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대북 쌀 지원 발표 배경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1997.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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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식 요청에 민간 단체 지원 허용… 남북 대화 ‘해빙’ 계기될 듯
지난 3월5일 3자 설명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북한의 김계관 외교부 부부장은, 설명회가 끝난 후 워싱턴을 방문해 애틀랜틱 카운실이라는 민간 단체가 주관한 한반도 관련 세미나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그가 했다는 발언들이 일부 과장되어 언론에 보도된 바 있으나, 정작 그의 메시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최근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애틀랜틱 카운실 연구원으로 있는 한 재미 교포 학자가 그의 메신저 노릇을 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애틀랜틱 카운실 회의를 주도해 김계관의 워싱턴 방문이 가능하도록 했던 이 학자에게 김계관 부부장이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했다는 것이다.

메시지 내용은 ‘한국과 미국이 북한에 쌀을 제공할 경우 북한이 4자 회담에 응하리라는 것을 한국측에 전해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4자 회담 유인책”

교포 학자는 이 메시지를 워싱턴 한국대사관의 이수혁 정무참사관에게 전했고, 이런 연유로 지난 3월26일 한국측 이수혁 정무 참사관, 북한측 한성렬 유엔공사, 미국측 마크 민튼 국무부 한국과장 3자가 회동해 3자 설명회 후속 회담을 가진 바 있다.

우리 정부는 이 일련의 과정에서 북한측의 태도 변화를 주목하고 있는 듯하다. 북한은 그동안 4자 회담과 관련해 되도록이면 한국을 거론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 한국이 4자 회담을 공식 제의한 사실을 인정하고, 더구나 한국 외교관이 참석한 자리에서 정식으로 쌀지원을 요청했다는 사실은 꽤 큰 변화로 보인다. 북한의 다급한 식량난을 반영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단절되어온 남북 대화의 물꼬를 여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통일원은 이런 연장선상에서 지난 3월31일 대북 유화정책을 발표했다. △그동안 민간 단체의 대북 지원 품목에서 제외한 쌀을 지원 대상에 포함하고 △민간의 북한 주민 접촉 및 방북 승인을 대폭 확대하며 △대한적십자사가 직접 북한 적십자사에 식량을 전달하는 등 남북 적십자 회담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쌀지원의 경우 95년 쌀회담이 결렬된 이후 북한의 군량미 전용 가능성 등을 이유로 금해 오던 것을 이번에 풀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 통일원측 설명이었다.

정부의 이같은 대북 유화 정책에 대해 정부 고위 당국자는 ‘한국이 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을 방해하고 있다는 국제 사회의 여론을 감안했다’고 덧붙이면서, 북한측을 4자 회담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유인책이라는 점 역시 숨기지 않았다. 즉, 북한측이 최근의 뉴욕 접촉 등에서 우리 정부와 대화할 가능성에 대해 전례 없이 유연한 자세를 보이고 있는 점에 주목해, 우리 역시 뭔가 명분을 줄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에 숨구멍 터주는 ‘송곳 전략’

이런 협상 전략적인 차원 외에도 북한의 식량난이 이제는 폭발 일보 직전에 온데 따른 응급 조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고어 미국 부통령과 테드 스티븐스 상원의원 일행이 극단적인 표현을 써가며 북한의 식량난을 우려한 바 있는데, 우리로서도 미국을 통해 전달된 이같은 상황을 무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북경 등을 통해 북한측과 접촉한 국내외 인사들은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경고했다. 얼마전 방북한 스티븐스 의원도 ‘북한 군부가 당·정 인사들에게 심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고 밝혔듯이 ‘한국이 계속 막으면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긴박감조차 나타나고 있다.

정부의 이번 대북 유화책은 미약하나마 북한측에 숨구멍을 터주려는 ‘송곳 전략’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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