제대로 했더라면 오비파가 린치도 가하지 않았을 것이고, 설혹 난자당했다 하더라도 당장 전면적인 보복전에 들어갔으리라는 사실을 친구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조만간 만기를 채우고 석방되는 1986년부터는 오비파 이동재도 함부로 서방파를 넘보지 못할 것이므로 굳이 이석권이 보복하지 않더라도 서방파의 위상은 다시 회복될 수 있기에 무리수를 던질 필요까지는 없다고 보았다.

1986년 1월 석방되어 서울에 와보니 이동재의 세는 대단히 커져 있었다. 호남 선배들을 모두 비호 세력 등 스폰서로 두고 있었으며 ‘전국구’가 되어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조양은·이동재·김태촌 세 사람 모두 다 광주 출신이며 나이 또한 동갑이거나 한 살 차이의 또래들이었다. 조양은과 내가 모시던 선배들을 모두 이동재가 모시고 있었으며, 호남 선배들로부터 인정까지 받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조직 선배로 모시던 박영장 선배와 지만천 선배까지 이동재가 직계 선배로 모시면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박영장 선배는 내가 처음 서울에 상경했을 때인 1970년대 초반 박종석·송태준·오기준 선배와 함께 생활할 때 모셨던 존경하는 선배이며 또한 국회의원 신 아무개씨의 사위였기에 1976년도 신민당 당사 난입 사건 당시 김영삼 의원 등 주류파 의원 폭행 사건과 사흘 뒤에 일어난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사건을 총지휘했던 선배였다. 그리고 지만천 선배는 오기준 선배의 둘도 없는 죽마고우다.

박영장 선배와 지만천 선배는 나에게 오비파 두목 이동재와 싸우지 말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라고 부탁할 정도로 이동재와 밀접한 관계였다. 나는 이동재와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지냈지만 언제고 서방파 영역을 침범할 때는 가차 없는 응징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으며 이동재 역시 수긍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사건은 정종원 선배 때문에 발생했다. 정종원 선배는 자유당 시절 동대문사단 이정재 보스의 핵심 인물이었다. 오야붕 이정재를 위해 임화수와 유지광에게도 폭력을 행사한, 동대문사단의 행동대장이었다.

1986년도만 해도 슬롯머신 사업은 신통치 않았다. 정덕진 선배가 토끼 오락기계 제작 사업부터 시작해 슬롯머신 세계의 대부가 되었지만 1980년대에는 1990년도처럼 거부도 아니었고 막강한 재원도 없었다. 다만 다른 건달보다 돈이 많은 정도였다. 정덕진 선배가 친동생인 정덕일 사장에게 나이트클럽 경영을 맡기고 호텔 파친코도 맡겼지만, 정사장에게는 당시 정권 실세들과 인맥을 유지할 정도의 파워가 없었다.
정사장은 1990년대 들어 이건개·박철언·엄삼탁·경찰청장 등 수많은 거물들과 커넥션을 형성한 장본인이지만, 1986년 당시에는 호텔 파친코 업소 현장에서 종업원들을 데리고 밤을 새우다시피 감독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정덕일 사장은 내 친구 김성광이 영업부장으로 있던 파레스관광호텔 나이트클럽 건물과 바로 나란히 붙어 있는 파레스호텔 파친코를 경영하고 있었다.

1986년 6월 어느 날. 김성광이 운영하던 파레스호텔 나이트클럽에서 훗날 로비의 귀재가 되는 파친코 슬롯머신 대부 정덕진 사장의 동생 정덕일 사장을 만났다. 나와 김성광, 정덕일 사장이 파레스호텔 나이트클럽 옆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안면이 있는 듯한 사람이 찾아왔다. 눈부위가 시퍼렇게 부어 눈을 제대로 못 뜨고 있었고 얼굴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코피를 흘린 자국도 있었다.

권광일이었다. 서울 도쿄호텔 나이트클럽과 조선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명성을 떨치던 그는 당시 김성광이 영업부장으로 있는 파레스호텔에서 서울 제1의 미인 50여 명을 호스테스로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권광일이 저 모양으로 구타당한 것이다. 처음에는 나이트클럽에서 취객에게 행패를 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곧 의혹이 생겼다. 도박판 운영 문제로 오비파는 내 친구 이석권을 난자하고서도 버젓이 서울 시내를 활보하고 있었다. 이석권에 이어 김성광에게까지 도전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권광일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의 숨을 멎도록 만들었다. 오비파 조직원들에게 폭행당했다는 것인데, 그 이유가 정종원 선배가 구해 놓으라고 한 문갑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문갑을 정선배에게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비파 조직원들이 권광일을 찾아와 구타했다는 것이다. 오비파가 서방파 구역을 침범한 것이다. 김성광은 나의 친구이며, 서방파 핵심 조직원이며, 또한 파레스호텔 나이트클럽 총책임자이다. 오비파 조직원들이 권광일을 구타한 것은 김성광을 폭행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김성광을 무시한 것만 아니라 김태촌을 무시한 것이다.

정종원 선배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이동재의 처세술에 감탄했다. 내가 징역 사는 동안 선배들은 이동재를 보스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기에 정선배는 그 하찮은 문갑 일까지 오비파 조직원들에게 심부름을 시켰을 것이다. 박영장 선배는 이동재와 한솥밥을 먹고 있고, 지만천 선배는 이동재와 동업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 인심은 참으로 냉정했다. 세력이 약하고 조직력이 없는 건달들은 상대하지 않았다.

나는 정덕일 사장의 눈치를 살폈다. 김성광은 곤혹스러워하고 있었지만 정사장은 당연하다는 눈치였다. 서방파는 오비파에게 상대가 되지 않으므로 당할 것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소문이란 무서운 것이다. 김성광의 영역에 오비파가 몰려와서 행패를 부린 사실을 정덕일 사장이 알았으니 내일이면 소문이 대한민국 조직 세계 전체로 퍼질 것이다. 이는 김태촌의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결심했다. 두목 이동재를 비롯해 오비파 조직 전체를 섬멸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동재가 김태촌에게 도전한 것으로 받아주기로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조직원들에게 지시했다. 윤정환 일행에게는 정종원 선배 집으로 가서 정선배를 잡아 오게 하고, 나머지 후배들에게는 이동재의 소재를 확인만 하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서방파 조직원 전부를 소집했다. 곁에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던 정덕일 사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제 서울 시내에 조직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목격했으니 놀랄 수밖에!

그러나 정종원 선배를 잡으러 간 윤정환이 그냥 돌아왔다. 정선배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동재의 소재를 확인하러 갔던 후배들도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동재 역시 아지트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석권과 김성광을 불러 고지했다. 오비파와 전면전을 선포했으니 비상 채비를 갖추라고 했다. 그리고 각각 특공대 후배들을 소집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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