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광풍’ 기막혔고 ‘언론 광란’ 무서웠네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3.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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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신문, 행운 번호 공개 등 ‘사기 행각’…당 첨자 괴롭 히며 사생활 침해·억측 보도 일삼아



지난 2월8일 저녁 8시40분. 서울 종로의 한 음식점에서 SBS 로또 10회 추첨 방송을 보던 손님들은 추첨이 끝나자 일제히 “에이” 하며 아쉬워했다. 식당 주인은 마치 월드컵 한국전 중계 때와 비슷한 분위기라고 말했다.
지난 한 주, 전국은 로또 광풍에 휩싸였다. 2월8일 로또 추첨을 두어 시간 앞둔 서울 광화문의 한 편의점에는 줄을 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슬립 용지가 모자라자 점원들은 “자동 추첨을 하실 분은 용지를 가져가지 마세요”라고 다급하게 외쳤다. 복권을 사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양복 입고 넥타이 맨 화이트칼라였다. 지난주 전국 성인 1인이 평균 7천5백원 가량을 로또 복권을 사는 데 썼다. 로또는 전국민적인 스포츠였다.


광풍은 끝났지만 휴유증은 만만치 않다. 인터넷 다음 커뮤니티에 개설된 안티로또 모임에는 ‘당분간 일손이 잡히지 않을 것 같다’ ‘로또는 마약이다. 망할 국민은행’과 같은 분노 어린 글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로또 열풍을 풍자한 노래도 나왔다. 노래패 ‘우리나라’가 2월9일 발표한 이 노래는 로또 광풍의 원인을 성실히 일해서는 인생 역전을 하기 힘든 사회 현실에서 찾는다. ‘열나게 뛰어봐도 안되더라. 빡세게 살아봐도. 인생역전. Jotto!~’


자성하는 목소리는 그간 언론 보도 행태에 대한 비판도 포함한다. 복권 열기가 치솟자 스포츠 신문들은 비과학적인 정보와 선정적인 뉴스를 내보내기에 급급했다. ‘행운의 번호를 공개한다’며 당첨 예상 번호를 찍은 언론도 있었다. 확률이 높은 번호 조합은 결코 존재하지 않지만 이들 신문은 ‘안되면 말고’ 식으로 사기 행각에 동참했다.


가장 큰 문제는 당첨자에 대한 언론의 집요한 취재 경쟁이었다. 지난 1월13일 로또 6회차 추첨에 당첨되어 상금 65억7천만원(세전)을 받은 ㅈ씨의 경우가 특히 그랬다. 그는 현재까지 국내 복권 역사상 최고액 수령자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살고 있는 ㅈ씨를 인터뷰하기 위해 수많은 기자들이 그의 집 앞에 달려가 가족을 괴롭혔다. ㅈ신문은 ‘한 수습 기자의 당첨자 찾아내기 르포’를 주말 매거진에 실었다가 독자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담당 기자가 사과하는 촌극을 벌였다. 그 수습 기자는 ㅈ씨를 찾아내기 위해 비슷한 인적 사항을 가진 사람의 집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본인 확인을 위해 어린 자녀의 아랫도리까지 확인하는 ‘기자 정신’을 보였으나 독자들의 반응은 ‘지나친 사생활 침해’라며 냉담했다.


“돈 요구하는 조폭·사회단체 없었다”


ㅈ씨를 만난 언론은 SBS <세븐데이즈> 취재진이 유일하다. 방송 보도와 취재진의 말을 종합해 보면 당첨 이후 그의 삶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돈이 생기면 세상 걱정 없을 줄 알았는데, 막상 며칠 지나니까 이것저것 고민과 걱정이 생겨 잠을 못 이뤘다. 식사를 하기 힘들어 몇 끼를 굶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첨된 뒤 2주일 사이에 몸무게가 5kg이 빠졌다. 전기설비업을 하던 그는 지금은 일을 그만두었다. ㅈ씨는 “돈이 생겼다고 사람이 달라졌다는 말을 제일 듣기 싫다”라며 자동차 외에는 새로 산 것이 없다고 말했다. 국산 중고 승용차로 바꾸었는데 “평소부터 그 차를 꼭 갖고 싶었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그는 “괴롭히는 조폭도 없고 돈을 요구하는 단체의 전화도 없었다. 하지만 귀찮게 하는 기자들은 많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그를 둘러싼 억측 보도가 난무했다. 뻔히 집에서 살고 있는데 ‘잠적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ㅈ씨의 아내를 만나고는 ‘부부 관계가 행복해진 것 같지도 않았다’라고 보도한 신문도 있었다. 이 신문은 ㅈ씨 가족이 설날 차례를 지내러 가지도 못했다고 보도했다. ㅈ씨는 “분명히 차례를 지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내는 부부 관계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고 했다”라고 밝혔다. 신문 기자들이 끝까지 ‘복권 당첨 이후에 불행해진 ㅈ씨의 삶’을 묘사하기 위해 유도한 것과 달리 ㅈ씨는 “달라진 것도 없고 가정 불화도 없다. 기자들이 제발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라고 SBS 취재진에게 당부했다. 이쯤되면 가정 불화를 조장하는 것은 복권이 아니라 언론인 셈이다.


‘복권 당첨=불행’은 속설일 뿐


흔히 복권 당첨자들의 삶은 불행하다는 속설이 있다. 주변의 협박 때문에 대인기피증에 걸리는가 하면, 당첨금을 탕진하고 가정 불화로 이혼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거의 신앙처럼 퍼져 있는 이 속설은, 하지만 제대로 확인된 적은 없다. 이와 관련해 유일하게 언론에 인용된 내용은 ‘미국의 한 일간지가 복권 당첨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는데 과반수가 예전보다 불행해졌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설사 그런 조사가 있다 하더라도 주관적인 설문 내용을 놓고 실제 불행해졌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미래전략연구소 최종은 과장은 “대개 법정 소송까지 가는 나쁜 일이 생겼을 때 복권 당첨자의 신원이 노출된다. 때문에 마치 복권 당첨자 전체가 불행하게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반박했다.


실제 국내 복권 당첨자들을 만나 당첨 이후 삶을 물어보면 ‘크게 달라진 것 없다’거나 ‘잘 살게 되어 기쁘다’는 반응이 많았다. 2001년 11월 기업복권 1억원에 당첨된 김영수씨(가명)는 당첨금을 새 집을 사는 데 보태 썼는데, 지금은 4천만원 가량 남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첨 이후 생활에 자신감이 생기고 명랑해졌다. 하지만 삶의 방식에 큰 변화는 없다. 가정 생활도 그대로다”라고 말했다.
물론 60억원 이상의 고액 당첨자가 배출된 것은 최근 일이므로 이들이 어떤 삶을 살지는 알 수 없다. 2월8일 당첨된 13명의 신상은 2월10일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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