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군사기밀 유출 사건 사법처리 향방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7.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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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정보 빼낸 미국인 래클리프씨 사법 처리 ‘수위’ 관심
서울 서초동 르네상스 오피스텔에 있는 무기 중개상 포산기술산업 사무실에 안기부 수사관이 들이닥친 것은 지난 4월21일이었다. 수사관들은 이 회사 사장인 한국계 미국인 제임스 곽(한국명 곽재진·57)씨 등을 연행하고 관련 자료를 압수해 갔다.

이 날 저녁 <한국일보> 법조팀 이태규 기자는 법원 당직실에 우연히 들렀다가 무기 중개상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된 사실을 알았다. 이어 서울지검 공안부가 영장을 청구했고, 안기부 수사관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법원 주위를 서성이는 것을 알고 큰 사건이 터졌구나 싶어 급히 1보를 송고했다.

이때는 이미 가판과 지방판이 마감된 다음이었다. 때문에 이 기사는 다음날 서울 시내판에만 실렸다. 그 바람에 안기부와 기무사는 이 기사가 나가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날 국방부 기자실은 낙종한 매체의 기자들로 인해 발칵 뒤집혔다. 국군 기무사의 관계자가 급히 달려와 ‘국방부 군수국 소속 김택준 공군 중령(47)이 공중조기경보기 입찰 정보가 담긴 합동전략목표기획서(JSOP) 등 방위력개선사업과 관련한 군사 기밀을 빼내 제임스 곽씨에게 전달했다’는 것 등을 설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사건은 단순한 군사 기밀 유출 사건으로 끝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다음날 <한국일보>는 ‘제임스 곽씨가 빼낸 정보는 미국 리튼사의 아시아 담당 지사장 도널드 래클리프씨에게 전달되었다’며 다시 특종 보도를 했다. 이후 래클리프씨가 미국 정보기관에 이 정보를 전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기 시작했다.

4월30일자 <조선일보>가 여기에 불을 지폈다. <조선일보>는 래클리프씨가 수사 착수 직후 미8군 영내로 달아났으며, 미군은 래클리프씨의 신병 인도를 거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 직후 주한미군 관계자가 국방부 기자실로 달려왔다. 기자회견을 자청한 그는 “래클리프씨는 8군 영내에 있는 드래곤 힐이라는 여관(lodge)에 묵고 있다. 드래곤 힐은 현역뿐만 아니라 예비역도 묵을 수 있는 곳인데, 래클리프씨는 예비역 공군 소령이다. 래클리프씨는 드래곤 힐이 서울 시내 호텔보다 값이 싸기 때문에 이용한 것이다. 주한미군이 신병 인도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 날 미8군은 래클리프씨에게 드래곤 힐 이용 기간 연장을 불허했다. 동시에 한국 수사기관에 ‘오늘 중으로 래클리프씨가 8군 기지 밖으로 나갈 것’이라고 통보했다. 이 날 오후 2시30분쯤 사전 구속 영장을 확보한 안기부는 미8군 기지를 나오는 래클리프씨를 붙잡아 구속했다.

93년 안기부는 일본 후지 텔레비전의 시노하라 기자가 군 기밀을 빼내 일본 무관에게 유출한 혐의를 잡아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으로 기소한 바 있다. 반면 미국의 연방 검찰은 96년 미국 해군의 군사 기밀을 한국 무관에게 전달한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씨를 붙잡아 간첩죄로 기소한 바 있다. 이로 인해 이때부터 미국인들에게 간첩죄를 적용할 수 있느냐가 관심사가 되었다. 미국의 CNN 방송은 한국이 이번 사건을 로버트 김 사건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다룰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4월 초 미국의 코언 국방장관은 패트리어트 구매를 은근히 강요했다가 한국 언론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산 적이 있다. 한·미 간에 형성된 ‘한랭 전선’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더욱 미묘해진 것이다. 미국이 한국인의 반미 감정을 고려해 래클리프씨의 사법 처리를 한국에 넘기자, 기무사 또한 5월 초에 갖기로 한 수사 발표를 취소하는 등 신중하게 대응했다. 대신 국방부 군수국장을 보직 해임 하는 등 군사 기밀 유출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미국은 자기네 군사 기밀이 유출될 경우 매우 엄격하게 대응한다. 반면 한국은 시노하라 기자 사건 때처럼 군사 기밀 유출죄만 적용하는 등 소극적으로 대처해 왔다. 과연 미국 정보기관은 래클리프씨 등으로부터 한국의 군사 기밀을 입수했을까. 이 사건을 송치 받은 서울지검 공안부가 간첩죄를 적용할지 관심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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